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하춘화를 오늘 만나다
요새 서울 지하철 역 플랫폼 곳곳에는 ‘河春花’라는 큰 활자로 쓴 한자와 함께 가수 하춘화의 측면 얼굴 사진을 ‘클로스 업’ 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언제 적 하춘화였던가 싶어 아련해지는 마음이 들 정도인데 정작 그녀의 노래로 떠오르는 게 없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 정도다.
하춘화와 동시대를 함께 살아왔지만 그녀의 노래는 개인적으로는 취향에 맞지 않아 ‘가수’로서는 별 매력을 못 느꼈다. 언젠가부터 ‘선행’을 많이 하고 있는 ‘착한 가수’라는 보도를 접하고 막연히 그녀에게 호감을 느껴왔다. 그러고 보니 가끔 가요무대나 전국노래자랑 같은 프로그램에서 항상 웃는 얼굴 모습으로 노래하는
그녀의 이미지는 ‘퍽 따스한 여성’으로 다가왔다.
아무 때나 말을 걸어도 다정하고 친밀한 ‘친구’가 되어줄 것 같은 ‘감수성 풍부한’ 여가수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며칠 전 그녀에 대한 나의 이런 오랜 ‘환상’이 단번에 산산이 깨져버린 ‘사건’이 있었다. 1주일 전쯤 서울 하얏트 호텔 로비에서 내 옆을 언뜻 스쳐지나가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평소 사람의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유명 연예인들이 나에게 직접 길을 물어봤을 때도 그들이 ‘그 유명한 가수, 탤런트’라는 건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고 길을 가르쳐 준 후, 그들이 사라졌을 때 ‘아무개 연예인’이었다고 귀띔해주는 가족들 덕에 연예인과 악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다며 아쉬워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1주일전 그날은 마침 호텔 로비에 ‘하춘화와 함께’라는 안내광고가 있었고, 그 걸 본 순간 속으로 ‘오호 하춘화가 왔군’이라고 생각하는 찰나에 신기하게도 그녀가 바로 내 옆을 스쳐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그냥 지나가나보다 하고 말텐데 바로 그 전날 일간신문에 실린 ‘노래인생 45년 하춘화 인터뷰’라는 기사를 보고 ‘45년? 대단한데, 하춘화 한번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볼만하군’이라고 생각했던 터여서, 바로 그녀를 좇아갔다.
‘하춘화씨!’라고 불렀어야 하는데 순간적으로 그녀의 이름이 까맣게 기억나지 않았다.
오! 맙소사. 이건 순전 나이 탓인 것 같다. 실례를 무릅쓰고 나는 그녀의 옷소매를 살짝 붙잡으며 ‘잠깐만요’라고 다급하게 외쳤다. 그때 그녀 뒤를 에워싸고 걷던 여성 두 명이 단호한 음성으로 ‘이러시면 안됩니다’라며 나를 제지했다.
그 순간 하춘화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일별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지금 바쁩니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그녀의 귀찮아하는 굳은 옆얼굴 모습은 내게 꽤 실망감을 주었다. 그녀의 ‘광팬’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그녀의 노래보다는 '선행’에 관심을 갖고 그녀를 내 나름대로의 ‘좋은 이미지’로 갖고 있었던 차에 그렇게 냉랭한 응대를 받고 보니 ‘아차’싶었다.
물불 안 가리는 열혈 십대 소녀 팬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녀였다면 그 순간 ‘ 미소라도 날렸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니까 심술꾸러기 같은 마음이 생겼다. 꼭 인터뷰를 해봐야지라고. 신문 인터뷰에는 그녀가 내년 1월에 열리는 ‘노래인생 45년 콘서트’ 준비로 눈 코 뜰 새 없다는 소식이 실려 있었다.
아무리 바쁜 사람이라도 시간을 내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 나의 오랜 ‘생업’아닌가. 아무튼 그 다음날 나는 그녀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요청을 했다. 매니저는 ‘선생님’이 너무 바쁘셔서 도저히 시간내시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나에 대한 ‘설명’을 그녀에게 해주고 시간을 한번 만들어보라고 말했다. 사흘 후 매니저는 ‘인터뷰 일정’을 통보해 왔고, 바로 오늘(7일) 그녀, 하춘화를 만나러 KBS로 간 것이다. 오후 2시30분에 인터뷰 약속이 잡히면 오전부터 인터뷰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게 마련이다.
