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그 삶의 궤적-"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왔다"
‘천재는 요절하는가.’ 한동안 잊고 있던 이런 고전적 멘트가 생각난다. ‘전설적인 천재’ 스티브잡스가 10월 5일(현지시각) 췌장암 투병 끝에 영면(永眠)에 들어갔다.
21세기 첨단 의학으로도 그의 생명선을 지상에 붙들어 놓지 못한 것이다. ‘요절한 천재’ 중 스티브 잡스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요즘엔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21세기 세상은 ‘로망’이 사라진 시대인 듯하다.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시대를 창시한 ‘현대문명의 창시자’중의 한 사람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77년 애플컴퓨터Ⅱ로 PC시대를 열어젖혀 전 세계에 ‘신천지’를 선보였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첨단 문명’의 세계에 아폴로 우주인처럼 첫 발을 내딘 잡스 덕분에 20세기 후반이후 지금까지 인류는 엄청난 과학적 발전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컴퓨터 시대’를 창조한 후 30여년 만에 다시 태블릿PC 아이패드를 내놓음으로써 잡스는 PC시대를 접고 포스트PC를 주도해 지구의 IT역사를 또 다시 개척하고 주도했다.
그런 와중에 정작 자신의 몸에 똬리를 튼 ‘병마’의 침투엔 속수무책이었다.
지난 2월 오바마대통령의 초대를 받아 백악관에서 ‘젊은 인재’들과 함께 식사를 하던 스티브잡스의 왠지 휑한 느낌의 뒷모습과 앙상한 팔목을 보면서 이 지상에서 그가 누릴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TV화면을 통해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쇠잔해진 모습이었지만 잡스는 의연함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애쓰는 듯했다.
그는 그래도 그 뒤 특유의 검은 터틀넥셔츠와 청바지차림으로 ‘마지막 프리젠테이션’을 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보기에 안쓰러웠다. 생판 모르는 타인이 이런 감회를 느낄 정도니 잡스 본인이야 오죽했을까. 선불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사람이니까 ‘생사를 초월한 어떤 경지’를 애써 터득하려하지 않았을까도 싶다.
스티브 잡스는 195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의 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1주일 후에, 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에 사는 폴/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잡스를 입양한 부부는 그에게 스티브 폴 잡스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를 낳은 부모는 나중에 정식 결혼
해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을 낳았다, 여동생은 훗날 소설가가 되었다. 이 남매는 성인이 될 때까지 만
나지 못하다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는 자신을 키워준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유
일한 부모로 여겼다.
작년 쯤 잡스의 생부가 매스컴에 오르내린 적이 있다. 80세의 잡스 부친은 한 눈에도 스티브 잡스와 쏙
닮았다. 시리아인 분위기를 여전히 갖고 있는 이 노인은 잡스를 생전에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아들
에게 이메일을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이 들 부자(父子)의 해후는 영원한 미완의
장으로 넘어갔다. 인생의 무정함이 느껴지는 대목이 다. 아마도 스티브 잡스는 자신을 ‘버린’ 친부모에 대
한 ‘원망의 감정’을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무렵에도 삭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이라는 가정법은 하나마나한 얘기지만 인류의 문명 발전에 크게 공헌한 스티브 잡스가 만약 그대로
학생커플인 친부모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면 과연 오늘날 잡스가 이뤄낸 그 눈부신 업적은 가능했을까?
'천재'는 타고난 것이니까 다른 분야에서라도 두각을 나타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한눈에 봐도 엄청 까탈스럽고 승부근성이 매우 강해 보이는 스티브잡스는 2005년 6월 스탠퍼드대학 졸
업식장에서 한 명연설 덕분에 거의 ‘그루’에 가까운 반열에 올랐다.
“사실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로 시작한 스티브 잡스의 이날 연설은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과 친부모에 대한 이야기, 길어야 6개월 시한부라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이후 생사관에 대해 그 나름의 깊은 ‘성찰’을 담고 있어 전 세계인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스티브 잡스의 생모는 갓난아기를 입양시키면서 양부모가 반드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였다고 한다. 생모의 간절한 바람으로 원래는 변호사부부에게 입양되기로 했지만 그 부부는 ‘딸’을 원해 결국은 지금의 양부모가 잡스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양부모는 고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생모는 입양 동의서를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
양부모가 어린아기를 반드시 대학공부까지 시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아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생모의 이런 ‘교육열’은 어쩌면 스티브 잡스의 ‘운명’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에 그토록 열렬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양식으로 말하자면 ‘태몽’을 기가 막히게 꾼 생모는 이 아기가 반드시 큰 인물이 된다는 어떤 ‘확신’을 나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잡스는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양부모의 지극한 사랑 덕분에 대학에 진학하지만 결국 6개월만에 자퇴하고 만다. “ 대학에서 신통하게 배울 게 없었다”고 잡스는 말한다. 하지만 ‘비싼 대학 등록금’도 잡스를 자퇴하게 만든 한 요인이었다. 넉넉지 않은 양부모에게 ‘학비부담’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라는 자기 암시 속에 과감히 학교를 그만 뒀다고 말했다. 35년 전 이미 그는 '超 긍정의 힘'을 스스로 터득했던 것이다.
