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0일 새누리당에 입당한 조훈현9단(가운데, 다음 연합뉴스사진)
어제(13일) 이세돌9단이 '괘씸한 인공지능' 알파고를 시원하게 항복시킨 건 한국인은 물론 전세계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위대한 쾌거'였다. 아닌게아니라 만약 이세돌이 또 졌다면 한국인들은 집단적 '국민 우울증'에 걸릴뻔했다. 그만큼 이세돌의 승리는 우리 국민에게 크나큰 정서적 힐링을 선사했다고 본다.
이세돌 승리후 인터넷에선 총선을 앞두고 묘기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이런저런 뒷얘기로 국민을 피로하게 만들었던 정치권 인사들은 이세돌이 이룬 '위업'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본받아야한다는 네티즌들의 댓글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 정도로 국민은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행태에 짜증마저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와중에 대한민국 '바둑 황제'로 이세돌보다 꼭 30년을 더 살아온 조훈현 9단이 64세 나이에 새누리당에 입당해 4·13 총선 비례대표를 신청했다는 뉴스에 적잖은 네티즌들은 실망의 댓글들을 보내고 있다. 어쩌면 국민들은 바둑을 좋아하고 조훈현 9단을 아끼기에 그런 아쉬움을 표출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민심인 것이다. 예민한 A형 조훈현 9단이 천 개가 넘게 달린 이 '앤티 댓글'들을 보면 꽤나 놀랄 지도 모르겠다.
우스운 건 조 9단이 국회를 찾은 날이 공교롭게도 이세돌이 알파고로부터 패배를 당한 다음날이어선지 조 9단은 10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어제 이세돌 9단이 (알파고와의 대국에서)져서 충격적이다"고 운을 떼며 "바둑계를 위해서, 스포츠, 문화를 위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입당하게 됐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글쎄다. 만약 이세돌이 이겼더라면 조9단은 어떤 '입당사'를 준비했을까.
어쨌거나 조훈현 9단은 신 친박 실세로 떠올랐다는 새누리당 원내대표 원유철의 적극적 '입당 권유'로 비례대표 의원에 도전하는 만큼 '당선 상위권'에 배치돼 금뱃지를 달고 여의도 국회에 무난히 입성함으로써 바둑인으로선 최초의 '선량(選良)'이 된 기록을 세울 것 같다. 뒤늦은 나이에 정치계에 입문하게된 조훈현9단이 본인의 입당 소감처럼 바둑계를 위해서 과연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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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 글은 2009년 12월 조훈현 9단과 전화 인터뷰 한 뒤 우리 블로그에 쓴 것입니다.
조훈현 9단 전화 특별 인터뷰-일본 민주당 오자와 간사장과 대국
2009.12.14 BY SKYVIEW BLOG
대국에 집중하고 있는 일본 오자와 간사장과 조훈현 9단 (다음연합뉴스 사진)
아침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 덕분에 대한민국 바둑계의 ‘지존’ 조훈현 9단과 전화인터뷰를 했다. 조훈현 9단은 지난 12월 12일 오후 2시 서울 조선호텔에서 일본 정계의 최고 실력자라는 오자와 이치로 민주당 간사장과 대국했다.
이번 대국은 열렬한 바둑 팬인 오자와 간사장이 일본 기원을 통해 방한 기간 바둑을 둘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해 한국기원이 조훈현9단을 추천해 마련됐다. 4점 치수로 둔 이번 대국은 ‘접전’ 끝에 오자와 간사장이 245수만에 7집 차로 승리(!) 했다고 한다.
내 손바닥 크기의 ‘대국사진’은 아주 진지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바둑 팬인 나로선 모처럼 ‘흐뭇한 상상력’과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내용이었다.
정치와 바둑! 바둑과 인생! 이런 단어들이 뇌리를 스치자 신바람이 났다. 재밌지 않은가.
대한민국 최정상 바둑고수와 일본 정계 최고 실력자가 반상을 앞에 두고 진지한 ‘수담’을 나누고 있는 한 장의 사진에서 그야말로 ‘영감’을 얻은 나는 그 자리에서 조훈현 9단과 ‘전화 인터뷰’를 시도했다.
오전 11시 무렵 조9단은 집근처를 산보 중이었다. 정오 무렵 귀가한 그와 바둑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조훈현9단은 56세 중년남성답지 않게 아주 맑고 정갈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순수한 20대 청년 같았다. 조9단의 바둑 스타일이 고려청자처럼 고고하면서 단아한 ‘귀족적 분위기’로 평가받고 있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 역시 자신의 바둑스타일과 어딘지 비슷한 것 같다. ‘목소리는 마음’이라는 일본 속담이 떠올랐다.
50년 가까이 바둑 외길인생을 걸으며 ‘한국 바둑 최고 정상’에 도달했던 쟁쟁한 ‘바둑 황제’는 “지금도 바둑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라는 겸허한 소회를 말하기도 했다. 요즘 자신은 ‘승부’에서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중이라면서 ‘후배’들의 활약을 대견해 하는 뉘앙스의 말도 했다.
“이번 대국은 조 국수께서 살짝 져 드린 거 아닙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라며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나도 ‘대국의 진실’에 대한 심증은 확실하게 가지만 구체적 정황은 우리 독자여러분들의 ‘즐거운 상상’에 맡기겠다.^^*
조9단은 오자와 간사장의 인상에 대해 ‘장군감’ ‘보스 스타일’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바둑 스타일 역시 세력적이고 전투적이며 공격형이라고 소개했다.
