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전경(다음자료사진)
프라하 외곽 마을의 기품 있는 공원과 당찬 중국 꼬마들
프라하 방문은 체코 외곽에서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가본 적이 있는 독일의 로텐부르크를 먼저 들러보고 체코외곽으로 향했다. 독일의 고속도로 역시 교통체증이 우리나라 못지않았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1시간 반 정도면 갈 수 있다는 로텐부르크까지 무려 3시간 이상 걸렸다. 주차장 같은 고속도로에서 독일의 여성 총리 메르켈이 잠시 생각났다.
이렇게 교통체증이 심한 고속도로를 ‘손 볼’ 생각을 안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그녀에게 묻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의 국정 장악능력이 떨어져 이렇게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겠지만 왠지 평일 오전인데 서울 강남의 토요일 오후보다 더 심한 고속도로 체증에 메르켈의 ‘정치적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슬며시 들었던 것이다.
로텐부르크는 10년 전 처음 가볼 때만해도 소박한 관광지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상업적 관광지’로 변해버렸다. ‘중세의 보석’으로도 불린다는 이 마을 한 복판 광장엔 예전에 없던 과일 노점이 한 곳 들어섰다. 마을 입구보다 과일 값이 두 배쯤 비쌌다. ‘자릿세’가 비싼 탓이겠지만 관광객을 ‘봉’으로 여기는 것 같아 좀 씁쓸했다. 어느 나라든 이 관광지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 수도 프라하로 가기엔 시간이 어중간해 일단 외곽의 소콜로브라는 소도시에 짐을 풀었다. 처음 와 본 체코의 작은 마을에서 ‘문화적 충격’을 받을 줄은 예상치 못했었다. 작은 규모의 호텔은 생각보다는 깔끔했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어둠은 아직 내리지 않았다. ‘백야(白夜)’다.
파크 호텔이라는 이름대로 호텔은 숲속의 공원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공원의 규모가 나를 놀라게 한 것이다. 수령(樹齡)이 수 백 년도 넘었을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곳곳에 그야말로 ‘웅장한 위용(偉容)’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호수공원’과는 ‘격(格)’이 달랐다. 뭐랄까. 이렇게 위풍당당한 나무들을 ‘고이’ 지켜온 이 나라 사람들의 정서(情緖)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이 넓디넓은 수풀공원을 인위적으로 고치지 않고 그냥 보존해왔다는 사실에서 체코가 만만치 않은 국가라는 걸 느꼈다.
공원을 걷다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다가오는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동양계 꼬마 두 녀석과 마주쳤다. 혹시 한국 꼬마들인가 싶어 ‘안녕!’하고 말했더니 눈이 큰 사내아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뭐라고 대답한다. 옆에 있는 꼬마도 뭐라고 거드는데 처음 듣는 언어였다. 손짓까지 곁들이며 활달하게 말하는 꼬마들을 보면서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꼬마들은 처음 본 이방인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은 채 아주 당당하게 계속 뭐라고 말한다.
이만한 나이의 아이들은 낯선 사람 앞에선 대게 부끄러워하는 편인데 요 녀석들은 아주 당차고 활발한 모습이 귀여웠다. 한 몇 분 동안 그 녀석들은 나름대로 나와 대화를 시도해보려고 얼굴까지 찡그려가며 말을 걸어왔다. 나는 혹시 이 꼬마들이 영어는 알아듣나 싶어 쉬운 영어 몇 마디를 건넸다. 역시 꼬마들과의 소통은 불가능했다. 손가락 6개를 펴고 웃어보였더니 한 꼬마가 손가락 7개를 쭉 펴 보인다. 아마도 일곱 살이라는 것 같다.
잠시 후 공원 내 다리 쪽에서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검은 머리를 뒤로 동여맨 동양인 여성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니하오’라는 그녀의 말소리를 들으면서 요 녀석들이 중국 꼬마들이라는 걸 그제서야 알았다. 나도 ‘니하오’라고 응답하고 꼬마들에게 바이~라고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꼬마들의 모친인 듯한 그 젊은 여성은 아이들에게 ‘바이~’를 시키며 나를 보고 웃었다. 꼬마들도 나에게 바이~하면서 활짝 웃었다.
아마 엄마의 등장이 녀석들의 이방인에 대한 긴장을 풀어줬던 것 같다. 세 모자의 사라지는 뒷모습은 평화로워보였다. 아마 저 중국인 모자(母子)는 가장(家長)을 따라 이곳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뻗어가는 중국’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서 조합되었다. 프라하 외곽 소도시까지 진출한 중국인들의 ‘기백’이 느껴졌다.
게다가 기품 있고 풍성한 공원을 마을 복판에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체코 인들의 ‘문화의식’수준을 느끼며 경제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우리나라가 아직 안심할 단계는 아닌 것 같다는 ‘애국자 같은’ 생각을 했다. 그 녹색 너른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들이 당당하게 서 있는 외곽 도시의 모습은 프라하를 향하는 내게 전주곡을 들려준 셈이었다.
다음 날 아침 프라하에 도착하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도시의 어머니’라는 말뜻을 지닌 프라하는 듣던 대로 ‘감동을 주는 도시’였다. 이름깨나 알려진 예술가들이 왜 ‘프라하’를 ‘성지’처럼 순례했었는지를 알 것 같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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