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의 박경리 선생님. 젊은시절엔 굉장한 미인이셨습니다. 이 사진이 영정사진이 되었습니다.
謹弔! 삼가 박경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08년 5월5일 (오늘) 오후 3시경 작가 박경리 선생님이 영면하셨습니다.
한 달 전 입원하셨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결국 세상을 뜨신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 역사상 한 작가가 25년동안 한 작품을 외곬수로 집필,
200자 원고지 3만장 분량을 쓰셨다는 건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고결함과 장엄함과 비장함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생이 함축되어 있는 듯한 대하소설 '토지(土地)'는 대한민국의 큰 훈장입니다.
'토지'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입니다.
등장인물만 700명에 이르는 그야말로 대하 장편소설!
선생께선 노벨문학상후보에도 여러번 오르셨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않으셨지만 기왕의 수상작품들에 비해 결코 작품성에선
뒤지지 않는다는 걸 자신합니다.
얼마전 선생님께서는 기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대운하는 환경에 재앙을 가져다 준다면서 반대의사를 명백히 밝히셨습니다.
틀린건 틀렸다고 지적하시는 우리 문단 그리고 나라의 큰 어르신이셨습니다.
향년 82세! 요즘으론 아까운 나이입니다. 한 5년만이라도 우리곁에 더 계셔서
나라가 어지러울때 어른으로서 따끔한 말씀을 해주셨어야 하는데
너무 빨리 떠나셨습니다. 한국 문단 뿐 아니라 대한민국으로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은 그야말로 꼬장꼬장하고 엄정한 어른으로서의 그 큰자리를
빛내오셨던 분입니다. 문학 그 자체의 인생을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저는 문인은 아니지만 '문인정신'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선생님의 타계가
너무 가슴아픕니다.
우리 블로그 방문객 여러분과 함께 박경리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 글은 제가 재작년 썼던 글을 다시 한번 싣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 박경리 선생님과 전화로 인터뷰하고 난 뒤에 쓴글도 함께
실었습니다.
우리 블로그 독자 여러분과 함께 박경리 선생님을 두고 두고
그리워하고 싶습니다.
박경리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
팔순 맞은 작가 박경리 할머니!
오늘 아침 신문에 ‘팔순 맞은 작가 박경리씨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박경리 선생님은 ‘무조건 저 사람이 있어서 좋다’라고 생각하는 나의 ‘사람 리스트’에 올라있는 분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이 각박한 세상에 가족 이외에 ‘아 그 사람이 있어서 좋다’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한 둘 쯤 갖고 있거나 갖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배신’이 횡행하는 이 인간 세상에 조건 없이 끝까지 한 사람의 ‘존재의 의미’를 믿을 수 있고, 그 사람으로 인해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서로에게 ‘복된 일’일 것이라는 생각도 가끔 한다.
박경리 선생님은 오늘 나온 인터뷰 기사의 말미에 “ 이러다 내가 죽지, 그런 고비가 여러 번 있었어요. 하지만 그 때 마다 꼭(누군가) 바늘구멍만큼씩 열어 주셨어요. 그게 살아가는 데 힘이 됐어요. 그래서 희망을 안 버렸어요. 다 해결이 될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어요.” 라고 말했다.
‘바늘 구멍만한 희망’을 말하는 팔순의 할머니 작가 박경리 선생님은 그 존재 자체로 대한민국 여성의 위상을 드높여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니 비단 여성 뿐 아니라 ‘인간과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온 점에서 선생은 이 시대에 만나기 쉽지 않은 ‘고마운 존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시끄러운 뉴스로 마음이 심란해진 이 아침 박 선생님이 규정하신 ‘바늘구멍만한’크기의 ‘희망’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선함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10여 년 전, '한국의 1/2을 만드는 여성들'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그 책에 맨 처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박경리 선생님이었다.
오래 전에 쓴 글이지만 다시 읽어보니 박 선생님의 작가로서의 자존심이나
기상이 생생하게 느껴져 우리 블로그에 축약해 다시 올려본다.
******* ******** ****** ****** ******* *********
“ 매스컴을 극도로 피해 ‘신비의 작가’ ‘은둔의 작가’로 통하던 박경리씨가 텔레비전에 출연한 모습을 보는 순간 무척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존경하는 작가의 집안 구석구석을 잡아내는 카메라의 눈도 꽤 재치 있었다.
