문화

부다페스트 대통령궁 앞, 거리의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스카이뷰2 2011. 7. 12. 21:15

        헝가리  겔레르트 언덕에서 본 부다페스트 전경()

   

 

  부다페스트 대통령궁 앞, 거리의 소녀 바이올리니스트

 

 

‘다뉴브의 진주’로 불린다는 헝가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거리의 바이올리니스트 소녀다.

부다페스트 대통령 궁 맞은 편 길거리 뙤약볕 아래서 혼자 바이올린을 켜던  열서너 살 쯤 돼 보이는 소녀는 수줍음과 어색함이 듬뿍 묻은 표정으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연주하고 있었다. 지난 7월 2일 정오쯤이다. 그 가녀린 선율에 뭉클했다.

 

흰색바탕에 푸른 줄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한창 사춘기 감수성 예민할 나이에 ‘돈벌이’를 위해 한 낮, 길거리에 홀로 서서 연주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녀는 견디기 어려운 수치심을 느낄 때다.  낯선 관광객들의 ‘동전 몇 닢’을 기다리며 썩 뛰어나지도 않은 솜씨로 바이올린을 켜야 하는 건 어쩌면 소녀의 마음에 두고두고 아픈 기억으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가뜩이나 센티멘털한 곡조의 예스터데이가 더 애잔하게 들려왔다. 세계 각국에서 왔을 관광객들 역시 그 소녀의 서툴지만 정성을 다하는 듯한 연주가 안쓰러웠는지 소녀 앞에 펼쳐져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 안으로 지폐를 살며시 내려놓고 가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날 그 소녀는 과연 ‘연주비’를 얼마나 벌었을까?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거리의 어린 소녀 악사’를 보면서 ‘센티멘털 저니’의 진수를 느끼는 듯했다. ‘길거리 공연’은 유럽문화의 흔한 행태라고도 하지만 ‘단독 연주’를 하던 어린 그 소녀는 ‘생계형’인 듯 보여 더 애처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상한 건 그 소녀가 서 있는 곳에서 정면으로 불과 200~300미터 앞에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대통령 궁’ 건물이 있다. 하지만 ‘청와대 경비 스타일’과는 영 딴판이다. 경비원이 쉽게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있긴 있을 텐데...'그림자 경비'라도 하는지.

 

아무리 대통령중심제가 아니어서 그렇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궁인데 경비가 너무 허술해 보였다. 아무나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아마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 덕분에 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단독연주도 가능했을 것 같다. 사회주의 시절에는 엄두도 못냈을 일일 것이다.

 

섬세한 선율의 예스터데이를 들으며 그 곡명이 품고 있는 뉘앙스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시 한편이 생각났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詩)다. 물론 다 외지는 못하지만 그 시를 배우던 고교시절 국어시간과 멋쟁이 국어선생님의 ‘스타일리시한 분위기’는 또렷이 기억났다.

 

불과 몇 시간 전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주제건만 오래전 국어시간이 떠오르는 기이한 체험을 하면서 ‘나도 늙어가고 있다’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 일은 선명하게 기억하지만 최근 일은 자주 잊는 게 바로 ‘노화’의 첫 증상이라는 걸 어디서 본 듯해서다.

 

어쨌건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의 존재를 기억해냈다는 건 그래도 부다페스트라는 지역에 제법 어울리는 여행자의 정서로 괜찮은 것 같다.  ‘보통 시’도 아니고 ‘부다페스트 항쟁’때 죽어간 시민 2500 여 명 중 이름 모를 한 소녀의 애틋한 죽음을 시로 형상화 했다는 건  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행위일 것이다. 

 

우리에겐 국어교과서에 실린 ‘꽃’이라는 시로 더 많이 알려진 김춘수시인은 1958년 이 ‘부다페스트~’라는 시를 발표했다. 1956년 소련 탱크에 짓밟히고 만 부다페스트 시민들을 '시'로써 애도해준 것은 당시 우리 대한민국의 존재감에 비해 상당히 수준 높은 문화적 행위로 볼 수 있겠다.

