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용감한 형제 강동철.(mbc 사진)
2016년 '나혼자 산다'에 출연한 용감한 형제
지금 다음 검색어 1위에 '용감한 형제'가 올라와 있다. 어제 밤 한 TV의 '나혼자 산다'라는 프로에 출연한 용감한 형제의 럭셔리 라이프가 화제가 된 모양이다. 전망 좋은 펜트하우스에는 거실 주방이 각각 2개씩 있는데 서른일곱 먹은 이 뮤지션은 주부처럼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모습이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는 개인 전용 출입구,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 전용 영화관, 대형 피규어 등이 보여 용감한형제의 성공을 보여준다. 자신이 일 중독이라고 말한 용감한형제는 “제가 일의 한계에 몰아붙인다. 15년째 휴가를 가보지 못했다. 이 규모의 회사를 운영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 정산하는 날만 오면 머리에 쥐가 난다”고 '경영인의 고통'을 고백하고 있다.
*2011년 6월 용감한 형제는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당시 우리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용감한 형제, “내 인생에는 왜 이렇게 산이 많으냐”(2011,6,16)
어젯밤 우연히 아주 오랜만에 M-TV의 무릎팍 도사를 봤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아는 얼굴’이
게스트로 앉아 있는 걸 보고 채널을 고정했다. 얼마 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뮤지션’으로 소개된 완전 조폭 같은 바로 그 젊은 남자였다.
유희열이 ‘용감한 형제’라고 소개하자 무대 뒤에서 뛰어나오는 남자를 보는 순간, 잠시 놀랐다. 뮤지션과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조폭’이라는 명찰을 달고 나온 듯했다. 아주 오래 전 가수 싸이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조폭 분위기’보다 더 진한 조폭 모습이었다. 어쨌든 음악프로에서 ‘뮤지션’으로 대접받을 정도라면 어느 정도 클래스는 있겠지 싶어 채널 돌리지 않고 그냥 봤다.
그가 만든 곡이 화면에 소개되는데 희한하게도 요즘 꽤 인기가 높은 아이돌그룹들의 노래였다. 그렇게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달리 섬세하고 여린, 사춘기 소녀들 같은 감성적 가사와 곡을 ‘그 얼굴’로 만들었다는 게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그렇게 알게 된 그 용감한 형제가 자신의 신상 고민거리를 들고 강호동의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니 좀 재미있을 것 같아 채널을 고정했다. 고민은 "그 음악 니가 정말 만들었니'라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저 얼굴로?라는.
‘나조폭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처음 봤을 때보다는 조금 순화된 표정으로 용감한 형제는 자신의 10대 시절 방황했던 이야기를 툭툭 내뱉듯 털어놓았다. 말썽꾸러기 문제아였다. 야간인문계 고등학교에 적은 두고 있었지만 입학식도 안 갈 정도였다. 또래 애들은 그를 무서워해서 슬슬 피했다.
‘조폭 두목’이 꿈인 그로서는 학교는 재미없는 곳이었다. 그래도 모친이 입학식날 꽃다발을 들고 학교로 찾아오셨는데 아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는 얘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찡한 감정이었다고 한다. 제아무리 ‘불량 청소년’이라도 ‘어머니’라는 단어 앞에서는 약해지는 법인지 그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용감한 형제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순간 그가 그렇게도 섬세한 노랫말과 곡을 쓸 수 있는 건 그 ‘어머니’를 생각하는 눈물의 힘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명이 강동철이라는 이 용감한 형제는 본명이나 예명 모두 본인의 이미지와 딱 맞아 떨어지는 듯 보인다. 그야말로 1960년대 완전 ‘맨발의 청춘’스타일이다. 어딜 가나 '어깨'대접 받을 것 같다.
삐뚤어나가려는 아들을 다잡으려고 강동철의 부친은 엄한 매로 다스렸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더 ‘오기’가 생기고 ‘맷집’이 세졌다고 말했다.
결국 청소년 보호감찰대상으로 2년동안 소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암흑가와는 손을 씻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온 그에게 ‘인생 역전’의 대단한 전기(轉機)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동철의 친형 강흑철(본명이라는데 좀 특이하다)이 갖고 있던 음악 CD를 듣게 된 것이 오늘의 ‘용감한 형제’를 탄생시킨 근원이 된 것이다. 사이프레스 힐이라는 뮤지션의 갱스터랩을 처음 듣는 순간 그대로 ‘필’이 꽂혔다고 했다.
흔히 작가들이 ‘한권의 책’에서 영감을 받아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강동철 역시 ‘책’이 ‘음악 CD'로 대체되었을 뿐 꼭 같은 ’촉매제‘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그 곡의 마력은 대단했다. 나도 저런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이 처음으로 생겼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별 하고 싶은 게 없었고, 오직 주먹세계의 보스나 하려던 ‘문제아’의 눈앞에 푸르른 ‘신세계(新世界)’가 펼쳐진 것이다.
