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읽고

스카이뷰2 2008. 1. 9. 15:30
 

온다 리쿠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읽고


온다 리쿠(恩田 陸)! 희한한 이름의 이 일본 여성 작가를 새해 들어 알게 된 것은 행운의 조짐인 듯합니다.

엊그제 책방에 들렀다가 그녀가 쓴 ‘밤의 피크닉’을 집어든 저는 서점 안 독서용 의자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짧고 힘 있는 문체로 펼쳐나가는 문장력에 이끌려 시간가는 줄 모를 정도였습니다.

사실 이 책은 재작년인가부터 서점에 진열되어 있었던 걸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냥 지나쳤었지요.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고, 요샌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워낙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신예들의 작품을 일일이 읽을 틈이 없었던 겁니다.


온다 리쿠! 약력을 보니 1964년생, 와세다대 교육학부 출신으로 직장생활을 하면서 소설을 집필, ‘여섯 번째 사요코’라는 작품을 들고 1991년 일본 문단에 데뷔했더군요. 신예작가는 아니고 일본문단에서도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중견여성작가라고 합니다.


‘밤의 피크닉’은 2004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그 해 일본 <책의 잡지>가 선정하는 베스트 10에 선정되었고, 2005년에는 제 26회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상 신인상 및 ‘서점 점원들이 가장 팔고 싶은 책’으로 선정돼 제 2회 ‘서점대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소개된 그녀의 작품이라는군요. 이 ‘서점대상’의 첫해 수상작이 제가 우리 블로그에 재작년에 소개했던 ‘박사가 사랑한 수식’입니다. 그러고 보니 서점 직원들의 ‘안목’또한  대단합니다.


하루 종일 책을 팔다보면 그 정도의 안목은 생길 수도 있겠지만 그걸 ‘상’으로 연결해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고, 거기에 책의 ‘매상’도 올리는 일본인들의 상술 또한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는 ‘밤의 피크닉’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행복하다, 왜 진작 안 읽었을까’라는 아쉬운 감정마저 동시에 느꼈습니다. 왜 우리가 우스갯소리로 노처녀· 노총각들이 맘에 드는 상대를 만났을 때 ‘어디 있다 이제 왔냐, 왜 진작 만나지 못했나’라면서 아쉬워한다는 얘기들을 하는데 마치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설을 이제야 읽다니...   


그러면서 왠지 든든한 기분마저 들더군요. 저는 맘에 드는 작가나 영화감독들의 작품과 만나면 그렇게 문화적 충족감과 정서적 안도감을 동시에 느낍니다. 아울러 그들이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언젠가는 나도 그런 좋은 작품을 쓸 것이라는 기대 섞인 희망 같은 것이 자신감으로 연결되면서 든든한 감정이 드는 것이겠지요. 그만큼 ‘밤의 피크닉’은 저를 감동시켰다고나 할까요.


더구나 신년 초, 그런 좋은 작품을 만나서 작품의 끝이 다가오는 걸 아쉬워하면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소설을 만났다는 건 보통 행운이 아니거든요.  

‘밤의 피크닉’은 아주 단순한 소설입니다. 362페이지나 되는 장편소설이지만 얼개는 아주 심플합니다.


순수하고 청결한 감수성이 명주실보다 더 섬세한 남녀고교생들의 하룻밤 단체 보행기록!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골격으로 독자로 하여금 가슴 설레는 기쁨을 맛보게 해줬다는 건 온다 리쿠의 솜씨가 이미 숙수(熟手)의 경지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촘촘히 이어지는 센스 있고 영리한 문장과 주인공들의 내면세계를 투명하게 조명해 독자로 하여금 깊은 공감대를 느끼게 하는 작가의 재능이 한없이 부러웠습니다.

씨줄 날줄 종횡무진 아로새겨나가는 고교생들의 생각과 그들의 깨끗하면서도 복잡한 마음 상태, 어떡해서든 서로를 감싸주고 어른들이 놀랄 만큼 넓은 포용력으로 친구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서로를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뭉클해지면서 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밤의 피크닉’! 일본의 북(北) 고등학교 전 학년 학생들이 연중행사로 참가하는 24시간 80km의 종주기록기!

아침 8시에 교정을 출발, 이튿날 8시에 다시 모교 교정으로 돌아오는 80km구간동안 고교생들은 서로의 우정을 다지고 아픔을 치유해 나갑니다.


그들은 외칩니다. “모두 줄지어 함께 걷는다. 단지 그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특별한 느낌인 걸까.”

밤을 새워 80km를 걷는 고교생활의 마지막 대 이벤트 ‘야간 보행제’동안 고교 3년생인 주인공 이복남매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었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감싸주면서 어른들의 상처까지도 어루만져줄 수 있는 의젓한 포용력마저 보여줍니다.


