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읽을 거리

자신의 누드를 책 표지에 실은 유미리-시사 이슈 제치고 스카이뷰 게시글 2위 차지

스카이뷰2 2016. 2. 16. 19:20




하루 평균 3천~4천 명의 적잖은 네티즌이 방문하고 있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저로선 매일매일 다음측에서 제가 쓴 글 중 게시글 베스트 10 목록을 보내주는 것에 상당히 신경을 씁니다. 말하자면 방송사 PD들이 그 전날 방영한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매일 아침마다 방송국 복도 게시판에 대자보처럼 붙여 놓은 걸 보면서 일희 일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 방송사와 일개 개인 블로그와는 태평양과 동네 시냇물 정도로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서도

저로선 블로그 관리에 상당량의 시간을 쏟고 있는 입장이라서 그 방송사 PD들 못지 않게 블로그 게시글 순위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생기지 않는 일이어서 더 애틋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제(15일) 제 블로그 게시글 베스트 10 중 베스트 5의 목록은 이렇습니다. 1위는 개성공단 폐쇄로 누구보다 신경 많이 쓴 탓인지 입술과 인중까지 부풀어 오른 통일부 장관 홍용표에 대해 쓴 글입니다. http://blog.daum.net/skyview999/15972463 


3위는 정윤회-흘러간 미남 배우 스타일로 당당함을 과시했다는 제목의 글입니다. 이 글은 2014년 12월에 쓴 글인데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게시글 베스트 10에 뽑히는 '저력'을 과시해왔습니다. 밤의 비서실장이라는 정윤회와  대통령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얘기겠지요. http://blog.daum.net/skyview999/15972272 





 4위는 최근 연세대측으로부터 짤린 황상민 교수에 대한 글로 연세대 정교수 신분임에도 저렇게 단칼에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에 네티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http://blog.daum.net/skyview999/15972462 




 5위는 김종인 민주당 대표가 안철수에 대해 정직하지 못하다고 일갈한 글 입니다.  http://blog.daum.net/skyview999/15972461 77세 노익장을 과시하는 김종인 민주당 대표에 대한 독자들이 흥미를 느꼈던 듯합니다.


위의 네 꼭지 글은 모두 요즘 소위 '핫 이슈'로 검색어 상위권을 차지하는 글들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시사성이 강한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2위를  차지한 글이 아주 뜻밖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오래전 쓴글이 2위에 선정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8년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썼던 글인데요, 재일동포 여류작가 유미리가 자신의 책 표지에 자신의 누드 사진을 실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네티즌들이 방문했는지 조사해보니 이유는 엉뚱한데 있었습니다. 어제(월요일) KBS가요무대 시간에 대학가요제 출신 유미리라는 가수가 출연했던 게 원인이었습니다. 동명이인인 이 여류작가 유미리에 대해 제가 쓴 글까지 덩달아 클릭수가 늘어난 겁니다. 


보통 게시글 베스트 10 목록엔 거의 매일 시사 핫 이슈를 다룬 글들이 선정됐었는데 기억조차 못하고 있던 옛날에 쓴 글이 2위를 차지했길래 제가 쓴 거지만 클릭해서 다시 읽어봤습니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뭉클한 감상이 일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래서 더 대견스러운  젊은, 아니 이제는 중년이 된 이 여성작가에 대한 글을 다시한번 소개해드립니다. 좀 길지만 읽어보세요.    



자신의 누드를 자신의 책 표지에 실은 유미리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적은 없지만 건방지게도 어린 시절부터 늘 작가의식에 젖어 살아온 저로선 언제나 작가들이 관심의 주요 대상입니다. 영어로는  would be-author라고 하나요?

아무튼 초등생시절부터 저는 스스로를 작가로 여기고(남이야 전혀 알아주지 않는), 문학 동네 쪽 이야기에 대해선 동서고금 청탁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관심을 두어왔습니다. 집안의 분위기도 꽤 문학적이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초등(제가 다닐 땐 국민 학교) 5학년 때 일본의 여류 작가 미우라 아야코라는 분이 일본에서 제일 큰 신문사의 장편소설 모집에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선친으로부터 전해 듣고 몹시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초등 5년생중  이런 뉴스를 알고 있던 아이는 아마 몇명 안될걸요. 지금 생각해도 저의 알량한 프라이드를 높여주었던 이야기죠. 전 겨우 5학년짜리였지만 당시 동아일보의 '횡설수설' 칼럼을 매일 읽고 있던 아주 '지적인 꼬마'였죠.^^


더구나 그 분이 40세도 넘은 나이에, 소설을 처음 써서 당시로선 엄청난 원고료를 받았었다는 대목은 듣고 또 들어도 싫증나지 않았습니다. 그 전후로 동아일보에 연재소설을 썼던 ‘속솔이뜸의 댕이’의 이규희라는 여성 작가나 ‘D데이의 병촌’을 연재했던 홍성원 선생님의 존재도 알았습니다. 나중에 세월이 아주 많이 흐른 뒤 어느 날 교보문고에서 우연히 홍성원 선생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쉽게도 선생님은 그 얼마후 타계하셨지요.


