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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영화’ 레 미제라블, 분열된 대한민국을 치유할 걸작

스카이뷰2 2012. 12. 27. 13:17

 

 

 

‘힐링 영화’ 레 미제라블, 분열된 대한민국을 치유할 걸작

 

 

 

그 유명한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1862년에 쓴 대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 영화로 만들어져 2012년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개봉한다는 요란한 TV광고에 약간은 거부감을 느껴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에 ‘킹 스피치’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영국 감독 톰 후퍼가 연출했고 휴 잭맨, 러셀 크로우, 앤 헤서웨이가 나온다는 것과 함께 개봉 며칠 만에 100만 관객이 몰렸다는 소리에 이 나이에도 여전히 ‘귀가 여린’ 나는 바로 티켓 두 장을 끊었다.

 

휴일이라 평일보다 1인당1천원 씩 더 받는 영화관의 이상한 상술이 불쾌했지만 영국인 감독이 만든 영화라면 일단 봐준다는 개인적 불문율이 2012년 판 ‘레미제라블’ 티켓을 끊은 가장 결정적 이유였다. 그만큼 '재능 있는' 영국인 감독들을 신뢰한다는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도 역시 ‘잉글리시 맨’ 감독의 연출 솜씨는 내 기대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72년생 젊은 영국 감독 톰 후퍼는 '젊음의 열기'를 음악으로 표출해내는데도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영화를 보기 전엔 이 영화가 ‘송 쓰루(Song Through)’형식이라는 대사 없이 주로 노래로 전개되는 뮤지컬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평소 뮤지컬 영화는 별로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레미제라블은 외려 뮤지컬이어서 그 감동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만큼 ‘음악’의 치유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1789년 역사적인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부 성공을 거둔 뒤 프랑스 파리는 성난 시민들에 의해 혁명적 투쟁이 상시적으로 일어날 정도로 분열이 심했고 민생은 극도로 어려웠다. 감자와 도토리로 끼니를 연명하는 '민중'에 비해 로열패밀리나 상류사회 귀족들은 더할 수 없이 호사를 누렸다.  

 

150년 전 정치인이자 작가인 빅토르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발표할 무렵에도 그들의 세상은 늘 그렇게 뒤숭숭했다. 극심한 빈부격차는 그 시절 민중을 좌절시키고 분노케 했다. 이런 '부의 편재' 현상은 지금 한국을 비롯한 전세계가 ‘1%대 99%’라는 적대적인 경제구도에 상실감과 절망을 느끼는  것과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그러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세상의 불공평함은 변함 없다는 말이다. 

 

빅토르 위고는 대하장편소설 ‘레미제라블’ 서문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이 시대의 세 가지 문제, 프롤레타리아 탓으로 남자가 낙오되고,

굶주림으로 여자가 타락하고, 어둠 때문에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또 어떤 지역에서 사회의 질식 상태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한,

다시 말해 좀 더 넓게 보아 이 지상에 무지와 비참이 있는 한,

이러한 책들이 쓸모없지는 않을 것이다.

1862년 1월 1일 오뜨빌 하우스에서 빅터르 위고”

 

19세기 작가의 눈에도 빈곤과 불평등으로 빚어지는 사회병리 현상이 ‘대를 이어 역사적으로

유구하게 이어져내려 갈 것’이라는 게 보였던 것 같다.

빅토르 위고 자신도 ‘반체제 정치인’으로 19년간이나 망명생활의 설움을 절절히 경험해서인지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도 억울한 옥살이로 19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고작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하는 이십년 세월을 아깝게 감옥살이로 보냈고 그 이후에도 늘 불안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장발장이라는 남자가 겪는 고통은 어쩌면 현대인의 고단하고 불안한 생활정서와도 비슷해 보인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진창에서 인간으로 참기 어려운 노역에 시달리고 있는 죄수들의 절망어린 불온한 눈빛과 비장한 음악에 실린 절규는 관객의 시선을 괴롭히면서도 이상하게 대단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동양 남자 비슷한 이미지의 주연배우 휴 잭맨이 보여주는 장발장의 처절한 고뇌는 관객에게 ‘동반자적 고통’을 요구한다. 청순한 이미지의 앤 헤서웨이가 그녀의 슬픈 운명 탓인지 비정한 세상 탓인지 결국 매춘부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과정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동정과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게다가 동서고금의 변치 않을 인생테마 ‘애끓는 모정’의 절규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누가 저 여인을 저렇게 만들었는가! 아마 21세기 관객들도 굳이 타임머신을 타고 가지 않더라도 여주인공의 신산의 삶에 애도하고 ‘사회정의’의 실종에 함께 분노할 것이다.

 

장발장을 끝까지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의 운명도 슬프긴 마찬가지다. 러셀 크로우가 비장한 음색으로 부르는 추격자의 인생 역시 ‘언해피’하다. 자신의 인생철학과 투철한 국가 의식이라 믿고 있는 그의 편향된 사고방식은 결국 그를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으로 몰고 만다.

 

‘못살겠다! 갈아 치우자’는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청년 혁명가들의 합창과 전쟁터에서도 꽃핀다는 연인에 대한 애틋한 사랑, 자신을 끝없이 괴롭혔던 원수를 용서하는 화해의 순간 등은 패배자의 대열에 선 대선 이후 대한민국의 꽁꽁 얼어붙어 있는 ‘낙오자들’의 찢어진 가슴을 치유해주는 ‘영약(靈藥)’의 역할을 해주는 듯하다. 그만큼 웅장하면서도 구슬픈 ‘혁명의 합창’과 ‘사랑의 노래’ ‘용서의 가사’가 관객의 심금을 울린다.

 

시민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정작 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정부군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마는 수많은 젊은 혁명가들의 슬픈 운명도 관객들에겐 연민과 카타르시스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은 용서와 화해 속에 ‘내일의 노래’를 합창하는 시민 혁명군들의 모습에서 대한민국 관객들은 어쩌면 32년 전 ‘오월 광주’와 1219 대선이후 치명상을 입은 패배자들의 아픈 사연들을 모두 치유해주는 ‘힐링’의 참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50년 전 세상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느끼는 고통의 무게는 똑같고 그 치유책도 결국은 사람들 간의 용서와 화해를 바탕으로 빛나는 ‘상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힐링 영화’ 레미제라블‘을 여러분께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