손자 녀석들의 그림이 든 액자를 소중한 보물인 양 소개하는 할머니 박경리 씨에게서는 여느 할머니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자애로움이 흠뻑 재어 있었던 것 같다.
두 차례에 걸쳐 방영된 이 프로그램에서 작가의 문학과 역사에 대한 철학이나 일상이 퍽 꼼꼼하게 소개되었다. 역시 그는 대가의 풍채를 잃지 않고 있었다.
육십대 중반을 넘어선 할머니로서 그처럼 당당하고 존귀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 시대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를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일본의 이중성, 천박함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특히 정신대 문제에 관해서는 매우 단호한 자세로 그의 의견을 피력했다.
“정신대 문제에 관련해 일본측으로부터 돈을 받는 것은 매춘행위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그의 작가적 기상과 민족의 자존을 소중히 여기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에 공감을 했다.
그러면서도 아, 저 발언이 일부에서는 문제가 되겠는데 라는 걱정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방송이 나간 이후 그의 이 발언을 놓고 정신대 할머니들을 비롯한 일부 여성학자들 사이에서는 발언을 성토(?)하는 여론이 형성됐다.
내가 ‘정신대 문제에 새로운 논쟁, 작가 박경리씨 인터뷰서 발단’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게 된 것도 이런 사회분위기가 큰 몫을 했다.
마감시간이 촉박해 원주까지는 그를 찾아뵙지는 못하고 전화인터뷰를 해야했다. 떨리는 심정으로 다이얼을 돌렸더니 마침 그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물론 혼자 계시는 분이니까 전화를 직접 받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왠지 송구스럽고 두려운 기분이었다. 만약 인터뷰를 거절한다면, 대가여서 쌀쌀하게 전화를 끊는다면 어떡하나 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그는 다정스러움과 겸허함을 겸비한 음성으로 한참 어린 기자의 전화 인터뷰에 진지하게 응대했다. 그때처럼 취재원에게 감사하고, 친밀한 기분을 느꼈던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그는 방송이 나간 이후 항의 전화도 많이 걸려왔다면서 자신의 본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그는 종군위안부라는 말 자체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자신의 생각이라고 했다. 아울러 민족 자존과 직결되는 문제를 돈으로 청산하려는 우리측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와 함께 일제의 만행은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잔혹한 일인데 그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너무 미온적이었음을 강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서 한 자신의 발언은 일본이 저지른 행패는 청산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죄과이므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세우자는 뜻에서, 돈을 받지 말고 기록으로 남겨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만들자고 한 얘기였다고 해명했다.
그는 일제에 의해 희생당한 우리 동포들 중 유독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만이 사회에 복귀하지 못한 채 버림을 받은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은 우리 동족의 큰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자신의 발언으로 상처를 입은 할머니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전화 인터뷰 도중 나는 ‘아 역시 박경리 선생님은 다르구나’ 라고 절실하게느꼈다.
우리에게 작가 박경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자랑거리라는 생각마저 했다.
10년 전 박경리 씨는 한 일간지에 ‘나의 문학적 자전’이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 이 글은 당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이런 형태로 자신의 문학세계와 지난 일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한 것은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이 자전 에세이를 세 번이나 읽었다. 작가 박경리의 품성과 인격을 여실히 알 수 있게 하는 매우 솔직한 고백록 스타일 이었다.
자신의 모자람을 진정으로 고백할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날선 자존심’이야말로 그가 ‘토지’라는 대작에 오늘날까지 몰두할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난 그는 진주여고를 졸업할 때까지는 두각을 나타내는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의 자전에 따르면 ‘성적이 형편없는 나에게도 한가지 잘 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역사였다. 역사시간에만은 박경리 학생과 선생님과의 문답으로 시간이 흘렀다. 그의 힘겨운 학교생활을 지탱해준 것은 시를 쓰는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아궁이며 이불 속이며 노트를 감추어가면서 매일매일 일기를 쓰듯 시를 썼다.
뒷날 친구의 소개로 작가 김동리를 찾아가 자신이 쓴 시를 보이자 ‘상은 좋은데 기교가 안 돼 있다, 대신 소설을 써보라’는 충고를 들었다.
