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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늘 이렇게 혼자 다니죠 뭐”-자본주의 사업가 스타일

스카이뷰2 2017. 2. 15. 10:04



                           

                     베이징 공항에 나타난 김정남의 공항패션.(교도연합뉴스사진)'북한사람'같지않아 보인다.

 

 

*아래 글은 2012년 1월16일 우리 블로그에 올렸던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업가 스타일의 김정남 “늘 이렇게 혼자 다니죠 뭐”

 

 


2012년 1월 14일 오후 베이징 공항 로비에 나타난 김정남(故김정일의 장남)이 아버지의 급서(急逝)에 대해 “자연이죠”라고 말했다는 아침신문 기사 제목을 보면서 한 편의 사극대사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연급 배우’의 대사치고는 짧지만 상당히 품고 있는 뜻이 많은 그런 뉘앙스를 풍긴다.

 

올해 마흔 둘인 이 중년 사내가 ‘최고 권력자’로 20여 년 간 군림해온 친부(親父)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언급한 말치고는 상당히 정제되고 세련된 수준의 화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준비된 대사’였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뉴스의 인물’인 김정남으로선 일단은 예상 밖인 ‘최상의 답변’을 내놓았다고 본다.

 

그렇지 않아도 김정남은 현재 장남이면서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조선왕조 대군들과 워낙 비슷한 처지여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거의 ‘세계적 관심거리’로 급부상해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3대 세습’을 내놓고 반대하는 소신발언까지 하고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여서 더더욱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 김정남이 김정일 사망이후 처음으로 ‘공적인 장소’인 공항, 그것도 베이징 공항에 나타났다는 건 그 자체로도 뉴스거리로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김정남은 2102년 1월 14일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베이징을 방문하고 마카오로 돌아가기 위해 베이징 서우두(首都)공항 3터미널 내 에어차이나(Air China) 항공사 비즈니스 라운지와 탑승 게이트 근처에 앉아 있었다.

 

신문기사에 따르면 오후 3시쯤 에어 차이나 비즈니스 라운지에 설치된 컴퓨터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는 김정남을 조우한 한국의 한 사업가가 '한국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덥썩 묻자 "제가 어떻게 한국을 갑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용감한 사업가’는 메모지에 '평화통일'이라는 글자를 써달라고 요청했고, 김정남은 영어로 'peace(평화)'라는 글을 썼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무슨 톱스타라도 만난 듯이 ‘싸인’을 부탁하듯 메모지를 들이댄 그 사업가의 ‘무례한 대담성’도 놀라웠지만 김정남의 위트 넘치는 대응에 기사를 보다말고 이런저런 생각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아무리 상대가 김정남이라지만 생면부지의 초면일 텐데 그런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는 보도에서 김정남이 ‘대군(大君)’으로서의 소양교육을 어느 정도 받았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김정남은 군청색 패딩점퍼와 청바지를 입고, 하늘색 야구모자를 썼으며 짙은 갈색 가방을 든 평범한 여행객 차림으로 동행은 없었다고 한다.

 

‘청바지와 야구 모자’라는 김정남의 '공항패션'에서 전형적인 자본주의 스타일이 느껴진다. 김정남은 10여 년전 ‘위조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발각되면서 우리 매스컴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전력의 소유자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당시 30대 초반의 김정남은 상당히 세련된 ‘유럽 명품’들을 입고 걸쳤다는 보도가 생각난다. 금팔찌와 금목걸이도 했던 것 같다. 금목걸이는 얼마 전 실린 사진에서도 발견됐다.

 

몇 해 전 TV화면에 나온 김정남은 자본주의사회의 ‘잘나가는 CEO’스타일로 보였다. 말솜씨도 상당히 매끄러웠다. 목소리도 서울의 인텔리들에게서 많이 들을 수 있는 부드럽고 교양이 느껴지는 매끈한 톤이었다. 김정남이라고 소개되지 않았다면 서울 강남 특급호텔 로비에서 볼 수 있는 분위기의 차림새와 말씨였다. '패션'에도 굉장한 신경을 쓰는 스타일 같다.

