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이야기

김문수 서울시장 후보 부인 설란영(薛蘭寧) 인생 스토리

스카이뷰2 2018. 6. 2. 22:56



 

 

                                                            란영여사.               

 

 


김문수 서울시장후보  부인 설란영(薛蘭寧) 인생 스토리

      

 

 

  ‘설란영(薛蘭寧)’이라는 특이하면서도 로맨틱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김문수서울시장후보의 안사람이다. 설란영씨는 김문수후보를 처음 만날 무렵인 1978년,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세진 전자’라는 전자부품회사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내고 있었다. 일반적 선입견으론 ‘여성 노조위원장’이라면 좀 강성의 이미지를 주는데다 그동안 매스컴에 간간히 보도된 그녀의 사진들은 다소 경직된 분위기가 살짝 감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순간 ‘카메라는 거짓말을 안한다’는 속설이 틀렸다는 걸 실감했다. 사진발이 안 받는 좀 ‘특이한’ 케이스였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포토제닉’한 스타일이 아니어서 다소 걱정하는 품새였다. 처음 설란영씨를 만나는 순간 이 사람이 신문에서 본 그 사람? 이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녀는 사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사진보다는 실물이 훨씬 나은 케이스라고나할까.  

 


매스컴에서만 그녀를 본 사람들이라면 열에 아홉은 “좀 쎄게 보이네”라는 인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 얼굴 윤곽이 뚜렷한 까닭이다. 하지만 그녀와 마주하면 사람을 끌어들이는 묘한 흡인력이 있다는 걸 금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강성보다는 오히려 연성이다. 오랜만에 푸근하고 속깊은 옛 친구를 만난듯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녀는 누구를 만나도 차이를 두지 않고 한결같은 대접을 하는 스타일이다. 문득 언젠가 신문에서 본 ‘조선시대 궁중미녀도’라는 그림이 떠올랐다. 음전하면서도 기품이 서린 궁중여인의 모습과 설란영의 모습이 겹쳐졌다.

조선시대 궁중미녀도.



노동운동가 출신 김문수후보가 1996년 제도권에 진입, 처음 국회의원 뱃지를 단 이래 국회의원직을 내리 세 번, 경기도지사직을 두 번 연임하며 ‘승승장구’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설란영이 품고 있는 그 ‘귀한 이미지’, 진정 겸손하고 검소한 이미지와 아울러 ‘받을 복(福)’이 있어 보이는, 기품어린 분위기야말로 김문수후보의 ‘오늘’을 있게 해준 ‘핵심요소’같다.


설란영씨를 보면서 몇 해 전 봤던 중국 최고지도자 장쩌민주석의 부인도 생각났다. 그 부인은 평소 허름한 복장으로 베이징 시내를 잘 돌아다니는 바람에 그가 최고 권력자의 아내라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얘기다. 하루는 그녀가 베이징의 특급호텔에서 열리는 여성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호텔 안에 들어서려다 호텔 보이로부터 ‘입장 저지’를 당했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화(實話)다. 그만큼 검소하고 외적인 치장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내실 있는 영부인’이었다는 얘기다. 아닌게 아니라 언젠가 TV화면에 나온 그 부인을 보니 그러게도 생겼다. 아주 건실하면서도 속이 꽉 찬 그런 이미지를 풍겼다. 김문수후보 부인도 그런 스타일이다.

 


귀고리 목걸이나 심지어 반지 같은 것도 끼지 않았다. 상의 칼라에 자그마한 새 모양의 브로치를 단 게 ‘모양내는’ 전부였다. 아주 실용적이고 살림꾼 스타일이다. 알뜰하게 삶을 살아온 이 땅의 수많은 주부들과 꼭 같은 모습이다. 남편이 ‘내로라’하는 정치지도자라는 자랑은 하지 않는 스타일같다.  