1955년 ‘계산’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김동리씨의 초회추천을 받았다.
소학생때 일본인 여류작가가 딸 하나를 둔 미망인으로 작가생활을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도 그렇게 되었으면’하는 막연한 생각을 동경처럼 품기도 했다.
훗날 자신이 막연하게 동경하던 미망인 작가의 삶이 자신의 운명으로 펼쳐진 것에 쓴웃음을 짓기도 한다. 당시에는 미망인의 처참한 삶을 알지 못했다는 고백과 함께.
‘인간에 대한 또는 생명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고 믿지만 그는 사람만나기를 극도로 꺼린다. 마음이 여려서 쉽게 상처받기 때문이다.
그는 ‘토지’를 집필하면서 유암수술을 했고, 붕대를 싸맨 채 집필에 몰두해, ‘독한 사람’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인생은 ‘빙벽에 걸린 자일’이 되었고 ‘주술에 걸린 죄인’이 되었다.
매일 오전 200자 원고지로 열두 장씩을 써내는 것 이외에는 고추와 호박을 심은 텃밭을 돌보거나 들고양이들의 밥을 마당에 내놓는 것이 그의 주요일과이다.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는 시간부터 끝나는 시간까지 늘 켜 놓고 지내는 그는 ‘텔레비전이 가고 나면 대화하던 사람이 떠난 것처럼 허전해진다’는 말을 한다.
1980년 가을 지금의 거처인 원주시 단구동에 삶의 뿌리를 내린 그는 600여 평 되는 너른 정원을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가꾸며 살아온 것으로 유명하다.
거의 자급자족의 삶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 이 대작가는 자신의 삶이 어느 결에 여기까지 흘러왔나 라는 생각에 이르면 회한에 젖어들기도 한다.
그는 자연보호를 ‘생명의 평등’이라고 명쾌히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생존의 뜻이 있으며 인간이 개발이란 이름으로 다른 생명을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원주생활 이후 그는 집밖으로 나간 쓰레기는 하나도 없다고 자랑한다. 음식찌꺼기는 썩혀서 거름으로 주고 연탄재도 부숴서 가루를 낸 뒤 마당에 밟아 다졌다.
환경운동이 범국민 차원으로 일어나기 훨씬 이전에 그는 생명에의 외경심에서 비롯된 환경보호운동을 몸소 실천해온 것이다.
그는 문학 앞에서는 한없이 엄격하고 준열한 정신으로 임하지만 생활에는 영원한 아마추어로 어눌하기 짝이 없는 삶의 방식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세탁기 작동에 대해 여러 번 설명을 듣고서도 막상 혼자 사용하려면 뭐가 뭔지 몰라 할 수 없이 손빨래를 하고 만다는 그의 고백에서 우리는 이 시대 최고 작가에게 연민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 *********** ******** ******** ********** *******
여기까지가 10여 년 전 썼던 졸고를 축약해 놓은 것이다. 옮겨놓고 보니 공연한 짓을 한 것 같은 자괴감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시대 원로작가의 ‘그 때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아 감회가 새롭기도 하다.
얼마전 이 원로작가는 팔순을 맞아 조촐한 모임을 열었다. 본인은 극구 사양했지만 그의 가족들과 ‘박경리를 좋아하는 팬들’의 주선으로 열린 것이다. 이 자리에서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오래 살아 염치없다. 이룬 것보다 더 인정받아 송구스럽다”
아직 ‘카랑카랑한 자존심’이 느껴지는 이런 발언을 할 수 있는 ‘원로’가 있어서 그나마 ‘희망’을 느껴보는 겨울아침이다.
***********************************************************************
다시한번 박경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시대 보기 드문 <큰 바위 얼굴>이셨습니다.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조위, 유가령 오래된 연인들의 결혼식 (0) | 2008.07.21 |
---|---|
조용필의 모든 것 (0) | 2008.05.14 |
봉준호 감독과 '박태원 삼국지' (0) | 2008.04.30 |
대한민국 상위1%의 웨딩 예물과 김장훈 박상민의 기부 (0) | 2008.04.03 |
네이키드 스시와 대한민국 상위 1% (0) | 2008.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