 

소년시절부터 ‘외국 물’을 먹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김정남은 스위스 홍콩 마카오 이런 곳에서만

20년 넘게 살았다니까 그가 풍기는 ‘자본주의 스타일’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기사에 따르면 그 사업가에게 ‘peace'라는 싸인을 해준 김정남은 1시간 반쯤 후, 이번엔 ’제대로 임자 만난‘듯, 전직 베이징 특파원출신 대학교수와 조우했다고 한다.

 

게이트 앞 대기장의 좌석에 홀로 앉아 있던 김정남은 ‘기자정신’을 발휘한 그 교수가 '김정남씨 아니냐'고 묻자, 놀란 표정으로 일어서며 "네, 네, 맞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매우 극적인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전직 기자’는 김정남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고 한다.

 

그는 '마카오로 가는 길이냐, 늘 혼자 다니느냐'물었고, 김정남은 "늘 그렇죠, 이렇게 혼자 다니죠, 뭐"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우연한 여행자' 김정남의 페이소스가 전해지는 듯했다.

뭐랄까. 기세등등했던 최고권력자의 아들이지만 권력자아버지의 눈 밖에 나 뒷전으로 밀린 대군의 애잔한 처지가 느껴졌다고나 할까.

 

“늘 이렇게 혼자 다니죠 뭐”라는 대사가 압권이다. 권세 누리는 세도 당당한 사람들은 ‘혼자 다니는 일’은 거의 없다. ‘혼자’ 다닌다는 게 일반인에겐 자연스런 일이겠지만 그런 정도의 권력자 아들에겐 매우 드문 현상이다.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몇 차례 공항에서 일본 기자들에게 목격당한 김정남은 늘 ‘혼자다니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유로운 처지이자 별로 위협당할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 교수가 또 김정남에게 '아버지(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놀랐겠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김정남은 "자연이죠(누구나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운명이라는 뜻인 듯)"라는 ‘명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자연이죠'는 아무래도 올해의 '어록 상위권'을 차지할 것 같아 보인다. 

'(평양에서 열린) 장례식에 다녀왔느냐'는 질문에는 "아, 네, 네"라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고, '장남이니까 동생들 잘 보살펴야겠다'는 말에는 "네, 그래야겠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보도에 따르면 김정남은 살이 아주 많이 쪘고, 공항 내부가 덥지 않은데도 땀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갈색 손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대기장 좌석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는 등 불안한 표정이 역력했으며 말투는 일본인이 한국말을 하듯 어색했다고 한다.

 

글쎄 그새 그의 유창한 ‘서울말 실력’이 줄어든 건 아닐 테고 아무래도 그런 뜻밖의 상황이 김정남으로 하여금 당혹감을 느끼게 했을 것 같다. 나 같은 평범한 일반인도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경계심도 들고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날 김정남은 ‘남쪽 인텔리’들의 ‘언어 공습’에 퍽이나 놀랐을 법하다.  그래도 최고권력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자연이죠'라는 '즉답'을 내놓을

정도라면  '김정남의 내공'도 만만찮은 듯하다.

 

‘이런 소동’을 끝으로 김정남을 태운 마카오 행 비행기는 이날 오후 4시 40분쯤 베이징 공항을 이륙했다고 한다. 남한의 전직기자출신 대학교수와 사업가들로부터 ‘시달림’을 받은 김정남의 그날 ‘일진’은 어떤 것이었을까. 1월 14일자 신문에 실린 71년생 돼지띠 김정남의  '오늘의 운세'는 '엉뚱한 구설시비 관재주의할 것'으로 나왔다.^^*  '믿거나말거나 운세'라지만 묘하게 맞아떨어진 일진 같다. 

 

아마 김정남은 마카오에 도착하기 전까지 일등석에 앉아있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듯 싶다. ‘자유분방한 남조선 인사’들과의 일문일답 실랑이를 되씹어보면서 ‘공화국의 개방’은 아무래도 필연적인 '운명'이리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PS 김정남은 결국 꼭 5년뒤 2017년 2월13일 말레시아 쿠알라룸프르 국제공항에서 암살당하는 비운의 황태자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