쌩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4시에 만나기로 약속하면 3시부터 마음이 설렌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내 경우에는 몇 시간 전부터 ‘긴장모드’로 들어가 약속 장소에는 아예 1시간 전부터 미리 가서 기다리곤 한다. 사람이 모자란 탓일 게다. KBS로 들어가는 절차는 꽤 까다로웠다. 사전에 무슨 ‘홍보실’인가에 미리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입장이 불가’란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하기야 대 방송사인데 경비를 그 정도는 철저 히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홍보실’직원에게 사정을 말하고 다음부터는 ‘규칙’을 꼭 지키겠노라고 다짐을 한 뒤 일행과 함께 하춘화가 기다린다는 ‘5층’으로 향했다.
매니저에게 ‘하춘화씨 식사는 했어요’라고 물었더니 아침식사도 못했다고 한다. 시간이 몇 신데, 두 끼나 굶은 상태라니! ‘인터뷰 상대’가 ‘공복’상태라면 인터뷰는 김이 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랜 ‘경험법칙’이다. “그럼 뭐 간단한 요기 거리라도 사가면 어떨까요”했더니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게 매니저의 응답이다.
아무리 바빠도 끼니를 거른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는 평범한 소시민인 나로서는 ‘하춘화의 공복’이 영 신경에 걸렸다. 스튜디오 밖 대기실에 앉아있는 하춘화의 얼굴을 보니 내 걱정대로 ‘공복으로 인한 편치 않은 얼굴’이었다. 사적인 무슨 고민이 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한 얼굴을 보니 나까지 긴장이 됐다.
무슨 가벼운 농담거리로 말문을 열어야 하는데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함께 간 젊은 기자가 10여개도 넘는 질문을 마련해놨는데 ‘순서대로 ’물어보긴 애저녁에 그른 것 같았다. ‘식사’를 못하셔서 어떡하죠 라고 운을 떼자 ‘식사할 시간마저 없어요’라고 말하는데 역시 두 끼 굶은 사람답게 얼굴엔 웃음기가 전혀 없다.
하춘화는 6세에 가수로 데뷔해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그녀의 ‘기록’을 깬 가수가 없다고 한다. 세계적으로는 마이클 잭슨이 ‘4세’때 데뷔해 하춘화의 기록을 깼다는 기사를 인터넷 한 귀퉁이에서 본 적이 있다. 지금까지 8천여회의 공연기록을 갖고 있어 ‘국내최다 기록보유자’로 기네스북에까지 올라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무대에 설 때 요즘도 떨리냐고 묻자 그녀는 다소 생기를 되찾은 듯 “떨리는 건 대중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겁니다.”고 답했다. 그러니까 ‘떨리는 건’ 가수에겐 일종의 ‘의무이자 매너’라는 뜻으로 들렸다.
현재 하춘화는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만학도이다.
(금년에 그녀는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50대의 나이에 기억력의 한계를 느끼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녀는 뜻밖에도 자신은 아직도 ‘기억력’이 좋아 ‘전화번호’도 핸드폰에 입력해놓지 않고 외고 있다고 말한다. 놀라운 기억력이다. 명민하기로 소문났던 우리 친구들은 한결같이 내게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던데....
물론 나 자신도 한때는 ‘기억력’에 관한 한 둘째가라면 서운할 정도였지만 이젠 돌아서면 잊어버리건만.
하여튼 그녀, 하춘화는 ‘6세에 데뷔’해 45년 가수인생을 살아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여선지 ‘기억력’마저 그녀에게는 다소곳한 것 같다. 그녀의 이력서를 보니 ‘가수활동’탓이었는지 학력이 순탄치 않았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처럼 ‘바로 바로’ 진학을 하지 않고 중학에서 고교, 고교에서 대학으로 올라갈 때 ‘인터벌’이 있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한 ‘여상’을 마치고 한 지방 대학의 가정과를 잠시 다닌 뒤 방송대학을 거쳐 지금 저렇게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나와 있다. 대단한 향학열인 것 같다.
