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총리 후보로 지명 받은 후 이 나라는 더욱 극심한 대립과 분열 속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대통령께서 앞으로 국정운영을 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이도 그분이시고 저를 거두어 들일 수 있는 분도 그분이십니다. 저는 박근혜 대통령님을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사퇴하는 것이 박 대통령을 도와드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저는 오늘 총리 후보를 자진사퇴합니다.">
이런 비장한 사퇴의 변을 끝으로 문창극 총리지명자는 어제 드디어 '권력의 끈'을 놓아버렸다. 어쩌면 시원하고 어쩌면 몹시 비통할 지도 모르겠다. 왜 아니겠는가. '1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 벼슬을 '타의'에 의해 던져버려야만 하는 상황이 누군들 유쾌하겠는가 말이다.
지난 6월 10일 청와대 대변인이 낭랑한 목소리로 신임총리지명자가 국가개조와 개혁을 위한 적임자라며 문창극씨를 소개한 이후 14일만에 막을 내린 이번 '문창극 지명자 자진사퇴 소동'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정치쇼'였다. 적임자여서 뽑았다가 불과 2주만에 '낙마'하는 걸 지켜본 청와대와 대통령은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 국민에게 설명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TV뉴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쉬운 평범한 국민들은 KBS 9시 뉴스가 전한 '문창극 강연'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그 시간 이후 대한민국은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문창극은 절대 총리가 되면 안된다는 '마녀사냥식'광기에 휩싸이게 됐다. 그게 이번 '문창극 소동'의 시작이었다. 빛보다 빠른 인터넷망을 통해 온갖 '문창극 죽이기'뉴스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래도 문창극씨는 꿋꿋하게 잘 버텨냈다.
그런 그를 보면서 저 사람이야말로 박근혜 대통령이 모처럼 잘 뽑은 '남자다운 인사'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보통사람들 같으면 악다구니로 쏟아지는 비방 보도에 저렇게 당당하게 버텨내긴 어려운 법 아니겠는가말이다.
시중에선 박대통령이 취임 이후 15개월동안 임명한 김용준 정홍원 안대희 문창극 등 4명의 총리후보자 가운데 문창극 후보가 그 중 제일 나았다는 얘기가 많이 떠돌고 있다. 문창극 강연을 본 사람들은 그의 '깊은 신앙심'이야말로 정직한 국정운영에 큰 도움이 될 거 같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창극을 뽑아놓았던 대통령은 그릇된 보도를 보고 '오도된 여론'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다. 문창극을 총리로 지명해놓고는 국회에 청문요청서를 보내지도 않은채 중앙아시아로 휙 해외순방을 떠나버렸다. 그러고선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귀국후 재가를 검토하겠다는 희한한 화법으로 국민과 문창극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종편TV를 비롯 온갖 매스컴에선 대통령의 이 말 한마디를 놓고 하루종일 갑론을박해댔다.
그 와중에 MBC에서 문제의 발단이 된 '문창극 장로'의 강연 동영상을 거의 풀로 틀어주는 이례적인 특집을 내놓았다. 나도 그 풀동영상을 보고는 KBS 보도가 '악마적 편집'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대사인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가 "문창극 강연에 감동받았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다. 만약 그가 총리청문회에 서지도 못한다면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는 친문창극 발언을 하면서 이른바 '애국 보수진영'인사들이 총집결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대한민국 국무총리후보를 놓고 이렇게 시끄러웠던 건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 밤 이후 '여론'은 슬슬 문창극편으로 바뀌는 듯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귀국후에도 하루 이틀 미루기 작전으로 국회에 청문회 요청재가를 하지 않았다. 이런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서 보수쪽에선 난리가 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마음이 이미 문창극카드를 버리기로 했는데 누가 그걸 말리겠는가 말이다.
결국 대통령이 귀국한 지 사흘 째 되는 날 문창극은 '자진사퇴'기자회견을 열고 국회와 언론에 분노를 쏟아내면서 자진사퇴 성명서를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온갖 매스컴에선 '문창극 자진사퇴'에 대한 보도를 하루 종일 내보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이 '자진(自進)'이라는 용어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남의 시킴 없이 스스로 나섬'이라는 해설이 나온다. 과연 문창극이 '자진사퇴'했을까? 그의 회견문을 들어보거나 그 이전 13일동안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언행으로 볼 때 그는 전혀 '자진사퇴'할 마음이 없었던 사람이다. 아마 지금도 문창극씨는 자신의 '자진사퇴'를 억울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웬만큼 상식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 그는 절대 '자진사퇴'한 게 아니라는 데 동의할 것이다. 문창극씨는 '보이지 않는 큰손'에 의해 강제 사퇴당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라고 본다.
