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조용필의 모든 것

스카이뷰2 2008. 5. 14. 15:50
 

 

 

 

          ‘조용필의 모든 것’


오늘 아침, 텔레비전을 켰더니 느닷없이 조용필의 부인 장례식 장면이 나왔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데 

2003년의 일이라는 게 자막으로 나왔다.  ‘데뷔 40년 조용필의 모든 것’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 봤던 중국 영화 ‘비정성시’의 한 장면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배우자를 떠나보내는 고통스런 순간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 그런 절제된 표정에서 오히려 그의 참을 수 없는 슬픔의 깊이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선 조용필과 그 부인의 생전 다정했던 모습도 꽤 오래 보여주었다. 상당한 미모의 부인은 조용필이 공연할 때는 정작 더 조바심을 쳤다고 한다. 그런 말을 전할 때 그의 표정은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는 듯 행복하면서도 서글픈 듯해 보였다. “자기가 뭘 안다고 그러냐면 자기는 다 안대요 하하”


그의 이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의 특수한 직업세계에 대해 ‘뭘 모르지만 그래도 다 아는 것 같은’ 그 아내의 남편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느껴졌다.

미국의 슈퍼마켓에서 함께 장보는 소소한 일상의 한 장면은 그들 부부의  행복했던 한 시절을 군 설명 없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재미동포였던 그의 아내는 그곳에선 꽤나 알려진 캐리어우먼이었다.


조용필같이 최정상의 인기가수에게는 있을 것 같지 않은 그런 일상생활의 모습들은 어쩌면 그가 아내와 함께 누렸던 행복한 순간의 절정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생전 아내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가장 행복했고 빠르게 지나갔다"는 그의 회상에서 그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친김에 그 프로가 끝날 때까지 봤다. 자신의 ‘일’에 목숨마저 걸듯이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최고는 거저 되지 않는다’는 아주 평범한 말을 새삼 실감했다.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독재자처럼’ 카리스마를 보여주며 ‘공연준비’를 하고 있는 장면에서 ‘프로의 세계는 아름답다’는 말도 떠올랐다.


과묵하면서 실용적인 그의 일상과 “별 큰 욕심 없어요, 그저 관객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이 희망이자 욕심이에요”라고 더듬거리면서 말하는 그에게서 심플한 매력이 느껴졌다. 심플함의 매력! 현대인이라면 거의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작년인가 조용필이 한 방송사와 함께 평양에서 공연한 뒤, 뒤풀이 멘트를 하는 도중 “21세기 말까지 노래하고 싶어요”라는 장면을 보고서 왠지 뭉클해졌었다. 그때 조용필은 그의 노래보다는 전화로 대화하면 더 좋을 상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톱 가수인 그에겐 너무 미안한 얘기겠지만.^^)


하지만 이 과묵한 스타일의 사나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단답형 인간’이어서 “전화는 목적이 있어서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 짧게 통화하는 거지요”라는 말을 함으로써 나의 ‘환상’을 깨버렸다.


텔레비전에 나온 그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는 ‘말이 별 필요 없는 수도승 같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외롭지 않냐는 진행자의 우문에 “외로운 게 습관이 되다보니 별로 그런 걸 못 느끼는 것 같다”는 현답이 나왔다. 상처한지 5년 된 이 톱 가수는 이런 말을 하면서 베란다의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외롭지 않다는 그였지만 외로워 보였다.


어쩌면 우리네 생활에서 ‘말’이란 그리 많이 필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시지구레한 말들을 많이 하다 보면 트러블이 많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일상의 대화를 나누던 상대가 갑자기 사라지고 났을 때 겪어야 했을 그의 고통이 그 화면에 잘 나타나 보였다.


조용필의 광팬은 아니지만 그가 부른 ‘그 겨울의 찻집’이나 ‘친구여’ ‘ 킬리만자로의 표범’같은 노래는 좋아한다. 언젠가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이 ‘그 겨울의 찻집’이 애창곡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면서 김정일이 의외로 ‘감수성’이 있는 인간형이라는 감이 들었었다.


