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박완서 선생과 나

스카이뷰2 2011. 1. 22. 16:35

 

 

                            

                                     박완서 선생과 나

 

 

토요일이라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각인 오후 2시쯤에야 컴퓨터를 켰다. ‘박완서 별세’라는 소식이 Daum 머리기사로 떠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박완서 선생은 오늘 오전 6시쯤 자택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는 기사가 여러 개 나왔다.

1931년생이시니까 80세로 아직은 한참 더 사실 수 있는 연세인데... 가슴이 아렸다.

 

내가 좋아했던 ‘朴씨’ 성을 가진 한국 문단의 거성(巨星) 박경리 선생에 이어 박완서 선생마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보며 인간은 ‘결국 사라져가야 할 존재’라는 새삼스런 진리 앞에 숙연해지는 마음이다.

박완서 선생과 나의 ‘인연’은 꽤 오랜 세월을 쌓아왔다. 물론 처음엔 일방적인 인연이었다. ‘박완서’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신문지면을 통해서였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에 당선된 선생에 대한 기사를 읽은 게 ‘첫 만남’이었다.

 

방금 선생의 ‘부음(訃音)’을 본 순간 내 눈 앞에는 40년 전 정동에 있던 우리 학교 도서관 밤풍경이 떠올랐다. 잡지사 부록으로 발간된 선생의 ‘당선작품’을 정신없이 읽고 도서관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사방이 캄캄한 밤이었다.

그날 밤하늘에 총총 떠있던 별들이 눈에 선하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지만 ‘한권의 소설’을 읽고 뿌듯한 성취감을 느꼈었다. 그 감정은 ‘행복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앞으로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의 ‘나침반처럼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평소 막연히 ‘나도 글을 써야지’했던 마음의 여린심지가 ‘잘 쓴 소설’ 한편을 읽고 더 단단해졌다고나 할까. 그날 어둠속의 교정(校庭)과 우리를 지켜주던 혜화나무 그림자가 선생의 부음과 함께 선명한 스크린처럼 내 마음에 다시 다가왔다. 추억이라는 이름과 함께.

아마 박완서 선생만큼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 여성작가도 드물 것이다. 아니 문단 전체를 통틀어 그는 후배들의 ‘귀감’이 되는 ‘작가적 삶’의 ‘종결자’였다고 할 수 있다.

 

지난해 작가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며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閉)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줬다”고 글쓰기의 행복을 전했다.

 

“늙어 보인다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고, 누가 나를 젊게 봐준 날은 온종일 기분이 좋은 평범한 늙은이지만 글에서만은 나잇값을 떳떳하게 하고 싶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소설집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친절한 복희씨’, 산문집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호미’ 등을 남겼다. 이상문학상(1981), 현대문학상(1993), 대산문학상(1997), 황순원문학상(2001), 호암상 예술상(2006) 등을 받았다. 1998년에는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자리를 빌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예전에 졸저<한국의 1/2을 만드는 여성들>에 실었던 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 작가의 꿈 이룬 박완서

 

작가 박완서 씨 하면 우선 ‘나목(裸木)’이라는 처녀작이 떠오른다. 그가 1남4녀를 어느 정도 키워놓고 1970년 가족들 몰래 숨어서 쓰다시피한 이 장편소설이 한 여성잡지의 소설 공모에 당당히 당선되면서 그는 20여년간 키워오던 작가에의 꿈을 현실화했다. 그 이후 봇물터지듯 막힘없이 내놓은 ‘주옥’같은 소설들로 그는 어느덧 우리 문단의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 때 문학에 뜻을 두었던 친구들은 이 부록 소설의 겉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서로 돌려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여고생들의 감상주의에 어필한 그런 작품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 책을 아주 심각한 기분으로 읽고 열심히 토론도 했었다.

 

 ‘나목’의 작품 배경은 1,4 후퇴를 막 거치고 수복된 서울의 미8군PX. 초상화를 그려주는 가게의 경리로 취직한 스무 살짜리 경아와 황량한 겨울나무(나목)만을 그려온 중년의 무명화가 옥희도와의 애틋한 러브스토리가 줄거리이다. 물론 6,25전쟁 와중의 참담한 사회현실 속에서 피어오른 낭만적인 플라토닉 러브스토리가 어린 학생들의 감수성에 먹혀들었던 점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기억으론 작품 전개가 너무도 박진감 있고 안타까워 어린 우리들의 기호에 맞았던 것도 같다.