나이 오십 넘은 여가수가 박사공부를 하는 건 처음 있는 일 아니냐고 물었더니 전 연예인 중에 처음일 것이라고 답하는 품새가 자부심에 넘쳤다. 왜 그렇게 어려운 박사공부를 하냐고 물었더니, 체계적인 후배양성을 하고 싶은 뜻에서 시작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공부는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모범답안’같은 말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부친이 ‘가수를 안 시키셨으면, 법관을 만드시려고 했다’고 말했다. 요즘 골프로 세계를 주름잡는 ‘대한의 딸들’뒤에는 아빠들의 ‘바지바람’이 일조를 했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하춘화의 아버지도 ‘원조 바지바람아빠’였나 보다.
‘두 끼를 굶은’ 하춘화는 동행한 젊은 기자가 질문들을 던지면 ‘그건 제 홈페이지를 참고해주세요’라고 딱딱하게 말했다. 예를 들어 어떻게 6세에 데뷔하게 되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런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홈페이지에는 그 ‘해답’이 안 나온다고 젊은기자는 말했다.
시계를 계속해서 몇 번이고 들여다보던 그녀는 자세한 건 이메일로 하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해왔다. 그녀는 지난 1년을 ‘박사공부’ 때문에 고3 수험생처럼 쫓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피곤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가수나 존경하는 가수가 있냐’는 아주 상투적인 질문을 하자 그녀는 ‘별로 친한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나훈아씨가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 같아 존경스럽다’고 덧붙였다. 거의 파장분위기에서 ‘가수 된 걸 후회하지 않느냐, 다시 태어나도 가수가 되겠느냐’고 묻자 ‘후회하지 않고, 가수가 또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금 결연한 표정이었다.
인터뷰 도중 트롯분야 말고 어떤 분야의 노래를 좋아하느냐고 묻는 말에 그녀는 ‘모든 분야를 다 잘 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답변을 했다. ‘노래’하면 자신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45년이라는 ‘긴세월’을 ‘살아남아’ 무대를 지켜왔겠지. 유감스럽게도 서두에도 밝혔듯이 그녀의 노래 중에 내가 ‘흥얼거릴 수 있는’ 노래는 거의 한 곡도 없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다.
물론 사람들의 취향은 다 다른 것이기에 그녀의 ‘광팬들’은 따로 있을 것이다.
‘45년의 생명력’은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춘화에게는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나이는 엇비슷한 김수희나 심수봉같은 여가수들의 노래 중에는 제법 ‘필’이 꽂히는 곡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노래 중에는 ‘어필’하는 노래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춘화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개인적으로 동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서 느껴왔던, 그녀의 노래에 ‘매력’을 전혀 못 느꼈던 ‘비밀’을 오늘 그녀와의 짧은 인터뷰 시간동안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6세라는 ‘엄청나게 어린’나이에 가수로 데뷔해 45년이라는 노래인생을 나름대로 영위해왔지만, ‘어른의 세계’에 너무 일찍 진입한 거의 모든 ‘아역출신’ 연예인들처럼 ‘자기를 지키는 교육’을 주변의 어른들로부터 강압적이고 지속적으로 받아왔던 것 같다.
게다가 그녀는 나름대로 엄청난 ‘자부심의 성’속에 갇혀 지내온 듯 했다. 무슨 말이고 활발하게 하지 못하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살아온 듯했다. 어쨌거나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을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동안 그녀의 노래에 ‘매력’을 못 느꼈던 것은 그녀 자신에게서 어떤 인간적 매력을 발견해내지 못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 만난 그녀에게서 나는 ‘로봇’이나 ‘드라이 플라워’ ‘방탄조끼’같은 그런 생명력 없는 이미지를 받았다. 그렇다고 그녀를 폄훼할 생각은 별로 없다는 것을 아울러 밝혀둔다.
단지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추운 겨울날씨에도 만나러 간 사람들에게 냉랭한 바람을 보냈다는 것은
하춘화 자신의 '실수'였다고 본다.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해 오는 동안 상대방에게서 ‘매력’을 느끼거나 아니면 ‘답답함’을 느끼는 건 짧은 시간 속에서도 가능한 것 같기에 ‘하춘화’라는 국내 가요계의 특이한 존재를 일별한 뒤 느낀 점을 두서없이 한 번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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