센티멘털한 느낌의 그 노래를 좋아한다는 소리에 그가 A형일 것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는데 북한 공연차 평양에 간 김연자가 김정일에게 무슨 형이냐고 물었더니 A 형이라고 답했다는 기사를 보고 실소한 적이 있다. 나의 혈액형 감별법에 따르면 '김정일의 감수성'은 오갈데 없는 A형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그런 애절한 노래를 부른 조용필은 과묵한데다 단답형 스타일로 미루어 O형이라는 감이 왔다. 자료를 찾아보니 역시 조용필도 나의 혈액형감별법의 합격생이었다.^^ 


어떤 한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든 40년을 ‘버텨왔다’는 건 그가 유명하건 그렇지 않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조용필처럼 ‘변덕쟁이’ 대중들을 상대로 살아온 ‘유행가 가수’가 자신의 히트곡만으로 3시간 동안이나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전설적인 신화’라는 표현이 과대포장같지는 않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살아온 가수들이 한 둘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5년 전, 조용필이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유료티켓을 들고 그의 노래를 들으러 온 4만 5천명의 팬들과 비를 흠뻑 맞으며 콘서트를 마치고나서 “내 인생에 승리했다”고 혼자 쾌재를 불렀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가 ‘인물은 인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광경을 상상해보면 그야말로 엑스터시(ecstasy)라는 말이 제대로 느껴진다고나 할까. 폭우가 퍼붓는 노천무대에서 광적으로 열창하는 톱 가수와 더 열광하는 수 만명의 팬들! 이것이야말로 바로 엑스터시 아닌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무대에서 노래 부르다 쓰러져 죽고 싶다”는 진부하지만 극적인 고백도 했다.

19세 때 가수로 데뷔해 올해로 40년 ‘노래인생’을 맞이하는 ‘한국 최고의 인기가수’로선 당연히 가질 수 있는 소망인 듯하다.  이런 그에게 ‘우리 시대의 명창’이라고 명명한 서정주시인의 간결한 별칭 하사가 오히려 조촐하면서도 그를 한껏 높아보이게 하는 것 같다.

 

조용필에겐 ‘최다’ ‘최장’ ‘최고’ ‘최초’라는 수식어가 줄곧 따라다니고 있다.

오늘 아침 텔레비전을 보고나서 조용필에 대한 자료조사를 해보니 과연 조용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 일본 엔카의 전설적 여왕으로 자리한 미조라 히바리의 노래 ‘흐르는 강물처럼’이 일본 고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까지 과문한 탓인지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 대중가수의 노래가 실렸다는 소릴 들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조용필의 노래가 3곡이나 교과서에 실렸다.

‘친구여’가 고1 음악 교과서에 실린 걸 시작으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여행을 떠나요’가 고교 음악교과서에 실렸다고 한다. 국내 가수로 3곡이나 교과서에 실린 가수는 조용필이 처음이라고 한다.


1994년에 그의 앨범 판매량은 1천만장을 돌파해 그 분야에 또 ‘최초’와 ‘최다’를 장식했다. 그의 이런 ‘기록’에 대해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록들이 있다. 자타가 공인하는 ‘기록 쟁이’지만 아무래도 ‘교과서에 3곡 실린’ 기록이야말로 그를 가장 뿌듯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 텔레비전에서 그는 아주 조심스런 표정으로 “관객들이 좋아해 주시느냐가 제일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는 말도 했다. 그만큼 그는  관객을 어려워할 줄 아는 ‘프로 정신’에 투철한 것이다.


오는 5월 24일 열릴 ‘데뷔 40년 기념 공연’을 앞두고 그는 아마 지금 초긴장 상태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긴장의 나날들이야말로 조용필을 가장 조용필답게 만들어 주는 행복한 일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용필의 모든 것’은 바로 ‘노래’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