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입구에서 프리 허그 피켓을 들고 있는 소녀>
<아프리카 난민 돕기 시위를 벌이는 여학생들>
<지하로 안내하는 샘터 책방 간판>
<샘터 책방 내부>
명동의 재발견
엊그제 명동 거리를 걷다가 너무 반가운 간판 하나를 우연히 발견하고 거의
울 뻔했습니다. 숨이 잠시 멈출 것 같아서 잠시 길 복판에 서서 그 간판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서서히 간판이 안내하는 대로 지하계단을 내려갔습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어떻게 이제야, 하는 만시지탄까지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감정의 회오리는 참 복잡해서 가슴이 두근두근해졌습니다.
무슨 간판이었냐구요? ‘샘터 책방’ 이라는 작은 간판이었습니다.
몇 해 전, 명동 전체에 단 한군데였던 ‘문예서림’이라는 책방이 사라지면서 제겐 명동이 ‘불 꺼진 창’같은 그런 썰렁한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다 좋은데 어딘지 2% 부족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문예서림이라는 ‘작은 동네 책방’이 사라졌는데 도시 전체가 텅 비어진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거든요. 마음이 쓸쓸해지거나 외로워질 땐 그냥 책방으로 달려가 ‘원기’를 수혈 받곤 하는 저의 독특한 ‘생활습관’ 탓에 명동에 책방이 사라지면서 마음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 옆에 종로로 가면 영풍문고나 반디앤루니 같은 대형책방이 있고, 저의 ‘정신적 고향’인 광화문 교보문고도 이사 가지 않고 늘 그곳에 있는 만큼 까짓 ‘동네책방’하나 사라졌다 해서 그렇게 기죽을 건 없었는데도 워낙 ‘상처받기 잘하는 못난 A형’기질인 저로선 영 기운 빠질 일이었거든요.
그러니 돌연 눈앞에 들어온 ‘샘터 책방’의 작은 간판이 얼마나 반가웠을지는 여러분도 이해해 주실 거라고 봅니다.
전 일단 좁은 지하계단을 내려가 무거운 문을 어렵사리 열고 책방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문 앞에 카운터가 있었습니다. 가슴에 에이프런을 두른 점원으로 보이는 아가씨에게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이 책방 언제 문 열었어요” 라구요. 그랬더니 그 아가씨는 아주 이상한 사람을 봤다는 듯 뜨악한 표정을 잠시 짓더니만 “4월 달이면 만 2년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전 맥이 탁 풀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명동에 그렇게 자주 드나들었건만 이제야 발견한 책방 간판은 순전히 저의 불찰이었다는 반성이 들었던 겁니다.
여하튼 전 너무 반갑기도 하고 한 켠으로는 2년 가까이나 그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자신의 불찰에 화도 나고 해서 그 아가씨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 왜 이렇게 간판이 작아요. 눈에 보이지 않네요.”
그랬더니 그 아가씨는 “ 이 건물 주인이 크게 달지 말라고 해서요”라며 모기 소리 만하게 대답을 하더군요. 아마도 제가 좀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었나봅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이렇게 덧붙여 말하더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손님들 참 많아요. 간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구요. 이 빌딩 사장님한테 건의 좀 해주세요”
저는 점원 아가씨의 이 한 마디에 갑자기 ‘사명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큰 빌딩의 사장이 누군지 전혀 모르지만 빠른 시일 내에 사장을 찾아가 담판을 짓기로 그 자리에서 혼자 결심했지요.
책방 간판을 눈에 띄는 곳에 크게 달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기로요.
그래서 책방입구의 사진도 이렇게 찍은 겁니다. 바로 그 옆엔 신한은행 입간판이 엄청나게 큰 크기로 세워져 있어서 저의 결심을 굳히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신한은행 입간판은 없어도 워낙 은행이 목 좋은데 위치해 눈에 잘 띄거든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이런 데도 적용되나 봅니다. 아무튼 전 무슨 ‘투사’라도 되는 양 ‘샘터 책방 간판 바로 세우기 위원회 위원장’으로 즉석에서 혼자 취임하고 분주히 움직일 계획을 세웠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제게 있어서 ‘명동’은 하나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존재해왔습니다. 흔히들 ‘청춘의 거리’라고 알려져 있듯이 저도 명동에서 청춘을 보냈습니다.
이러면 좀 감이 이상한데요, 암튼 명동은 그냥 단순한 동네 이름이 아니라 늘 푸른 어떤 샘물 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기운이 없어질 때도 그곳에 가면 ‘수혈을 받은 듯’ 원기를 회복하고 위로를 받곤 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어떤 시인은 그랬다죠, 명동은 ‘고독한 산보자의 마지막 귀환지’라고요.