조9단은 “바둑을 배운지 6년밖에 안됐다는데도 놀라울 정도로 잘 두시는 바둑 스타일이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꼬마들은 금방 늘지만 60대 후반 정도 연세에 그렇게 둔다는 것은 바둑에 소질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맥도 좋고, 행마가 상당합니다.” (오자와는 1942년생이다.)
대국을 마치고 조훈현9단은 이날 대국한 바둑판의 뒷면에 직접 글씨를 써서 오자와 간사장에게 전달했다. 한국기원에서는 공인 아마 6단증을 수여했다.
그는 “한국 제1의 프로 기사인 조훈현9단에게 바둑을 배워 감격스러웠다”는 답사를 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오자와 간사장은 청와대에서 이명박대통령과 만찬회동을 가졌다. 아마 낮에 둔 바둑 이야기도 화제에 올랐을 법하다.
아마추어 강6단이라는 오자와 간사장은 그날 대국장에서 기자들이 바둑과 정치의 닮은 점을 묻자 “바둑이나 정치나 넓게 보는 대세관이 중요하다. 오늘 바둑에서도 상수의 대마를 잡으러 가는 나쁜 버릇이 나와 바둑을 망칠 뻔했다. 고수인 상대를 인정했어야 했다. 정치 역시 상대를 인정하면서 넓게 봐야 한다는 면에서 바둑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원론적’인 말을 했다고 한다. 어쩌면 요즘 그가 보여주고 있는 ‘대외교관(對外交觀)’을 반영하는 듯하다.
조9단이 받은 인상처럼 오자와 간사장은 일본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쇼군(將軍)’스타일이다. 실제로 그는 일본에서 ‘암장군(暗將軍)’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막후 실력자라는 얘기다. 그런 그가 드라마에서처럼 바둑 두는 장면을 연출한 것은 흥미로워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오자와는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의 일왕(天皇·덴노) 면담을 무리하게 주선해 일본 궁내청의 반발을 샀다. 일본 3대 메이저 신문인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신문들도 일제히 “덴노를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쓸 정도로 강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오자와의 ‘정치적인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는 방한중에도 “사죄해야할 역사적 사실이 있다”고 말하는 등 ‘친한파’적인 면모도 과시했다.
그러니까 ‘오자와 바둑스타일’처럼 ‘대세’를 읽고 그에 따르려는 것이 그의 정치 스타일인 것 같다. 어쩌면 그의 정치는 바둑에서 ‘지혜’를 공급받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자신 ‘바둑’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하고 있다.
요즘 애시청하고 있는 NHK대하드라마 ‘아츠히메’에서도 여주인공 아츠히메는 주요한 정치적 이야기를 할 때 상대와 반상을 마주한 채 의견을 나누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바둑과 정치는 1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미지 면에서 상통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둑을 좋아한다. 바둑알 잡는 법도 잘모르는 주제건만 바둑에 관련된 이야기는 청탁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나 바둑대회에서 우승한 챔피언 이야기도 좋지만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던 패자들의 이야기에는 더 관심이 간다.
승자와 패자 모두 ‘품격 있게’ 이기고 졌다는 소식이라도 듣는 날이면 왠지 뿌듯한 마음마저 든다. 이런 바둑이야기는 우리네 인생에 넉넉한 여유를 선사해주는 것 같다.
바둑을 잘 둘 줄도 모르면서 좋아한다는 건 넌센스라고 할 분들도 있겠지만 공한번 차 본 일 없어도 축구를 좋아하고 알 한번 제대로 쥐어보지 않았지만 바둑 이야기는 무조건 좋아한다.
축구와 바둑은 무덤덤한 인생살이에 신선한 양념이라고나 할까? 언제 들어도, 언제 봐도 즐거운 것이 이 바둑과 축구다.
축구가 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뿜어대는 힘찬 야성미로 매료시킨다면 바둑은 19줄 날줄 씨줄 속에 숨어있다는 무수한 비기(秘技)와 광대무변한 우주와 같다는 반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바둑 명인들의 비장미 감도는 운명적 스토리가 나를 유혹한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바둑대첩’ 이야기 중 ‘라이벌과의 운명적 대국을 하던 명인이 마지막 돌을 던진 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마당으로 뛰쳐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비극적 스토리는 처음 듣는 순간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감동을 느꼈다. 요새도 가끔 그 얘기가 떠오르면 뭉클해지곤 한다.
그야말로 운명을 건 한판 승부에서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명인의 마지막 모습이 서늘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사람으로 태어나 목숨 걸고 매달리는 일이 있고, 그 일에 결국 목숨을 바친다는 건 왠지 비장하면서도 매력적인 장면처럼 보이는 것 같다.
작은 바둑판에서 펼쳐지는 혜성처럼 나타난 새로운 자객과 기존의 막강 무림고수들의 한판 필살기! 서로 몰래 연마해온 비법으로 서로의 칼끝을 겨누며 촌각을 다투는 사투를 벌인다는 자체가 어쩌면 우리네 인생살이의 축소판이지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잘 쓴 ‘바둑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마력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 바둑계의 지존으로 꼽히는 조훈현이나 그의 제자로 스승을 밟고 지나간 이창호, 그밖에 유창혁이나 이세돌 같은 거의 대중 스타급 바둑 명인들은 물론이고 별 알려지지 않은 프로바둑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일부러 찾아다니면서 즐겨 읽곤 한다.
그렇기에 오늘 아침신문에 나온 ‘조훈현VS 오자와’의 대국(對局)사진을 보는 순간 생면부지의 조훈현9단에게 전화를 걸어 단걸음에 인터뷰를 마쳤던 것이다. 그도 ‘기습적인 전화 인터뷰’에 잠시 놀랐을 것 같다. 이 자리를 빌어 귀한 시간을 내준 조훈현 9단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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