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과 ‘박태원 삼국지’
어제(29일) 서울 삼청동 출판문화회관에서 열린 ‘박태원 삼국지 출판 기념회’는 모처럼 ‘행복한 문학의 밤’분위기 속에 아주 화기애애하면서도 페이소스(pathos)가 흘러 애잔한 느낌마저 들게 했습니다.
만춘(晩春)의 경복궁 동네, 해질 녘이 주는 ‘문학적 시추에이션’에다 저자는 이미 고인이 된 1930년대 최고의 모더니스트 소설가 박태원(朴泰遠), 그리고 저서는 그 유명한 ‘삼국지’라니...
더구나 그의 ‘삼국지’는 이제까지 한국에서 나온 기존의 ‘삼국지’들을 압도하는 ‘최고의 삼국지’라는 문학평론가들의 설명까지 뒤따라 그야말로 금상첨화! 아주 3박자가 딱 맞아 떨어진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귀한 출판기념회가 될 수밖에 없었겠지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천변 풍경’으로 잘 알려진 박태원은 한때는 월북문인이라는 ‘빨간 딱지’가 붙어 ‘박0원’으로, 가운데 이름자가 삭제된 채 우리에게 다가왔던 최고의 문장가입니다.
그는 친구 정지용을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간 채, 북으로 갔다고 합니다.
경기고보 출신인 그는 1938년 동문들이 출판기념회를 열어준 이래 70년 만에 자신의 월북으로 결국 남한에 남겨둔 채 돌보지 못하고만 유자녀들에 의해 이렇게 성대한 ‘잔칫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유자녀라고 해도 이제 모두 70고개를 바라보는 백발성성한 시니어들이어서 그들이 준비한 이번 행사가 더 숙연한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현역 유명인사’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영화감독 봉준호씨였습니다. 봉 감독은 박태원의 외손자라고 합니다. ‘영화감독’이라면 일단 후한 점수를 주는 제가 ‘대한민국 최다 관객동원’이라는 대단한 타이틀을 갖고 있는 유명 영화감독을 만났으니 가만있을 수 없겠죠.^^
와글와글한 분위기여서 정식 인터뷰는 못했지만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다가가 명함을 건넸습니다. “영화감독들은 명함은 안 가지고 다니겠죠?”라고 말했더니 봉 감독은 아주 수줍어하면서 자신의 명함을 한 장 꺼내 제게 주었습니다.
올해 우리나이로 마흔인데도 캐주얼한 옷차림에 멋스런 웨이브 장발을 한 그는 나이는 어디다 두고 왔는지 여전히 ‘문학소년’ 같은 순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선지 봉 감독과 사진 찍으려고 하는 멋진 여성들이 줄을 섰더군요. ‘분위기가 아주 멋진 영화감독’이니 저렇게 여성 팬들이 몰려드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의 명함은 아무 타이틀 없이 그냥 ‘봉준호’라는 한글이름과 그 아래 한자와 영문 이름만 새겨져 있더군요. 뒷면에는 그의 이멜 주소와 핸드폰이 아닌 연락전화번호가 적혀있었습니다.
봉감독은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글재간 있는 감독’으로 알려졌는데 아마도 그의 이런 ‘문재(文才)’는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사실 외할아버지에 대해선 들은 게 별로 없다.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시각효과를 전공하신 부친의 영향은 많이 받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서재에서 화집 사진집을 몰래 보면서 자랐다. 그때 느꼈던 흥분과 기억이 제 영화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다” 는 소감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사진과 외조부 박태원의 사진을 함께 본 순간 ‘외탁(외가쪽을 닮음)’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누가 봐도 봉 감독은 30년대 박태원과 꼭 닮았더군요.
그래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나 봅니다.
그는 ‘분단을 소재로 한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아마도 그런집안 내력을 어린 시절부터 듣고 자란 영향이겠지요.
예전엔 ‘연좌제’가 있던 시절이어서 박태원의 자제들은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며 살았고, 그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해 장남 박일영씨는 1968년 미국으로 이민 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이번 ‘박태원 삼국지’ 서문은 그가 어린 시절 ‘아버지 박태원’에 대한 기억을 더듬으며 진솔한 느낌을 썼는데 본인은 ‘글이란 써본 일도 없고, 생전에 써 볼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은 위인’이라고 했지만 역시 부친의 ‘문장력’을 유전 받았는지 아주 쉽고도 편안한 문체로 감동적인 서문을 올렸더군요.
서문 중 한 지인이 “구보의 아들인데 아홉은 안 되고 팔보 쯤 되는 청년이오라고 한 뒤로 호를 팔보로 했더니 그 내력을 전해들은 제 아이가 자신의 몸에 칠보라는 문신을 새긴 걸 보고 놀랐던 일이 있습니다.”라는 대목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숙연한 기분이 들게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구보’ 할아버지와 ‘팔보’아버지 그리고 ‘칠보’자식이라...
박일영씨는 ‘가족 인사말’ 순서 때도 양복주머니에서 조그만 종이를 꺼내 “부친의 흉 거리를 이렇게 많이 적어왔는데 시간이 없어서 생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아주 짧고도 의미심장한 인사말을 해 박수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할 말이 많겠습니까.
