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 데이먼의 ‘본 얼티메이텀’을 보고
1년에 한 두 차례는 스파이 영화를 봅니다. 자신의 삶이 나사가 풀린 듯한 느낌이 들거나 스트레스가 심해 일상을 벗어던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이 스파이 영화를 보고나면 기운을 찾곤 합니다.
폭력이 난무하는 액션 영화는 제 취향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스파이 영화만큼은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장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파이라면 이미지가 그리 좋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린 시절 저에게 스파이는 조국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이라는 ‘애국자 이미지’로 다가온 적도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어릴 때 보았던 ‘스파이 영화’ 영향 탓일 겁니다. 하도 오래 돼 가물가물하지만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스파이는 멋있다는 환상마저 품었거든요. 그래서 한때는 스파이가 되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마저 한 적이 있습니다.
일상이 느슨해졌다고 느껴질 때, 바싹 긴장하게 만드는 스파이액션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면 저도 모르게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선지 갑자기 기운이 솟구치면서 뭐든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기도 합니다.
물론 스파이 영화하면 ‘007 제임스 본드’라는 브랜드가 그 대표성을 인정받고 있고, 오락성에 있어서는 아직까지는 ‘007’을 넘어서는 영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이제는 ‘스파이계의 전설’로 자리 잡은 듯한 숀 코너리는 70이 넘은 요즘도 매력적인 존재입니다.
요 근래에는 우리나라 신사복 CF에 등장했던 피어스 브로스넌도 숀 코너리만은 못하지만 나름의 ‘007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핸섬 보이죠.
이렇게 핸섬한 스파이들이 종횡무진하던 ‘20세기 스파이 영화’와 달리 21세기엔 ‘서민적 이미지’로 어필하는 스파이 영화가 대세로 등장할 기미입니다.
어제 봤던 ‘본 얼티메이텀’이 바로 그런 장르의 스파이 영화였습니다.
‘본 얼티메이텀’은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에 이은 3부작 시리즈의 완결편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 정보는 전혀 모른 채 그냥 시간대가 딱 맞은데다가 제 자신을 ‘긴장’ 좀 시켜야겠다는 생각에서 무작정 들어가서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돈’이 아깝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액션 첩보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면 레벨이 낮은 사람으로 보기도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동안 황당한 오락성 위주의 첩보물이 주종을 이뤄왔지만 나름대로 ‘미덕’들이 있었다고 봅니다.
작품성을 내세우면서 관객에게 지루함을 선사하는 이른바 ‘예술 영화’보다는 차라리 이국적 도시들의 풍성한 볼거리와 비현실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스토리들은 저 같은 일반 영화애호가들에겐 큰 즐거움을 선사하거든요. 그러니까 까다로운 영화평론가들이야 작품성에 매달리는 동안 일반 관객들은 일단 ‘재미’있어야 돈 내고 들어가서 본다는 거죠.
영화평론가들이야 아마도 ‘제 돈’내고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걸요. 대부분이 ‘우아한 시사회’에 가서 폼 재면서 영화를 보고, 끝나면 감독이나 주연 여배우들과 멋있게 악수를 나누는 모습이 ‘대세’죠.
언젠가 미국의 아주 유명한 영화평론가는 자신은 그런 ‘귀족적인 시사회’에 가면 영화 자체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언제나 ‘돈’내고 일반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공감 가는 이야기죠.
‘본 얼티메이텀’은 미국 정부의 ‘1급 암살요원’으로 맹활약하던 주인공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헤매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1,2편에 이어진 연작 시리즈이지만 전편들을 보지 않아도 바로 몰입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흡입력을 갖춰, 주인공 제이슨 본과 함께 런던으로 마드리드로 모로코로 이리저리 정신없이 날아다니다보면 두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일반적으로 007영화를 볼 땐 저건 영화다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지만 본 얼티메이텀은 마치 ‘사건의 현장’에 특파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현실감있게 만들었다는 얘기겠죠.
하버드대학 영문학과 출신이라는 맷 데이먼은 이 ‘본 얼티메이텀’으로 ‘가장 미국적 스파이’, 21세기 스파이 영화의 새로운 ‘지존’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70년생인 맷 데이먼은 이 영화를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만든다는 소릴 듣고 두 말 않고 바로 출연하기로 했다는 군요.
