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감독(조선일보 이덕훈기자 사진)
‘날아라 펭귄’과 임순례 감독
‘홍일점’이란 단어는 이제 옛말처럼 진부한 것이 되었지만 그래도 어딘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다.
특히 꽃다운 어린 여성이 남성세계에서 두각을 나타낼 때는 이 ‘홍일점’이라는 단어가 그 여성을 장식해주는 눈부신 찬사가 될 때도 있다.
그렇기에 웬만큼 나이 든 여성에겐 이런 단어를 붙이는 건 조금은 실례가 될 지도 모르겠다. 현역감독의 나이가 점점 젊어지는 한국영화계에서 갓쉰의 나이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는 임순례 감독은 상업영화 시장에서 남성감독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룬다는 의미에서 ‘홍일점 감독’이다. 물론 신예 여성감독들이 몇몇 있긴 해도 아직은 임감독만큼 '지명도'를 확보하진 못하고 있다.
여성감독으론 처음으로 4백만 관객 동원을 기록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그런 ‘상업적 기록’말고 그녀는 ‘상식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비교적 믿을 만한 감독이란 얘기다. 남성감독들 중 이만한 신뢰감을 주는 감독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괴물’ ‘해운대’까지 다섯 편의 영화는 모두 남성 감독들의 작품이다. 천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작품수준을 따지기 이전에 일단 대단한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다섯 편이 과연 흔쾌히 ‘수(秀)’를 줄만한 작품이냐를 따질 때 선뜻 그렇다는 대답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각자 보는 눈에 따라 다르겠지만 ‘천만 관객’동원 영화들에선 공통적으로 ‘오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 흥행에 대박을 터뜨린 남성감독들을 선뜻 믿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홍일점’ 임순례 감독은 상대적으로 차분한 연출 능력을 보여줘 ‘영화적 재주가 있는’ 그의 작품이라면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우생순’을 비롯한 그의 다른 작품들에선 ‘오버하지 않는’ 재능을 볼 수 있다. 그런 재능이야말로 그를 신뢰할 수 있는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방진 이야기 같지만 현재 활동 중인 유명감독들 중 이런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감독은 그리 많지 않다. 제 아무리 ‘천만 관객’을 동원한 기록의 소유자들이라도 그들의 ‘실력’이나 ‘영화철학’에 선선히 신뢰할 수 있는 감독이 많지 않다는 것은 유쾌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남성감독들의 '제작 연령'도 마치 아이돌 가수들처럼 짧기만하다. 대개 40대 중반정도만 되어도 '현역'에서 은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남성감독들에게 ‘불신감’을 느끼는 가운데 여성인 임순례 감독이 만들었다면 어느 정도 믿음성이 가기에 ‘봐줘야지 ’하는 마음이 든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티켓을 끊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 ‘날아라 펭귄’은 다소 기대 이하였다. 뭐랄까, 좀 싱거웠다고나 할까. 밋밋하다고나 할까.
대체로 각 장면 장면은 그런대로 ‘솜씨’가 나왔지만 어딘지 산만하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짧은 시간 속에 다 담으려해선지 이야기를 하다만 듯했다. 아쉬웠다.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주제’들이었지만 허전함을 남겼다. 그나마 임감독 특유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져 다행이었다.
영화가 끝나면서 엔딩자막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지원을 했다는 스크린 크레딧을 보는 순간 ‘그래서 그랬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감독에게 모두 맡기지 않고 ‘돈대준 공무원’들이 무지한 입김을 불어넣었기에 저런 식으로 작품이 만들어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 조간신문에 나온 ‘임순례 감독 인터뷰’를 보니 ‘저간의 사정’을 대충 알 수 있었다. 우선 이 영화는 ‘2억원’의 초(超)저렴 예산을 지원받아 만든 작품이다.
영화가 ‘돈’의 액수에 좌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돈으로 수작을 만드는 건 보통 쉬운 일은 아니다.