저와 명동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가 ‘국민학생’시절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명동의 좁디좁은 외서골목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일본 월간 잡지나 일본 서적을 자주 구입하셨는데 그때마다 저를 데려가시곤 했었지요.
지금은 그 골목이 없어졌습니다만 지금 롯데 영플라자 쪽에서 큰길 건너 마주보이는 쪽 바로 뒤가 일본책들을 판매하는 골목이었습니다. 아주 좁아서 두 사람이 걸으면 어깨가 닿을 정도였고, 늘 어두워서 항상 전구 불을 켜놓은 상태였죠.
그런데도 그 조붓한 책방 길을 걸을 때면 어린 게 뭘 안다고 그렇게 뿌듯하고 심지어는 우쭐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책을 다 사시면 아버지는 저를 데리고 책방골목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 중국음식점에 데려가셨지요.
그 때 먹었던 물만두나 야끼만두, 탕수육, 짜장면 맛이 지금은 아무리 고급 호텔 중국집엘 가도 그 맛이 안 나서 저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아무튼 비교적 어린 시절에 ‘명동에 데뷔’한 저는 그 후로 여학생이 되어선 혼자서 혹은 친구들과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조금 ‘불량기’가 있는 같은 학교 학생들 중에는 명동에 가발을 쓰고 춤추러 다녔다는 얘기를 훗날 전해 들었습니다. 저야 그때도 소심한 학생이어서 어른들 몰래 드나들긴 했지만 춤추러 다닐 정도의 배짱은 없었지요.^^
대학생이 되면서는 제법 멋을 내고 명동거리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었지요.
그 때는 ‘송옥 양장점’이나 이원재 양장점 같은 데서 옷을 맞춰 입을 정도면 소위 ‘상위 클래스’로 쳐주기도 했습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지만 웬일인지 크리스마스에는 통금이 해제돼 수많은 ‘청춘’들이 명동을 메웠다는 기사가 어김없이 다음날 신문에 등장하곤 했었죠.
서울의 멋쟁이들은 다 명동으로 모인다는 ‘전설’마저 있었습니다. ‘강남’이 생기기 전이니까요.
아무튼 ‘명동’에 갈 때는 으레 복장부터 신경 쓸 정도로 명동은 그런 곳이었습니다. 인생이 뭔지 지금도 모르지만 그 시절에야 그야말로 ‘밤인지 낮인지 모르는’ 시절이라 명동에 모이는 ‘청춘’들은 생맥주집에 모여 담소하는 걸로 인생을 보내기도 했었지요.
몇 해 전인가 EBS에서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를 했었지요. 50년대·60년대 청춘들이 보낸 명동을 그린 드라마였는데 EBS자체 제작 프로그램 중에 시청률이 1위였다는 보도가 기억나네요. 저도 그 드라마를 꽤 재미있게 봤거든요. 암튼 시대는 바뀌어도 명동은 ‘청춘들’에겐 ‘지존의 거리’라는 위상을 변함없이 지켜나가고 있다는군요. 아무리 화려한 강남이 있다지만.
그런 ‘명동’이어선지 저는 명동거리를 거닐면 요즘도 자신이 무슨 ‘청춘’이라고 왠지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해지곤 합니다. 그런데다가 뜻하지 않게 횡재라도 한 듯 ‘샘터 책방’이라는 그야말로 ‘영혼의 샘터’까지 발견했으니 간판크기가 작아 ‘불이익’을 받고 있는 그 책방을 도와주어야 하는 건 거의 저의 ‘의무사항’이 된 겁니다.
그날 저는 ‘샘터 책방’에서 한참 머물면서 ‘취재’를 했습니다. ‘간판바로세우기 위원장’으로선 마땅히 그래야겠지요. ^^
점원 아가씨 얘기론 하루 판매부수가 평균해서 고작 250부 정도랍니다.
오전 11시에 열어서 밤 10시 반에 문 닫을 때까지 그 정도만 팔아서야 곧 ‘문 닫는다’는 소리가 나올 것 같군요.
한 100 여 평 남짓한 책방은 대형서점들과는 달리 조금은 소박한 분위기였는데요, 명동이라는 동네 특성상 주로 젊은 사람들이 찾는 것 같았습니다.
책방 한 쪽에는 팬시 문구류를 팔고, 한 쪽에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었는데 책방보다는 오히려 그 쪽이 문전성시 분위기였습니다.