박태원이 홀연히 북으로 떠난 뒤, 숙명여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당시 인텔리여성이었던 부인과 네 자녀가 당했을 온갖 시련은 지금 이 시간 천하 남인 제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네요. 그땐 아버지가 있는 집도 먹고살아가기가 힘든 시절 아닙니까.
생계가 막연한 것만 해도 엄청난 고통이었을 텐데 거기에 ‘연좌제’라는 올가미까지 그 가족들을 옭아맸으니 그 처절한 상황은 이루 말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아버지의 월북당시 열 살이었다는 차남 박재영씨는 “어머니께선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셔선 지 일찍 세상을 떠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열 살 때 까지 밖에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소년이 이제는 노년기에 들어서 ‘사부곡(思父曲)’을 쓰는 심정으로 10년 넘게 자료를 모아 이번에 ‘최고로 재밌다는 박태원 삼국지’를 세상에 선보였으니 그 감회야말로 정말 눈물 나는 것이겠지요.
6·25와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그런 생고생을 한 사람들의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옛날엔 “똑똑한 문인들은 다 북으로 갔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지요. 그러다보니 ‘이산가족’의 쓰라림을 당해야 했던 그들의 가족들이 겪었던 고난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박태원의 경우엔 자제들이 잘 성장해 저렇게 ‘아버지를 위한 잔치’를 차릴 정도가 되었으니 그나마 감사한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더구나 유명영화감독인 외손자까지 할아버지의 출판기념회를 빛내기 위해 참석했으니 그 대견함은 가족 아닌 사람들에게까지도 따스하고 흐뭇한 마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엔 출판기념회 같은 곳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입니다. 제 자신도 졸저를 내긴 했지만 그런 기념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책 한권 내고 사람들 ‘오라 가라’ 민폐를 끼치는 듯해서 그런 ‘코스’는 피해왔던 겁니다.
하지만 ‘박태원 삼국지 출판기념회’는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이런저런 ‘사연들’이 서려있는 ‘아름다운 문학의 밤 행사’로써 출판기념회를 번거롭게만 생각해오던 저에게 이색체험 현장의 기회를 선사했습니다.
어제 행사에는 서울대 김윤식명예교수의 강연과 박인수교수의 축하공연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두 분 모두 ‘70객’이지만 해박한 강연과 뛰어난 노래솜씨로 ‘노익장’의 기염을 토했습니다.
김 교수는 ‘구보의 문학세계’에 대해 말하는 과정에서 ‘소문대로’ 해박한 문학 뒷이야기를 종횡무진으로 쏟아내 박수를 받았습니다.
오늘 아침,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어제 김 교수가 준 ‘방란장 주인(芳蘭莊主人)’이라는 구보의 단편소설을 읽고 박장대소했습니다.
‘한 문장’으로 ‘문체의 힘’을 보여주는 극히 드문 단편소설이라는 이 짤막한 글을 보면서 70년 전에 이렇게 유머러스하면서도 생생한 묘사로 그야말로 ‘힘있는’ 소설을 쓴 구보 박태원에 대해 경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방란장’이라는 카페 경영 실패기를 한 문장에 담아낸 이 소설을 보고 전 10권짜리 ‘박태원의 삼국지’는 이번 기회에 꼭 통독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도원의 결의’마저 혼자 하게 되었습니다.
박인수 교수가 부른 축가 중 ‘클레멘타인’은 박태원이 노랫말을 지었던 곡입니다. 박 교수는 너무 열창하는 바람에 가사를 깜빡 잊어버리는 ‘불상사’를 당했지만 다시 처음부터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좌중은 가사를 깜빡한 박 교수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는지 아니면 그 센티멘털하면서도 정다운 노래가 좋아서였는지 어느새 조용조용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무심결에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을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박수치면서 합창하는 좌중을 보는 건 제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한 문학평론가는 ‘박태원 삼국지’에 대해 이렇게 극찬을 했더군요.
“한국어판 삼국지 현대화의 종착점이면서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박태원 삼국지는 그 자체가 작은 문학사이며 현대사라 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기는 오늘날의 유저들이 읽어도 좋을 만큼 빼어난 가독성과 동시대성 그리고 순도 높은 완성도를 지닌 작품이다. 박종화·김동리· 황순원· 김구용· 황석영· 이문열 등 대표작가들의 텍스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박태원이 처음으로 이룩하고 도달했던 삼국지 한국화와 현대화라는 압도적 성취에서 좀더 묵직한 존재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박태원이 1964년 북한에서 완결지은 삼국지가 다시 출판된다는 이 문화사적 사건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문학평론가의 이런 상찬이 없었다 해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던 보이’ 박태원의 위트 넘치는 문장력에 반한 저로서는 ‘박태원 삼국지’를 다가오는 초여름
읽어야할 도서목록 '머스트 해브'로 선정했습니다.
뜻밖에 참석하게 된 출판기념회 덕분에 오랜만에 ‘문학적 향취’를 맛본 것은 무료한 도시인인 저에겐 가뭄의 단비 같은 행복한 체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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