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시멜로 이야기와 정지영 아나운서 그리고 미인계(計)
북한핵실험으로 전 세계가 떠들썩하게 보낸 지난 한 주 대한민국의 출판계에서는 ‘북한핵’에 버금가는 ‘번역사기(詐欺)’문제로 온통 난리가 났었다.
북한핵문제가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이 ‘번역사기’사건이 단연 톱뉴스였을 것이고 관련당사자 중 주인공격인 프리랜서 아나운서 정지영씨는 아마도 방송을 계속 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건의 심각성에 비해 ‘운 좋게도’ 자신이 맡고 있는 심야프로에서 수박겉핥기식의 사과성 멘트를 잠시 날린 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활동하고 있다. 오히려 그 사건이 그녀의 위상을 더 확고히 해주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녀의 ‘당당한 아름다움’은 식을 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다 알려졌듯이 사건의 핵심에는 ‘돈’과 ‘미인계’가 얽혀 있다. 아무도 그렇게 최고 베스트셀러가 될 줄 몰랐던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번역서가 무려 1백만부 이상 팔리는 빅히트를 치면서, 사고가 난 것이다. 요 근래 번역서가 그렇게 많이 팔린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마시멜로 이야기’ 사건이 터진 것은 북한핵실험으로 한창 온나라가 정신없었던 지난 10월 11일 무렵,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정지영아나운서가 아니라 ‘나’라면서 전문번역가 김모씨가 이른바 ‘양심선언’을 하면서 터져나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건국 이래 최대 불황을 겪고 있다는 한국출판계에서 현재 최고· 최장의 베스트셀러로 팔리고 있는 ‘마시멜로 이야기’는 ‘미인’ 정 아나운서가 번역한 게 아니라 자신의 번역에 정 아나운서의 이름을 올린 이른바 ‘대리번역’이라는 것이었다.
작년 9월말쯤 첫 선을 보인 이 책은 불과 10개월 만에 1백만 부가 팔려나가면서 한경BP라는 출판사 측에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 출판사는 미국에서 발간된 이 책의 판권을 12만 달러라는 엄청난 거금을 주면서 계약을 해 출판계의 양식 있는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부터 주목을 받았던 이 책을 전문 번역인 김모씨에게 맡기면서 출판사측은 계약서에 “책 번역자로 제 3자를 내세울 수 있고 이를 비밀로 한다”는 내용을 넣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대리번역’을 암묵적으로 계약한 셈이라는 것이다.
김 씨가 ‘양심선언’을 하자 출판사에서는 대리번역이 아니라 ‘이중번역’이었다는 해명을 하면서 번역자 정지영 아나운서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며 그녀를 보호하는데 급급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번역자 김씨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많이 나가야 1만부 정도 팔릴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지영이라는 아나운서가 ‘번역’했고, 책이 나온 후 출판사 측에선 그녀를 동원해 대대적인 사인회와 광고, 강연회등을 전국적으로 열어 단번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결국 ‘밀리언셀러’의 영광을 거머쥘 수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영화흥행과 베스트셀러, 주식등락의 흥행성적은 오직 신만이 알 수 있는 3대 분야로 꼽히고 있는 만큼 ‘마시멜로 이야기’가 베스트셀러가 될 줄 몰랐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출판계에서도 비단 번역자 김 씨뿐 아니라 대부분의 인사들이 “정지영 아나운서의 지적이고 단정한 이미지를 이용한 스타 마케팅이 성공한 사례”로 평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출판사는 번역자의 약력란에 그녀의 ‘예뻐 보이는’ 얼굴사진과 함께 “21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지적인 방송인으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소개해 놓았다. ‘가장 지적인’이라는 수식어가 좀 우습다.
사실 번역서에 역자의 사진이 올라가는 경우는 내가 알기에도 극히 드문 일인 것 같다. 아무튼 출판사로선 ‘비싼 선인세’로 판권을 확보했으니만큼 ‘본전’생각에서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역자의 ‘미모와 경력’을 활용해야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원 번역자가 이렇게 ‘선언’하고 나선 마당에 대리번역이 아니라 ‘이중번역’이었다는 출판사의 해명과 함께 정 아나운서의 사과태도가 영 석연치 않다는 점에서 더 커진 것 같다.
출판사측은 정 아나운서가 이중번역이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극구 해명하고 있지만 공교롭게도 정 아나운서의 매니저라는 사람이 “출판사로부터 번역하는데 참고하라며 초벌 번역된 원고를 건네 받았다. 그리고 그 초벌번역된 원고를 참고해서 정아나운서가 다시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녀가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거짓이었다는 게 들통난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미 번역된 원고가 있었다는 걸 알았고 그걸 참고로 번역했다는 건 거의 ‘땅 짚고 헤엄치듯’ 작업했다는 얘기다. 그래놓고 몰랐었다는 변명은 그녀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얘기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미 번역이 다된 원고를 또 번역해? 그럼 뭘까, 중역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아무튼 쿨하지 못한 상황임에 분명하다.
아나운서 세계를 잘 모르지만 ‘매니저’까지 고용할 정도라면 31세라는 정 아나운서가 바쁘긴 엄청 바쁜 가보다. 어쨌거나 그녀는 자신이 그런 사실을 몰랐다고 했지만 매니저에 의해 이미 ‘번역된 원고’가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점에서 그녀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해명’을 해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맡고 있는 심야 음악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이렇게만 말했다.