샘터에서 나와서 어슬렁거리면서 명동을 산보했습니다. 제가 무슨 고독한 산보자는 아니었지만 벌써 봄의 기운이 여겨지는 명동거리에는 저 50년대 60년대와 마찬가지로 ‘청춘’들이 넘쳐났습니다. 세대만 바뀌었을 뿐 거리의 본질적인 행태는 그대로인 셈이죠.^^
유네스코 앞 쪽에 오니까 모범생 스타일의 남녀 학생들이 무슨 피켓을 들고 커다랗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뭔가 하고 자세히 보니까 그 학생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아프리카 수단에서 탄압받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주기 위해 UN평화유지군을 파견하라는 제법 ‘거창한 주제’의 데모를 하고 있더군요.
아주 앳된 여중생과 그 옆에 여대생쯤으로 보이는 학생이 있어서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 죄 없이 핍박받고 있는 아프리카 수단의 다르푸르(Darfur) 시민들이 너무 가엽다는 거였습니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하루빨리 파견되어 이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주어야 하니까 서명을 부탁한다고 말하더군요.
고문 받고 있는 다르푸르 시민들의 사진이 새겨진 피켓을 들고 있는 숙명여대 정외과 학생이라는 양윤영 양은 그야말로 ‘사명감’에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서명을 부탁하며 저에게도 호소하더군요.
그 옆에 함께 피켓을 들고 서있는 자그마한 여중생 이정화양을 향해 제가 “아이구 요런 어린 학생이 뭘 알고 이러겠나”라고 짐짓 걱정하는 투로 말했더니 “어머 얘네들이 더 잘 안답니다. 누가 시켜서 이러는 게 아니라 얘네들은 고통 받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너무 가여워 자발적으로 나온 거랍니다”라고 대학생 언니는 당당하게 말하더군요.
우리 때 같으면 꿈도 못 꾸었을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권을 위한 거리시위’를 하는 우리 어린 학생들을 보니까 마음이 뿌듯해졌습니다.
물론 명동은 예전에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대학생들이나 민주투사들 이런 ‘특별한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긴 했지만 머나먼 아프리카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겨울거리에 피켓을 들고 서있는 ‘평범하게’ 보이는 그 학생들을 보니 우리나라가 많이 발전했다는 걸 또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들을 잠시 격려해주고 다시 어슬렁거리며 산보를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아주 맑은 표정의 앳된 여학생이 요즘 대유행하는 ‘프리 허그, 무료로 꼬옥 안아드려요’라고 삐뚤빼뚤한 글씨를 쓴 피켓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총명하고 착해 보이는 그 여학생이 안쓰럽게 느껴져 왜 이런 걸 하느냐고 물었더니 “외로운 사람들을 위로해 드리고 싶어서요”라고 또박또박 말하더군요. 이제 중학교를 막 졸업했다는 그 여학생은 방학 동안에는 계속 나와서 프리 허그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린 여학생이 하도 대견스러워 얼른 안아주었습니다. 제가 프리 허그를 해준 건가요?^^
명동 입구 쪽에서도 프리 허그를 하는 여성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빨간 코트를 입고 쇼 커트 머리에 하이힐을 신고 있는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보니까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인상의 아가씨더군요.
멀리서 볼 땐 차림새로는 꼭 ‘업소 아가씨’분위기였거든요.^^ 더구나 웬 중년남자들과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어서 혹시 나이트클럽에서 손님끌기를 위해 파견한 여성인가라는 생각도 잠시 했었거든요.^^
경영학을 전공한다는 대학 3학년의 그녀는 ‘프리 허그’를 하면서 자신의 영혼이 맑아지는 걸 경험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루 3시간 정도 한다기에 공부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혀 안 아까워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더군요. 그녀의 그 웃음이 하도 맑고 깨끗해 보여 제 영혼마저 맑아지는 듯 했습니다.
오늘 저는 명동을 어슬렁거리면서 명동의 새로운 모습들을 ‘재발견’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샘터 책방’의 존재를 비로소 알게 된 것 하나만으로도 ‘명동의 재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거기에 고통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의 인권을 위해 시위와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는 여중생· 여대생들,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해주기 위해 귀한 시간을 쓰면서 서있는 여고생과 여대생들을 보면서 ‘명동의 재발견’을 또 한번 한 셈입니다.
제 ‘청춘의 고향’인 명동은 여전히 활기 넘치는 새로운 청춘들의 순례지이자 고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한층 ‘업그레이드’한 모습으로 성장해 저에게 ‘명동의 재발견’이라는 덤까지 선사하는 즐겁고 ‘밝은 동네’로서의 그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는 듯했습니다.
브라보 마이 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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