 


그날, 설란영씨는 일부러 그렇게 약소하게 차려입고 나온 건 아닌 것으로 보였다. 원래 늘 그래왔던 것이 느껴지는 사람 같다. 진정성, 진솔함, 소박함, 따스함 이런 온갖 좋은 이미지의 단어들이 그녀를 받쳐주는 액세서리였다.

 


그동안 남편이 그 정도로 ‘출세’한 부인들을 꽤 많이 만나왔지만 설란영씨 만큼 일관되게 ‘정직한 겸손’을 보여주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러기가 쉽지 않다. 평생 살아온 대로의 ‘인품’이 고스란히 보인다고나 할까.

아무튼 ‘사진’으로만 봤던 때와는 다른 품격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진정한 ‘귀부인’을 만났다는 인상을 받았다.  ‘힘있는 정치인’의 안사람쯤 되면 으레 있을 법한 ‘자의식 과잉’ 같은 걸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인생 육십 넘게 살다보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모자이크처럼 그 사람을 장식해준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링컨도 “나이 마흔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는 명언을 그래서 했나보다. 힘든 인생을 살아온 끝에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누님’같은 설란영씨의 스토리는 요즘 화려하고 비싼 이야기만 좋아하는 젊은세대들에겐 더더욱 희귀한 이야기여서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설란영씨는 전남 고흥에서 태어나, 네 살 이후 순천에서 살았다. 초등교사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몇 차례 전학을 다녔다. 아버지의 직장인 학교 도서관의 책을 거의 빌려 읽는 ‘독서광’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 엄마아빠가 영화관가려는 대화를 듣고 그 극장에 먼저 달려가곤 했다. 자연스레 영화와 음악과 책을 가까이 하는 ‘문화적 환경’에서 문학소녀로 성장했다. 그녀의 ‘영화사랑’은 그때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무려 5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란영(蘭寧)’이라는 이름은 딸을 극진히 사랑한 부친이 ‘난초처럼 편안한 삶’을 살기를 기원하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 무렵 지방 소도시에 살던 소녀들 이름은 대부분 끝말에 주로 자(子)자를 쓰던 시절이었다. 젊은 아빠의 ‘댄디한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는 이름이다.

 


그러나 소녀는 결혼 이후 15년 동안은 이름처럼 편안히 살아오진 못했다. ‘인생의 신산(辛酸)’을 남 못지않게 겪어야 했다. 설란영씨는 1978년 우연히 서울 구로 공단에 있던 세진전자에 취직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거기서 선배의 부탁으로 엉겁결에 노조위원장직을 맡았고, 그 자리 덕분에 ‘오늘의 김문수 서울시장 후보’와 운명적으로 만났다. 당시 김문수지사는 한일 도루코 노조위원장으로 영등포 역 앞에 있던 ‘금속노조남서울지역지부’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설란영씨도 지역지부 여성부장이어서 ‘그들’은 자연스레 자주 만나게 되었다.

 


어떤 부부는 ‘첫 눈’에 반해 결혼하기도 한다지만 ‘그들’은 처음엔 외려 티격태격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설난영씨는 워낙 ‘노조활동’에 열심이어서 결혼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연’이 닿아선지 ‘그들’은 마침내 결혼에 이르게 된다. 결혼 전 찾아 뵌 ‘장인어르신’은 당시 백수신세였던 그에게 “자네가 우리 딸을 어떻게 먹여 살릴 거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그때 가진 건 없어도 ‘패기(覇氣) 하나’만은 산더미 같았던 청년 김문수는 이렇게 말해 점수를 땄다고 한다. “만인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한 여자를 못 먹이겠습니까.”

1981년 두 사람은 나란히 손 붙잡고 입장하는 ‘신식 결혼식’을 했다. 신부는 순백의 웨딩드레스 대신 ‘실용적인’ 연보라색 평범한 원피스를 입었다. 설란영이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눈여겨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김문수 설란영 결혼식 당시.                                                                               

                                                                                                                                                                                                                                                                                                                                                                                                                                                                             


그 이후 오늘까지 그녀는 노동운동 현장에서 바삐 뛰어다니는 남편을 대신해 살림을 도맡아 꾸려올 때나 남편이 가져다주는 ‘봉급’으로 생활할 때도 ‘낭비’라는 건 모르는 ‘짠순이 스타일’의 전형적인 주부였다.