셰익스피어나 스탕달 카뮈 헤르만 헷세 도스토옙스키 오스카 와일드와 한국 문단에 불을 질렀다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존재 김승옥의 작품들도 중학 1학년 언저리에 모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의 백치는 중학교 체육실 후미진 구석에서 몰입해 읽으며 행복해하기도 했습니다. 암튼 이런 문학서적 편력은 모두 저의 부모님들의 막강한 영향 덕분이지요.


어릴 땐 ‘꼬마 문사’로 우리 동네와 제가 다니던 학교에선 꽤 유명세를 타기도 했습니다. 제 자랑이지만 초등 5년에 썼던 ‘아기 단풍나무와 나’라는 산문은 영역돼 ‘국제 어린이 산문대회’에 출품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자질구레한 편력 덕인지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고 나면 마치 제가 쓴 것처럼 흐뭇해하기도 하는 등 ‘증세’가 좀 중증이었지요.^^


대학에 들어가선 첨으로 써본 단편소설이 교내 대회에서 덜컥 ‘당선’되는 바람에 저의 오만은 끝을 모를 정도로 발칙했었지요. 그때 상금이 사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어서 거의 신춘문예 상금과 맞먹을 정도의 거금이었기에 저는 아주 의기양양해 했습니다. 속된 말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시절’이었지요.^


교수님들의 칭찬에 한껏 부풀어 자신이 무슨 작가라도 되는 양 건방을 떨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웬만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선 신랄한 비평을 해대는 게 취미생활일 정도였죠. 그들이 그 작품을 쓰느라 얼마나 노고를 받쳤나는 전혀 고려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별것도 아닌, 제 취향에 제 맘에 드느냐 아니냐로 냉정하게 ‘점수’를 매기고 미달점수를 받은 작가들은 가차 없이 외면할 정도로 기고만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은 무슨 대단한 작가 반열에 든 사람인양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한때는 거의 모든 대한민국 문청(文靑)들의 ‘꿈의 등용문’인 신춘문예에 곧 당선될 거라는 ‘행복한 착각’속에 겨울만 되면 문학열병을 앓기도 했습니다. 이 열병은 졸업 직전 고단한 ‘샐러리맨’이 되면서 서서히 막을 내렸습니다. 직장생활이 만만치 않은 건 해보신 분은 다 아실 겁니다. 그걸  핑계 삼아

‘응모작’을 내미는 일 따위는 아주 외면해버렸지요.


그래도 직업상 문인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끊임없이 관심의 안테나는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내로라하는 문인들은 거의 다 만나봤습니다.


그들 중에 제 기억에 첫 번째로 남는 분은 작고하신 이병주선생님이시구요, 생존 작가로는 오정희· 윤후명 선생님을 꼽고 싶습니다. 이병주 선생님은 당시 작가로는 드물게 기사딸린 승용차를 타고 다니실 정도로 인세를 많이 받는 톱클래스 작가셨죠. 그분의 승용차를 함께 타고 광화문 저의 회사까지 갔던 기억이 생생한데요, 이 선생님도 1992년엔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당시 제가 ‘일’로써 만나 뵌 분들로 작가로서도 베스트에 들었지만 인간적으로도 매력을 느꼈던 분들입니다. 이분들에 대해선 나중에 자세히 우리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작가로서 그분들의 노력하는 자세를 직접 보고 들으면서 저의 ‘오만’은 꼬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삶의 편력 끝에 저는 이제 중년에 들어섰습니다만 여전히 문학인 행세(물론 저의 집 안방에서요^^)를 하면서 그 쪽 동네 작가들이나 시인들의 작품과 인생살이에 대해선 적잖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예전 젊은 시절보다는 많이 ‘너그러워져서’ 웬만한 작가들에 대해서도 비교적 후한 점수를 주기도 합니다. 아마 이래서 ‘나이의 덕’이란 말이 나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서론이 길어진 것은 어제 한 신문 토요 섹션에 재일교포 여성 작가유미리에 대해 와이드 인터뷰가 실린 걸 보고, 그녀에 대해 한마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柳美里不幸全記錄’이라는 자전 일기형식의 책을 내면서 표지에 자신의 누드를 과감하게 실은 유미리가 좀 안쓰럽게 여겨졌습니다. 유미리라는 존재는 1997년 29세 그녀가 일본의 신진작가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권위 있는 문학상이라는 ‘아쿠타가와 상(芥川賞)’을 수상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이 ‘아쿠타가와 상’에 대해선 또 할 말이 참 많습니다만 간단한 이야기만 몇가지 하겠습니다.