 

20여년 전 읽었던 소설 내용을 일일이 기억해내는 것을 무리지만 그 책을 학교 도서관에서 다 읽고 밖으로 나오는데 겨울밤의 푸른 달이 몹시도 아름다웠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고교시절 흠뻑 빠졌던 ‘나목’의 작가를 초대면한 것은 회사일로 그의 자택을 찾아가면서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소프라노톤으로 부드럽고 자상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자마자 나는 ‘나목’을 읽었던 학생시절 추억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 후 그와는 여러 번 만났다. 항상 변함없이 다정한 웃음으로 대해주셨다.

 

당대 최고 작가였지만 수더분하고 겸손한 표정이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그를 본다면 그냥 ‘편안한 이웃 아주머니’로 알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와 몇 분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과 그의 논리 정연한 말솜씨에서 역시 작가적인 분위기를 쉽게 감지해낼 수 있다.

 

1992년 대선 때 나는 한 후보자의 따님의 부탁으로 그와 함께 박선생의 자택을 방문한 일이 있다. 학교 선배인 그는 박완서씨를 뵙고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 혼자 가기가 좀 껄끄러우니까 동행하자고 해서 간 것이다.

내가 먼저 작가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선배는 약속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나타나질 않아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대체로 작가들은 예민한 사람들인데 화를 내시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 작가는 나의 그런 마음을 읽으셨던가보다. “요 근처 다른 동네에도 같은 이름의 아파트가 있는데 아마 그곳으로 착각하시나보죠. 곧 올 겁니다”라며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선배는 그의 말대로 다른 동네의 같은 이름의 아파트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간신히 나타났다. 선배가 대선에 출마한 부친의 정치노선을 설명하자 작가는 자신의 후보관을 차근차근 말했다. 물론 두 사람의 토론 결과는 해피엔딩이었다.

작가의 집을 나오면서 선배 역시 대단하신 분이라며 흡족해 했다. 나는 비밀선거 원칙에 입각해 작가가 대선 때 누구를 찍으셨는지 묻지 않았지만 그날의 ‘회담(?)’결과로 볼 때 작가는 선배의 부친을 지지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박완서씨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교육열이 대단한 모친과 함께 서울 서대문의 현저동으로 이사온 후 당시 명문 초등학교인 미동초등을 나왔다. 그의 자전적 기록을 보면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던 풍경이나 모친의 열성적인 교육열이 눈 앞에 바로 보이는 듯 그려져 있다.

 

숙명여고를 졸업한 뒤 1950년 서울대 국문학과에 여고 동창생인 한말숙(소설가)씨와 함께 입학했으나 곧이어 터진 6,25로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는 ‘나목’의 경아와 마찬가지로 미군부대에서 경리일을 했다. 뒷날 작고한 후 일약 유명해진 화가 박수근씨도 그와 함께 같은 부대에서 일했다. ‘나목’은 작가가 처음엔 논픽션 부문에 응모를 계획했을 정도로 그의 현실 체험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주부로 사림재미에 빠져있던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이 늦깎이 주부작가는 맹렬한 기세로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해 문단을 놀라게 했다. 그것도 통속 소설류가 아닌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는 작품을 쉬지 않고 내놓은 작가는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1981년 작가는 가족사를 거의 사실적으로 묘사한 ‘엄마의 말뚝’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에도 주로 사회성이 강한 문제작들을 꾸준히 집필했다. 90년에는 ‘그대 아직 꿈꾸고 있는가’라는 작품으로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최대의 문제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여성문제를 정면으로 그린 이 작품은 여성들은 물론 남성독자들에게도 많이 읽힌 작품이기도 하다.

 

평론가 김윤식씨는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병의 물을 거꾸로 쏟는 듯이 유려하고 한 점 막힘이 없는 천의 무봉의 작가다.”

 

그는 1988년 남편과 외아들을 몇 달 간격으로 사별하는 쓰라린 체험을 겪었다. 그가 이런 엄청난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지 주위 사람들은 많이 걱정했지만 그는 신앙으 힘으로 다시 일어나 그 이후에도 굳건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당시의 처절한 심정으로 토대로 한 작품집 ‘한 말씀만 하소서’도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올렸다.

 

이제는 여지없이 할머니 작가가 된 그는 1993년에도 젊은 감각의 소설이라는 평을 들은 ‘티타임의 모녀’라는 작품으로 후배문인들의 사리를 떨어뜨릴 정도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