잡스는 연설문에서 자신이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5센트짜리 콜라병을 팔아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일요일이면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을 걸어 하레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정말 맛있다”고 회고했다.
스티브 잡스는 훗날 매킨토시로 빅히트를 쳤을 때 그 ‘자양분’은 바로 젊은 날 그가 학교를 중퇴하고 ‘도강(盜講)’하면서 배운 서체 교육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다닌 리드칼리지는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 기관이었다.
“그때 저는 세리프와 산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글자체의 요소인지에 대해 배웠습니다.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는 아름답고, 유서 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어서 전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이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 번 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PC에는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기회는 행운처럼 찾아온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다. 잡스의 말대로 그가 대학을 ‘자퇴’하고 ‘듣고 싶은 과목’만 몰래 듣지 않았더라면 최첨단 ‘컴퓨터 시대’의 발전을 위한 요소는 어디서 구했을까. 어쩌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저 인간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라는 ’운명론‘적 귀결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살아온 길을 소개하면서 스탠퍼드 졸업생들에게 이런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진정성’이 있기에 듣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대목이다.
“여러분들은 현재가 미래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등 그 무엇이든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을 따라 살아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차이를 빚어냅니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은 ‘운 좋게’ 자기가 진정 하고 싶어하는 일을 일찌기 스무 살 때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후 애플을 창업하고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는 ‘극적인 사건’을 체험하면서 그는 다시 한번 자기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재차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졸업생들에게 “인생이 배신하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를 계속 움직이게 했던 힘은 제 일을 사랑하는 것 뿐이었습니다.”고 고백했다.
애플에서 해고당했다는 건 인생 최악의 사건이었지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그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에 감사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성공이란 중압감 대신 찾아온 초심자의 가벼움, 불확실성,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수 있게 됐습니다.”
2004년 스티브 잡스는 평소 어디 있는 지도 몰랐던 췌장에 암이 생겨 길어야 6개월정도 살수 있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아마 그가 열정을 쏟아 부은 애플 사 일이 그에게 엄청 스트레스를 준 것같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그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 동안 해줄 것을 단 몇달 안에 다 해내야 된다는 말이었고 가족들이 임종할 때 쉬워지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저는 수술을 받았고 감사하게도 지금은 완치되었습니다. 그때 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 년간은 그렇게 가지 않길 바랍니다.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들 조차도 죽어서까지 가고 싶어하진 않죠.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죽음은 삶을 대신하여 변화를 만듭니다.”
스티브 잡스는 17세 때 “매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의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경구와 만나게 된다. 그 이후로 그는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다.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며칠 연속 ‘No’라는 답을 얻을 때마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곧 죽는다’는 생각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마다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잡스는 늘 ‘죽음’이라는 떨쳐내기 어려운 ‘운명의 덫’을 의식하면서 하루하루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날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한 순간이라도 허투루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잡스는 올해 초 병가를 낸 데 이어 지난 8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까지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병세’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꼈다고 한다. 그만큼 생에 대한 의지가 간절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는 2009년 간이식 수술까지 받는 등 애플의 혁신을 주도하면서도 개인적으로는 치열한 긴 투병생활을 했으나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 자신은 물론 가족과 그의 ‘천재’의 덕을 본 21세기 컴퓨터 사용자들에겐 한없이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Stay Hungry Stay Foolish” (‘헝그리 정신으로 계속 갈망하라 ! 우직하게’)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대 졸업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명언으로 꼽히고 있다. 한때 동양사상에 심취했던 스티브잡스의 이 말은 우리 어르신들이 우리에게 늘 말해줬던 ‘한 우물을 파라, 미련스럽게“라는 말과 정서적으로 코드가 일치하는 것 같다.
이제 스티브 잡스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토록 간절히 염원한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해온 인생’이었다는 점에서 그는 행복한 사나이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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