‘아쿠타가와 상’을 알게 된 것도 물론 선친께 들어서 알았습니다만 제 스스로 그 상을 받은 사람의 작품을 처음 알고 읽게 된 작가는 바로 재일교포 미남 작가 이회성선생님이었습니다. 이젠 그분도 82세라는 만만찮은 인생의 연륜을 보유하셨습니다.^^*


아마 제가 고3인지 대학 1학년인지 가물가물합니다만, 신문에 그분이 상을 받게 되었다는 기사를 봤고 얼마 후 단편집이 번역되면서 읽고선 꽤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이다음에 이 분을 만나서 인터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지요.


결국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저는 일본 도쿄에 가서 이회성선생님을 만나는데 성공했고, 꽤 긴 인터뷰 기사를 당시 제가 근무하던 매체에 실었던 적이 있습니다. 거의 ‘꿈은 이루어진다’ 급(級)의 감동 실화라고나 할까요?^^ 이 이야기도 나중에 기회 닿으면 자세히 쓰고 싶습니다.


오늘은 ‘문제의 여류 작가 유미리’의 누드가 실린 책표지와 그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그 인터뷰가 실린 신문기사의 중간 제목은 이렇게 나옵니다.


“책 표지의 누드 사진은 망가진 30대를 상징..., 편집자의 아이디어죠”

“16세 때 가출, 23살 연상과 동거... 임신과 이별...”

“미혼모··· 재판··· 지난 5년은 알몸으로 싸워온 시간”

“글을 쓴다는 것은 상처를 입히는 과정”


이 제목들만 읽어도 벌써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물론 이성이 강하고 이지적인 스타일의 사람이라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연약한 한 여자의 ‘인생 스토리’라는 측면에서 보면 영 안쓰럽다는 기분이 듭니다.


유미리는 1968년생이니까 우리 나이론 올해  마흔 아홉이 된, 중년 여성입니다. 하지만 신문에 실린 사진의 그녀는 아직 20대로 보입니다. 긴 생머리를 풀어헤치고 고양이들과 함께 있거나 노트북 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 그녀는 영락없는 ‘문학소녀’ 필이 나는 아직은 청춘작가처럼 젊어 보입니다.


하기야 요즘은 누구라도 자기의 나이에서 ‘마이너스 20’을 한 모습으로 보여지고 또 대부분 그렇게들 살아간다는 시대니만큼 그녀가 젊어 보이는 건 전혀 이상한 건 아니겠죠. 더구나 그녀는 ‘미인형’의 외모여서 더더욱 젊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그녀의 인생고백 스타일의 ‘유미리불행전기록’이라는 책 표지에  노출된 그녀의 상반신사진은 일본에서도 적잖은 화젯거리였다고 합니다. 저는 이 표지사진을 보는 순간 유미리가 한없이 가엽게 느껴졌습니다. 그렇다고 값싼 동정은 아닙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인간적 고뇌, 작가로서의 수치심 같은 것들이 살포시 배어있는 듯한 누드사진에서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크나큰 회한을 갖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그녀는 ‘결손가정’출신입니다. 할아버지 시대에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 한국인 3세 출신의 그녀는 요코하마의 공업고교를 1학년까지만 다니고 가출, 그 다음엔 그런 소녀들이 걸어가는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한때 배우를 꿈꿔 극단에 입단한 그녀는 그곳에서 운명의 남자를 만납니다. 바로 23세 연상의 유부남. 가정에서 부정(父情)을 모른 채 성장한 그녀에게 그는 아빠이자, 연인이자, 스승이었습니다.