‘밤의 피크닉’은 만 하루 동안 일어나는 고교 3년생들의 이야기라는 단순한 플롯이지만 그 속에 적잖은 ‘사연’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실수’로 같은 해에 태어나, 서로를 인정해주기 어려운 ‘이복 남매’지간의 섬세한 감정 갈등을 칙칙하지 않으면서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자가정에서 자라고 있는 니시와키 도오루와 고다 다카코를 주축으로 소설은 아주 밀도 깊은 심리묘사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모범생인 니시와키 도오루는 ‘성실하고 빈틈없는 은행원’인 아버지가 어머니 몰래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에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경멸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며, 자신의 속에 아버지와 닮은 부분이 있는 탓이란 걸 자각하고 있기 때문에’ 소년은 더 괴로워합니다.


‘아버지의 온화하고 꼼꼼하며 뭐든 반듯한 면을 존경하고 있었던’소년에게 나타난 같은 또래의 소녀와 그 엄마의 존재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소년은 아버지가 위암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한 것에 대해 ‘죄책감’에서 도망간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양쪽에 비슷한 처지의 처자를 남겨두고 자신만 스스로 달아나 버린 아버지를 소년은 원망합니다.


아버지의 장례식날 나타난 ‘모녀는 멋있었다’는 점에서 소년은 더 화가 납니다.

“검은 수트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머니쪽은 품격이 있고 당당했으며 교복 차림의 딸은 아주 침착하며 총명함이 얼굴에 배어 있었다. 거기에 비해 기력을 잃은 유족인 자기네 모자는 어딘지 쓸쓸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좀더 망가진 느낌의 여자였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연약하여 이쪽 가정을 원망하거나 저주하는 바보 같은 여자였다면 용서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요는 경멸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동정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소년 니시와키 도오루가 이렇게 마음속으로 갈등하는 동안 소녀 고다 다카코 역시 내심으로 숱한 갈등을 겪습니다. 소녀는 친구들이 행여 자신에게 이복남매가 있고 그게 바로 같은 반에 있는 도오루라는 걸 알게 될 까봐 전전긍긍합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른들의 실수로 이복남매지간이 된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지만 친구들에게 서로가 ‘비슷한 부류’라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급기야는 ‘어린 청춘들’사이에 이 두 사람은 사귄다는 소문마저 돕니다.


그런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그려나가는 온다 리쿠의 ‘정밀화 묘사’ 솜씨는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80km 를 밤새워 보행하는 전교생 1200명 가운데 이제 고교 마지막행사를 치르고 있는 3학년 7반의 이 소년소녀를 비롯 그들 친구들의 우정과 연애감정이 ‘극기훈련’이 주는 혹독함 속에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말이 80km지 이거 보통 거리가 아니거든요. 예전 식으로 따지면 2백리!

밤을 새워 2백리를 걸어가면서 어떡하든 낙오되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년들의 모습이 아주 대견하고 흐뭇합니다. 그 사이사이 ‘밤 도깨비’같이 밤에만 기운이 펄펄 살아나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는 ‘꼬마 록 가수’의 존재도 웃음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자신의 이복 남매에게 ‘말 걸기’를 최대 이벤트로 생각한 소녀는 자신이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출생의 비밀’을 자기 엄마가 딸을 보호하고 싶은 심정에서 소녀의 친구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는 대목에 경악합니다.

딸 친구들에게 딸을 보호해달라고 말하는 엄마의 진정어린 호소는 누선을 자극합니다.


“그건 원래 내가 가져야할 것, 짊어져야 할 것이지. 다카코가 가질 필요는 전혀 없어. 하지만 그 아이는 죄의식을 가져. 그런 아이야. 그 아이는 아무에게도 그런 말은 하지 않겠지만, 다카코의 그런 마음을 너희들은 알아주지 않겠니. 그건 내가 너희들에게 책임 전가하는 것, 내가 해야 할 고통스런 일을 너희들에게 떠맡기는 것이란 걸 알고 있어. 하지만 학교 안에까지는 내가 보이지 않으니까. 적어도 친구인 너희들만은  그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해. 다카코를 잘 부탁한다.”


자신의 ‘치부’라는 것을 알지만 딸을 보호하고 싶어 더듬거리며 자신의 ‘이야기 하고 싶지 않은 가족사의 비밀’을 털어놓는 모정!

그걸 까맣게 모르고 한사코 감추려던 소녀가 불현듯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해주는 친구를 고마워하는 광경 등은 그냥 지나치기가 어려운 대목입니다.


자세한 소설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밤의 피크닉’을 함께 떠나보셔야 그 소년 소녀들의 순수한 심성과 섬세한 마음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과 함께 80km를 완주하다 보면 어느새 환한 아침의 환희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런 ‘문화적 행복감’을  신년 초부터 누릴 수 있게 해준 온다 리쿠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