6.25 전쟁으로 숱한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것도 시인으로 하여금 이국의 소녀의 죽음에 그렇게 애틋한 시 한편을 바치게 했을 것이다. 

 

50년도 더 전에 ‘머나먼 나라’헝가리의 ‘민주화 운동’에 공감하며 채 피어보지도 못한 꽃봉오리 같은

13세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이 대한민국에 있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당히 격조있는

문화적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의 존재감을 보여준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스터데이' 선율에서부터 '부다페스트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까지 기억해내며 이어지던 내 머릿속 ‘문화적 여행’은 헝가리 시내에 있는 ‘한국관’이라는 음식점의 비빔밥을 먹으면서 막을 내렸다. 아무래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도 있듯 너무 허기진 탓이었는지 이 세상에서 그렇게 맛있는 비빔밥은 처음 먹어보는 것 같았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일행도 모두 '최고의 비빔밥‘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헝가리 여행 중 두 번 째로 인상 깊었던 건 바로 대한민국 동포가 운영하는 한국관의 비빔밥이었다.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이 ’맛있는 음식‘과의 조우가 아닌지...더구나 서울의 어느 식당보다 더 맛있는 비빔밥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발견했다는 건  행운이었다. 어쩌면 내 식복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불과 하루 체류한 곳이지만 헝가리 부다페스트는 내게 ‘이미지의 여행’이 주는 즐거움을 한껏 누리게 해준 고마운 곳이다.  헝가리에서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건 인구 1천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나라지만 노벨상 수상자를 13명이나 배출했고, 그중 노벨 문학상 2명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도 3명, 노벨 화학상은 4명이나 된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비타민C도 헝가리 사람이 만들었다는 얘기도 흥미를 끌었다.

 

'노벨상 컴플렉스'가 있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헝가리라는 이 작은 나라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노벨상 수상유무가 국가의 존재감을 결정하는 척도는 아니겠지만 여하튼 우리는 고작 평화상 한 개만 받은 국가여선지 물리학상이나 화학상 문학상을 척척 받아낸 헝가리 국민의 저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더구나 200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케일 임레의 ‘운명’이라는 장편소설은 독일인들이 노벨상 수상위원회에 강력 추천해 수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문학수준이 만만치 않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도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통령궁 앞에선 그 어린 소녀 바이올리니스트가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수줍게 연주하며 ‘생계비’를 벌고 있을 것이다. 잊혀지기 어려운 애잔한 풍경이다.

 

 

아래 故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전문을 소개한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金春洙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 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부서진 네 두부는 소스라쳐 30미터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를 적시며 흘렀다.

ㅡ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 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비칠 수 없는

다뉴브 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

다뉴브 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스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 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 갔을까.

죽어 갔을까. 악마는 등 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한국의 열세 살은 잡히는 것 하나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 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도 짙은 빛깔의 아픔으로 젖어 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투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 뿌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꾼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불면의 밤, 왜 모든 기억을 나에게 강요하는가.

나는 스물 두 살이었다.

대학생이었다.

일본 동경 세다가야 서(署) 감방에 불령선인으로 수감되어 있었다.

어느 날, 내 목구멍에서

창자를 비비 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어머니, 난 살고 싶어요! >

난생 처음 들어 보는 그 소리는 까마득한 어디서,

내 것이 아니면서, 내 것이면서......

나는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부딪고

북받쳐 오르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가 나를 우롱하였을까.

나의 치욕은 살고 싶다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내던진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소녀의 뜨거운 피 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아쥬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의 불면의 담담한 꽃을 피운다.

인간은 쓰러지고 또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또 쓰러질 것이다.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악마의 총탄에 딸을 잃은 부다페스트의 양친과 함께

인간은 존재의 깊이에서 전율하며 통곡할 것이다.

다뉴브 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딩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 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 바닥에 쥐새끼보다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