폴 그린그래스는 평소 정치성향 강한 영화들을 만들어 좋은 평을 들었던 재능 있는 감독입니다. 작년에는 <9.11 테러>를 소재로 만든 영화로 아카데미상 후보에도 올랐었죠.
캠브리지 대학 출신으로, 55년생인 그는 감독으로선 거의 ‘전성기’에 본 얼티메이텀을 만든 셈입니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만든 감독의 ‘폭넓은 시야’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영화 스토리는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이 영화는 기존의 스파이 영화와는 달리 대사를 퍽 신경써서 만든 것 같습니다. 평범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대사 하나하나가 공들여 만든 영화라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주인공 제이슨 본이 자신을 죽이려는 킬러를 향해 “넌 나를 죽이는 이유를 알고 있니?”라는 대목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조직에 의해 킬러로 키워져 아무 죄의식조차 없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사육된 킬러'의 비애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영화는 또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범죄에 희생양이 되고 마는 힘없는 개인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실화처럼 생생하게 여겨지는 갖가지 음모적 사건 앞에 한 개인은 아무 죄없이 스러져가고 마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 거죠.
주인공 제이슨은 영화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똑같은 허름한 잠바에 티셔츠, 진 바지 차림으로 나옵니다. 나비넥타이에 화려한 정장을 즐겨 입는 멋쟁이 007제임스 본드와는 패션 감각에서만큼은 적수가 안 됩니다.
좋게 말해서 털털하고 서민적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21세기 ‘신세대 스파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생활형 스파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 보니 본 얼티메이텀에 등장하는 미국 CIA본부 요원들은 모두들 ‘배우’같지 않고 실제 ‘요원’같았습니다.
심지어 여배우들도 하나같이 CIA현직 요원들을 영화에 특채한 듯 ‘미녀 여배우’들과는 거리가 있어보였습니다. 말하자면 캐스팅에 성공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선지 미국 영화 사이트 무비폰닷컴에는 최근 아주 재미있는 글이 실렸더군요.
영국스파이 007 제임스 본드와 미국스파이 제이슨 본 누가 ‘슈퍼 스파이’인가를 비교한 겁니다.
제임스 본드는 최첨단 무기를 쓰고 화려한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지만 제이슨 본은 펜이나 책 같은 생활 속 물건들로 자신을 향해 달겨드는 킬러들에 대응하고 남의 차를 빌려 탄다. (제이슨은 지하철도 애용하더군요.)
본드는 ‘부티’ 나지만, 본은 ‘빈’티 난다.(위에서도 말했지만 영화 내내 본은 갈아입지도 않고 계속 잠바 패션으로 시종일관합니다.)
본드는 바람둥이지만 본은 한 여자만 사랑한다.
이밖에도 제임스 본드와 제이슨 본은 다른 점이 많지만 제가 볼 때 본드는 ‘겉멋’이 잔뜩 든 20세기 구세대 스파이라면 제이슨 본은 자신의 정체성에 끝없이 회의하며 자신이 업무 중 살해하게 된 희생자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철학이 있는 신세대 스파이’라는 점이 크게 다른 점일 겁니다.
‘고민하는 제임스 본드’는 상상도 못하는 캐릭터였던데 비해 ‘본 얼티메이텀’의 제이슨 본은 ‘사색하는 스파이’라는 새로운 면모로 까다로운 21세기 관객들에게 다가섰고, 그 ‘전략’은 주효했습니다.
이 영화가 지난 8월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역대 전미 8월 오프닝 1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전작 두 편으로도 이미 5억 달러를 벌여 들였던 이 ‘본’시리즈는 완결편 ‘본 얼티메이텀’으로 미국영화로는 금년 최고 흥행수입을 기록할 전망이라고 합니다. 일반 영화팬들의 지갑은 그리 쉽게 열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본 얼티메이텀은 재미가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겠죠.
암튼 올 추석 극장가에는 30대 중반의 한창 힘 있어 보이는 이 미국남자가
돈 좀 벌어갈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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