지금 저렇게 ‘출세한 남편’이 곁에 있지만 그녀는 여느 귀부인들과는 판이한 소박한 주부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그녀에게선 자연산의 ‘귀한 이미지’의 품격이 느껴지나 보다.

 


설란영이라는 여성에게서 느껴지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헌신과 봉사’다. 어떤 사람이 오더라도 그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그녀는 그 사람의 말을 다 들어주고 도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선 전심전력으로 도와준다. 상대방의 말을 다소곳이 들어주는 ‘경청(敬聽) 스타일’도 설란영의 특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어느 누가 상대방의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정색하고 들어주겠나. 하지만 그녀는 ‘경청하는 자세’하나로 이날 이때껏 주위사람들을 보살펴 온 듯하다. 진정성이 느껴진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 했던가. 설란영의 남편 김문수후보도 ‘경청’과 ‘배려’부문에선 둘째가라면 섭섭해 할 스타일인 듯하다. 진짜배기 부창부수(夫唱婦隨)다.

 

 “김문수란 사람은 참으로 맑고 신선하고 똑똑하게 보였고, 열정적으로 보였으며, 솔직해 보였고 직선적이었다. 자랑하고픈 내 동생 같았다”는 말로 ‘출세한 남편’의 옛 모습을 자랑 겸 회상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오랜 세월 함께 보내온 부부애가 느껴졌다.   


30년을 넘게 살아온 이 부부 얼핏 보면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지만 환히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는 모습에선 ‘부부는 서로 닮는다’는 말을 실감케 해준다. 설란영씨는 남편이 정치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맹반대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요즘 심경은 이렇다.

 


 “70~80년대 경제성장의 산업역군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을 외면하지 않고 분노하며, 온몸을 던져 개선하고자 했던 남편, 사회민주화를 위해 두려움 없이 용기 있게 투쟁하던 모습, 누가 뭐라고 해도 꿋꿋하게 항상 교과서대로 바르게살기를 실천한 인간이기에...남편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나는 존경한다”

아내에게 존경받는 남편이 흔치 않은 세상에 김문수 후보는 일단 '성공한 남편'인 것 같다.

 


 그녀는 ‘정치인 김문수’의 최측근으로 남편의 정치활동을 적극 내조하는 스타일이다. 단 조용히, 소리내지 않고... 김지사 역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아내 설란영씨에게 가장 먼저 상의한다고 말한다. ‘오래 산 부부’는 이제 ‘동지애’로써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주고 있는 모습이다. 설란영씨는 남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이렇게 말한다.

 


“어느 국회의원 자서전에서 김문수는 영혼이 맑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내인 나도 동의한다. 물론 남편과 살아오면서 성격상 많은 다툼과 섭섭함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서로 잘해보자며, 노력하자며 손을 내민다. 정치인의 아내는 역시 직함 없는 정치인이다. 반은 공인이라 생각한다. 자신의 눈높이를 항상 위보다 아래에 두고 내 뜻보다 상대 귀를 늘 열어 민심을 듣고 남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 매일매일 평가 받는다는 생각을 한다. 모질게 살아온 남편과 나의 삶이기에 지금의 우리는 매 순간을 소중히, 보이지 않는 신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남편은 지금껏 살아온 역사가 있기에 앞으로도 무엇이 되고자 얻고자 사는 게 아니라 주어진 자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자신을 비울 것이다.”

 

(PS;20년전 자신의 자서전에 '김문수는 영혼이 맑다'고 쓴 사람이 바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입니다.

15대 국회때 첫 뱃지를 함께 단 두 사람은 지금까지 끈끈한 우정으로 서로를 존경하는 사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