그녀의 험난한 인생길에 그래도 그 ‘연인’이 등대처럼 빛을 비춰줘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는 유미리가 ‘제 3의 남자’의 아기를 가졌을 때 출산을 강권하고 그 아기의 후견인으로 몇 달을 함께 지내다가 암으로 유명을 달리합니다. 그렇잖아도 시련의 연속이었던 그녀의 인생에서 거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던 그의 죽음 후 그녀는 더욱 험난한 인생 쓰나미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글을 써서 생활을 해나가야 하고, 여자 혼자 몸으로 아기를 키워내야 한다는 이중고(二重苦)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엄청나게 고통스런 일이라고 봅니다. 아마도 직접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감히 그 신산함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저 역시 그저 평범한 보통인생이다 보니 그녀의 ‘극적인 인생살이’에 대해선 그 고난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헤아리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그래도 ‘나잇살’이나 먹었기에 얼추 헤아려 볼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녀의 ‘누드표지사진’을 보는 순간 감상에 젖어들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일반적으론 아마 그녀의 그 ‘누드표지 책’을 보면서 ‘상업용’이라고 질타하는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유미리가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단 책을 써서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절박함’이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경지라고 봅니다. 그냥 일용노동직이 차라리 먹고 사는 덴 신간 편할 수 있으니까요. 글을 써서 책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일단 그 책이 서점에 나가 독자제위의 ‘간택’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전 이 지상의 모든 작가들을 존경합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아주 인기 있는 한 남성 작가는 자신이 무명시절 동네 책방에 자신의 책이 진열되자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아이가 책방에 온 사람들에게 “이건 우리 아빠가 쓰신 건데요 아주 재밌답니다. 한 권 사가세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는 기사를 일본잡지 문예춘추에서 그 딸아이의 사진과 함께 본 적이 있습니다.


이렇듯 생활은 엄숙한 것입니다. ‘먹고 살아가는 문제’가 바로 생활의 근간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 부지런히 글을 쓰고, 그걸 책으로 만들어 내다파는 건 바로 농부가 씨앗을 뿌리고 힘들게 추수해서 미곡시장에 내놓는 행위와 다름이 없는 거지요. 이 지상에 살아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런 노동의 과정을 거쳐야만 생을 유지해나갈 수 있겠지요. 

그러기에 생활은, 인생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닌 겁니다. 


이렇다 할 학연도 없고 집안 배경도 없는 여성이 더욱이 미혼모로 글을 써서 자신과 아이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건 눈물 날 정도로 엄숙하고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대에서 20대를 지나면서 두 번이나 자살기도를 한 유미리는 요즘도 종종 자살에의 유혹을 느낀다는 고백을 해서 더 뭉클하게 만들더군요.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사랑도 떠나고 일본이라는 타국 아닌 타국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완전히 자력으로 생존해나가야 한다는 것....


유미리는 한때 자신의 처녀작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대법원판결까지 받아 일본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문제적 작가’ 취급으로 몹시 괴로웠다는 고백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그 견디기 어려운 소송 기간과 판결이후 일본 사회로부터의 냉대 속에서 ‘막 살아왔다는 자괴감’까지 엄습해, 그녀는 생에 대한 의지를 거의 상실했다고도 합니다.

당시 그녀는 ‘싫어하는 작가 1순위’로 뽑힐 정도로 일본사회에서 거의 ‘집단 이지메’를 당할 정도의 곤경에 처했었다고 하는군요.


그러는 사이에 새 생명이 태어나고 그녀는 ‘생명’이라는 책까지 내면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독자들에게 고백합니다. 언젠가 그녀의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일본문화예술계에서 유미리라는 작가는 무시못할 존재인 듯합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냉소적 시각과 그녀 자신의 생에 대한 허무감 같은 것이 요즘도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다는군요.


현재 그녀는 15세나 젊은 남성과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반인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피하기 어려운 라이프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를 이해합니다.


그녀는 연하의 동거남에 대해 자신의 ‘열정적인 독자’출신으로 자신이 감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사람이기에 오래 같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이 안 통하는 문제’를 기자에게 토로했다는 대목에서 새삼 그녀가 안쓰러웠습니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 ‘말이 안 통한다’는 건 참 견뎌내기 어려운 일일 것 같네요.


하도 오래전 읽어서 그녀의 작품에 대해선 뭐라 평하기가 어렵지만, 그때 읽은 기억으론 ‘자전적 이야기’를 섬세한 필치로 그린 비교적 수작이라는 평가를 내렸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쿠타가와상을 받을 정도니까 제가 수작이란 평가를 내리기 전에 이미 일본 문단에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마흔아홉 살이 된 유미리가 자신의 ‘모든 불행’을 기록해낸 책에 자신의 누드를 표지사진으로 했다는 대목에서 ‘산다는 것’의 신산함을 깊이 느꼈던 하루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