그날 이후 강동철은 하루 서너 시간만 자는 둥 마는 둥하면서 오로지 음악을 듣고 또 들으면서 서서히 음악의 세계로 빠져 들기 시작했다. 무작정 나도 그런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뜨거운 열정이 가슴속에서 용솟음쳤다. 그 누구도 그의 그런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음악에 최소한의 기초도 없는 상태였지만 듣고 또 들으면서 그야말로 ‘문리(文理)’가 트였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산’은 없는 법이다. 어떤 때는 이틀 사흘 잠도 안자면서 음악을 듣고 좋은 노래들을 카피해 가면서 마치 자신이 작곡한 것인양 즐거워하기도 했다.
어떤 유명 여류소설가도 초기 문학수업 시기에 당시 유명한 작가였던 오정희의 작품을 노트에 베끼곤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창작의 세계의 초기 단계는 어느 분야건 일단 대가의 작품을 ‘베끼면서’배워나가는 법인가 보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서 용감한 형제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음악의 선율로 표현해내는 과정이 반복됐다. 처음엔 ‘사회 불만’이 넘치는 랩을 마구 쏟아냈다. 집안에선 “쟤가 또 이상해졌네”라고 걱정했다. 동네에선 ‘소음’이 시끄럽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렇게 ‘신나면서도 혹독한’ 독학 과정을 거치면서 드디어 용감한 형제는 ‘창작곡’을 만들게 됐다.
6개월 동안 바깥출입은 한 번도 안 할 정도로 ‘몰입의 세계’가 주는 즐거움에 푹 빠져 살았다. 말 그대로 ‘미치면 미치리라’는 경지까지 들어선 것이다. ‘몰아(沒我)의 경지’에서 맛 볼 수 있는 엑스터시(ecstasy)는 그 순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용감한 형제는바로 그런 ‘몰아의 경지’에 도달한 끝에 오늘날 ‘인정받는 작곡가’의 대열에 오른 것이다.
당초 가수를 꿈꿨던 용감한 형제는 친형과 함께 음악 작업을 하고 데모 CD를 만들어, 2004년 당시 힙합 뮤지션들의 꿈이었던 YG엔터테인먼트에 보냈다. YG의 대표가 내 음악을 들어주기만 한다면 ‘당연히’ 채용될 자신감이 넘쳤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며칠 만에 그쪽에서 전화가 왔다.
그런데 사진을 보내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뜩이나 ‘얼굴’에 자신이 없다고 느꼈던 그는 신경질 확 내면서 얼굴 보고 뽑을 거면 안 간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랬더니, 10분쯤 후 양현석 사장님으로부터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다시 왔다는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을 전하면서 용감한 형제의 ‘무서운 얼굴’은 어느새 온화한 표정이 되었다. YG 합류의 순간이야말로 새로운 인생의 출발 기회였던 것이다.
그는 또 "YG에 들어가 내 노래를 장기간 수정하다보니 내 음악이 좀 촌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세련된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허름한 지하실에서 열심히 작업했는데 폭우로 물난리가 나서 하마터면 포기할 뻔도 했다. 그렇게 어렵게 탄생한 첫 곡이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였다"고 말했다.
그 이후 그는 웬만한 걸 그룹의 히트송을 거의 다 만들어 ‘히트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용감한 형제가 지금까지 만든 노래의 총 매출액이 100억 원이 넘는다니 그 ‘성공’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용감한 형제, 강동철은 가만 보니 작곡도 잘하지만 말을 워낙 잘하는 것 같았다. 청산유수다. 시청자의 정서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이야기 솜씨가 탁월했다. 아마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그 ‘재주’가 바로 그가 만든 노래가 ‘대박’나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시청자들은 그의 프로를 보면서 오랜만에 재미있었다는 시청소감이 쏟아졌다고 한다. 시청률도 다른 어느 때보다 높았다고 한다. 나만 재미있게 본 게 아닌가 보다.
개그프로도 아닌데 오히려 더 재밌었다. TV보면서 박수치고 웃으면서 본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79년생, 서른둘 된 용감한 형제라는 ‘조폭스타일’ 청년의 인생스토리는 요 근래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했다.
“내 인생에는 왜 이렇게 산이 많으냐”고 한탄까지 했다던 용감한 형제의 인생고백은 진솔하면서도 진정성이 돋보이는 웰 메이드 할리우드 영화처럼 감동을 줬다. 역경을 헤치고 마침내 성공하고야 마는 주인공 스토리는 언제 들어도 신난다. 용감한 형제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가 텔레비전 9시뉴스에 ‘히트제조기’로 소개되자 그의 부모님들도 비로소 ‘인정’해 주셨다고 한다. 10대 방황하던 시절의 강동철이라면 ‘은팔찌’나 차야 TV에 등장할 인물인데 어엿한 ‘작곡가’로 ‘용감한 형제’라는 예명으로 대접받으며 텔레비전 뉴스에 소개되는 순간 그의 엄한 부친의 눈가는 촉촉해졌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용감한 형제의 ‘매서운 눈매’에도 물기가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할리우드 영화 같은 성공스토리를 들으면서 카타르시스마저 느꼈다.
문득 이 ‘용감한 형제’가 전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순회강연’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황하는 우리의 10대들,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해버리려고 하는 마음약한 청소년들에게 이 용감한 형제의 ‘인생 역전 스토리’는 어떤 교육적 강연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본다.
“용감한 형제! 귀하를 대한민국 청소년 홍보대사로 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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