2억 원이라면 웬만한 영화의 ‘홍보비’에도 못 미치는 액수다. 그런 제작비용을 감안해보면 ‘날아라 펭귄’은 아주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 블로그에 몇 자 언급하기로 한 것이다.
그야말로 ‘불가능한 금액’으로 만든 영화치고는 ‘하고 싶은 소리’를 웬만큼 담아낸 임순례 감독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고작 6주간 25회에 걸쳐 ‘번개 제작’한 뒷이야기를 들으니 임감독의 ‘뚝심’이 보통이 아닌 것 같다.
연기파배우들의 개런티도 ‘거마비’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정혜선 박인환 같은 연기파배우들이 ‘아주 현실감 있는 영화’라며 선뜻 출연해주었다고 한다.
‘날아라 펭귄’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비 인권적인 문제’들을 ‘쉬운 표현’으로 그려내고 있다.
‘조기 영어교육’ 에 시달리는 어린이와 극성엄마, 기러기 아빠의 소외감, 황혼 이혼, 직장 내 차별문제 등...문제 하나하나가 모두 한편의 영화로 심도 있게 다룰만한 ‘무거운 주제’들이다.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무난하게 주물러 한 상에 차려 내놨다는 점 하나로도 감독의 ‘역량’을 칭찬해줄 만하다. 하지만 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뤘다면 하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신문 인터뷰에서 임 감독은 영화 속에 나오는 ‘채식주의자이야기’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2003년부터 채식만 해온 그는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 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공격을 받곤 하죠. 그런 것도 인권이란 시각에서 봐야 해요. 어떤 스태프는 제가 고기 안 먹는다는 말을 듣고‘그럼 우린 이제 회식은 없어?’ 라고 했대요.” 회식은 곧 고기로 한다는 획일주의적 사고방식이야말로 어찌보면 파시즘적 요소가 다분한 듯하다.
개 세 마리를 키우고 있는 그는 개와 소의 눈을 들여다 보다 채식을 결심했다고 한다. 작년 봄 광우병 사태 때 ‘주저앉는 소’를 텔레비전으로 지켜본 적잖은 사람들이 ‘채식’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주변에서도 채식주의자들을 심심찮게 보고 있지만 임감독 말처럼 채식주의가 타인에겐 아무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정서적으론 왠지 까다롭고 접근하기 어려운 인간형으로 느껴지는 면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실감 있는 대목들론 문소리가 극성엄마로 등장해 어린아들의 조기영어교육에 안달하는 모습과 정년퇴직한 남편에게 ‘반항’하는 ‘기가 세진 아내’의 일상을 보여주는 정혜선 박인환 부부의 모습을 들 수 있다.
어쩌면 이 조기어교육 붐과 황혼이혼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주목받을 것 같다. 영화의 각본도 직접 쓴 임감독은 “저는 애를 키운 적도 없고 직장생활도 안 해봤지만 자료를 많이 모으고 취재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인터넷 카페에서도 소재를 많이 얻었죠.”라고 말했다.
올해 쉰 살이 된 그는 “좋아하는 것을 자제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정초부터 금주를 결심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주변에선 “술을 안 마셔? 왜 안 마셔” 하면서 심한 ‘거부감’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인권 침해’를 받았다는 얘기 같다.
우리 사회에선 ‘남이 다 하는 걸 안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해버리고 ‘왕따’시키는 경향이 있는 걸 감안해 볼 때 채식주의자이자 금주선언을 한 ‘쉰 살의 독신녀’ 임순례 감독이 살아가는 데는 적잖은 ‘난관’들이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여장군’같은 그는 그런 ‘난관’쯤엔 미동도 안할 듯해 보이지만 나름의 ‘설움’을 꽤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감독은 ‘영화’로만 말하면 되는 것이라는 걸 믿음직한 이 여감독에게 말해주고 싶다.
임 감독은 소설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을 차기작으로 내놓을 예정이다. 지금 시나리오를 완성해 놓았다고 한다. 농부의 아들이 소를 팔러 팔도를 떠돌며 겪는 이야기라고 한다. 왠지 괜찮은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임순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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