“어제 오늘 많이 놀라고 많이 걱정하셨죠?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서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하루종일 저도 참 답답하고 많이 속상했어요. 그래도 감히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 오랫동안 함께 했던 달콤가족들(방송 프로명이 스위트 뮤직이어서 ‘달콤’이란 단어를 쓴 것 같다)을 실망시킬 일은 없을 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리번역이다 이중번역이다’ 라는 논란의 핵심은 살짝 비켜가면서 그냥 ‘예쁘고 우아하게’ 사건의 핵심을 잘 빠져나간 멘트를 한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 ‘사건’이 터지기 전 까지는 “남편의 도움으로 번역을 쉽게 할 수 있었다”라든지 “하룻밤에 100쪽이나 번역했었다”는 둥 자신이 직접 번역하는 동안 겪었던 ‘비하인드 스토리’를 자랑삼아 방송에 나와 자주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하룻밤에 어떻게 100쪽이나 번역을 하냐는 비아냥도 쏟아져 나왔었다.
번역자 김씨는 장당 3천5백원~4천원 사이의 번역료를 받고 이 번역원고를 넘겨주었고, 책은 대박이 터져 출판사에선 엄청난 이득을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비공식적이지만 정지영 아나운서도 ‘2억원’가량의 ‘보너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재주는 ‘번역자’가 부리고 이득은 ‘누가·누가’ 챙긴 셈이 됐고, 이에 열 받은 번역자가 ‘양심선언’을 한 것이 이번 ‘번역사기 사건’의 핵심인 것이다.
출판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고질적인 관행’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해왔다는 얘기다. 특히 무슨 유명 교수나 유명 인사가 번역한 책이라면 거의 1백% ‘'대리번역’이라는 것이어서 이번 사태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출판계에서는 gohst(유령)작가 혹은 립싱크라는 은어로 이들 대리번역자들을 부른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번 사건도 ‘유령작가’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커밍아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나 할까.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을 정지영 아나운서가 번역했다는 소리를 처음 딱 들었을 때 미안하지만 나 역시 그녀가 직접 번역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원저가 ‘쉬운 영어로 쓰여진 얇은 책’이라지만 번역이라는 건 그렇게 아무나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터였다.
게다가 ‘미인 아나운서’라는 번역자의 신분이 영 걸렸다. 아나운서라면 굉장히 바쁠 텐데 언제 그렇게 번역까지 하겠누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젊은층에 상당히 인기가 높다는 이 ‘미인’ 아나운서가 번역했다는 소릴 듣고 그 책을 샀다는 사람도 꽤 많은 것 같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길가는 젊은이들에게 멘트를 따낸 장면을 우연히 봤는데 대부분이 ‘정 아나운서가 번역했다기에 샀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사건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자존심 셀 것 같은’ 당사자인 정 아나운서는 출판사를 대상으로 명예훼손이라도 걸어야 할 것 같은 게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생각인데 정작 당사자는 ‘짧은 건성의 사과 멘트’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는 것 같다.
정아나운서의 매니저가 말한 대로 그녀는 어쩌면 사건의 ‘전모’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출판사측의 의도에 ‘협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건 그야말로 출판사와 그녀가 ‘짜고 친 고스톱’이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독자들을 ‘기만’한 행위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날이 갈수록 ‘텔레비전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가면서 언제부터인지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는 사람일수록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고 만 것 같다. 심지어 ‘권력 실세’들 조차도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진다 하니 텔레비전의 막강한 위력을 알 것도 같다.
거기에 ‘외모 지상주의’가 뿌리내리면서 ‘못생긴 건 용서받을 수 없다’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이쁜 것들은 뭘 해도 예쁘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들이 우리사회에 만연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성형왕국’이라는 오명도 그래서 나왔겠고, 오죽하면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내외까지 청와대에 ‘서울대학병원의 최고 성형외과의사’들을 불러 성형과 쌍꺼풀수술을 받았겠는가.
얘기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지만 이번 ‘번역사기 사건’은 이런 사회풍조와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같다.
사실 ‘번역’이란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오죽하면 ‘대한민국 3대 노가다 일’중에 번역이 꼽히겠는가! (나머지 두 가지는 빈민층에서 본업 겸 부업으로 한다는 구슬꿰기와 인형눈알붙이기라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원서 번역’을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그 고충을 잘 알 것이라고 본다. 그렇게 힘든 ‘번역자’에겐 대박이 터지거나 말거나 ‘매절’로 고작 5백만원 정도의 번역료만 돌아가는데 소위 ‘이름깨나 쓰는’ 유명인 특히 ‘얼굴’로 한몫 보는 스타들에겐 ‘플러스 알파’의 보너스까지 지급되는 출판계의 잘못된 ‘번역 관행’도 이참에 원천적으로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번역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인 것 같다.
이번 사태의 주된 책임자인 한경BP라는 출판사는 사건을 유야무야 흐릴 생각을 하지 말고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밝히고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사과’를 해야할 것이다.
‘정지영 번역’이라는 걸 보고 산 사람들에게 출판사측은 엄연히 ‘사기’를 한 것이니까, 그에 상응하는 조처를 취해야하지 않겠는가.
한국 출판계의 고질병인 이번 사태는 비단 정지영아나운서 한 사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일하는 사람으로서 정 아나운서는 ‘사건의 전말’을 소상히 밝히고 그 책을 사간 독자들에게 다시한번 ‘진정성’이 느껴지는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만 할 것이다.
아직 전도가 창창한 젊은 아나운서의 ‘바른 처신’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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