문창극씨의 자진사퇴회견이 끝나자마자 청와대 대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의 말씀'을 발표했는데 이게 또 완전 코미디처럼 다가왔다.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이런 '이상한 심경'을 전해들은 수많은 '보수 네티즌'들은 대통령을 직설적으로 비난하는 '심한 말'을 쏟아내고 있다. 보기 민망할 정도로 그들은 대통령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던져버린 것 같다.
대통령은 문창극씨의 사퇴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검증을 해서 국민들의 판단을 받기 위해서인데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 앞으로는 부디 청문회에서 잘못 알려진 사안들에 대해서는 소명의 기회를 줘 개인과 가족이 불명예와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지 않도록 했으면 한다 "고. 얼핏 들으면 참 그럴싸하다.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보면 대통령의 이런 '심경토로'가 너무도 이상하다는 걸 상식인들은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알려진대로 박대통령은 14일전 문창극을 총리후보로 세워놓고 국회에 임명동의안 요청을 위한 '재가'를 하지 않고 질질 끌어왔다. 이건 누가봐도 확실한 진실이다. 재가를 '못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선 더 따져봐야겠지만 대통령은 문창극을 국무총리 자리에 앉힐 '굳은 의지'가 별로 없었던 걸로 보인다. 어쩌면 '강직한 문창극'에 피로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문창극을 청문회에 보낼 '권한'은 바로 대통령 자신에게 있는데 그 '최고 권력'을 사용하길 꺼려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놓고는 " 인사청문회까지 가지 못해서 참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는 건 일반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그래서 시중에선 '유체이탈화법'이라고 말하는 박대통령의 '묘한 화법'이었다고 본다 . 대통령 자신이 뽑아놓은 국무총리를 대통령 자신이 재가해야만 열 수 있는 청문회에 보내지 않아놓고는 남탓하듯 안타까워한다는 건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법과 원칙과 제도'를 잘 지켜야 한다고 평소에 그리도 주장해왔던 박대통령은 이번에 왜 문창극 총리지명자의 청문회 요청을 재가하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행여 문창극 지명 이후 급격히 떨어진 대통령의 지지율을 만회하기 위해 '문창극 카드'를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런 대통령의 행태에 대해 언론인 조갑제는 "청문회라는 민주적 문제해결절차가 있는데도 자신의 인기관리를 위해 문창극씨를 자진사퇴형식의 속임수로 희생시키는 것은 비정상적 대통령제 운영방식이다. 자신이 비정상인데 누구를 정상화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독설을 날리고 있다. 비단 조갑제뿐 아니라 보수진영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박근혜는 끝났다'라는 험한 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의 대체적 주장은 대통령이 너무 자신의 인기만을 따지다 보니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거다.
야당은 야당대로 대통령을 향해 비난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자칫하면 야당 탓에 청문회를 못 열었다는 덤터기를 쓸 것이 두려워선지 야당대표 김한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학시험에 원서조차 내지 않은 사람이 시험이 어려워서 잘 못봤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고. 그러니까 '문창극 청문회'가 열리지 않은 건 전적으로 박대통령 탓이라는 얘기다.
결국 '문창극 청문회'가 열리지 못한 건 박근혜 대통령 탓이라는 게 중론인 듯하다. 대통령이 판단력이나
추진력을 비롯한 '대통령 리더십'이 약한 탓에 뚝심있게 정국을 이끌어나가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어떤 사태가 발생하면 거의 언제나 자신은 한 단계 위에 서서 심판관 역할이나 하려고 하는 대통령의 '평소 스타일'이 정국을 혼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우스운 건 문창극 사퇴회견이 끝나기가 무섭게 청와대에선 '대기중'이던 국정원장을 비롯한 7명의 장관후보자에 대한 청문회 요청을 국회에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문창극씨가 물러나는 걸 보자마자 바로 '재가'의 권한을 행사했다는 얘기다.
이러니 문창극이 '자진사퇴'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이번 문창극 사태로 인해 대통령의 지지율은 더 추락할 것으로 보인다. 모두 자업자득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정국은 더 혼미한 상황에 빠질 것 같아 걱정스럽다. 이번에 박대통령이 문창극씨를 그런 식으로 '버렸다'는 건 대통령 본인에게도 그리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시중에선 '대통령이 소탐대실(小貪大失)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는 걸 대통령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