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이누도 잇신 감독 ‘황색눈물’-꿈의 60년대 가난한 일본청년들의 청춘백서

스카이뷰2 2017. 5. 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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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종로 거리를 걸어가다가 계획에도 없던 ‘황색눈물’이라는 일본영화를 봤습니다. 비도 많이 오고 약간의 자투리 시간도 있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누도 잇신이라는 낯익은 감독의 이름에 끌려섭니다.

이누도 잇신은 우리 블로그에 올렸던 ‘메종 드 히미코’라는 영화를 만든 일본인 감독입니다. 1960년 도쿄 출생. 1996년 감독 데뷔, 그 후 10년 만에 일본에서는 손꼽히는 ‘문제적 감독’의 자리를 굳힌 인물이죠.  


그의 화면은 늘 섬세하고 감수성이 촉촉히 배어 있습니다. 따스하고 서정적이면서 눈물을 자아내게 만드는 어떤 그리움 같은 것을 자연스레 화면에 배치해내는 재간 있는 감독입니다. 이름 하나 보고 본 영화였지만 역시 그 이름값에 상응하는 감동을 선사받고 나왔습니다.


월요일 오후 어중간한 시각이었는데도 20대 청춘 관객들이 꽤 많이 자리했더군요. 아무래도 그들도 이누도 잇신이라는 이름에 끌려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제가 ‘최고령 관객!’이었지만 별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관객들과  ‘황색눈물’의 등장인물들은 얼추 비슷한 동년배들이어선지 극장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좋았습니다. 왜 그 ‘물’이 좋다는 말 있잖습니까? 바로 그런  뉘앙스로 좋은 분위기였지요. 그야말로 ‘만장하신 청춘 여러분’이 두 눈을 반짝이며 스크린을 응시해 주는 그 ‘기(氣)’라는 게 참 대단하더군요.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는 고색창연한 문구마저 떠올랐습니다.


‘황색눈물’은 1963년 늦은 봄에서 여름이 지나기까지 예술가를 꿈꾸는 청춘백수 4인과 그들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스폰서해주는 근로청년 한 명 등 다섯 젊은이들의 눈부시게 시린 청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의 일본은 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온 나라가 들썩거리면서 경제대국에의 초석을 다지는 열기로 가득한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단지 어느 시대나 그러하듯 ‘가난’을 무슨 백그라운드로 여기는 듯한 ‘예술가 지망생’들에겐 그런 ‘국가적 분위기’와는 아랑곳없이 삐걱거리는 낡은 목조 건물 2층 3평짜리 월세방을 ‘꿈을 꾸는 무대’로 삼고 혈기방장한 젊은 날의 울분을 토로합니다.


끼니를 잇기 어려울 정도로 빈곤한 상태지만 ‘가난은 예술가를 키우는 자양분’이라는 사자후를 토하며 4인의 ‘예비 예술가’들은 각자가 원하는 분야를 향한 ‘습작시대’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묻고 답합니다. '자유'란 무엇인지 아느냐고? 자유에의 정답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해나가는 것'이라는데 그들은 의견을 일치합니다. 그러고는 자기들이 세워놓은 '예술의 길'을 향해 전진합니다.

 

이 ‘월세 방’은 주인공격인 무라오카 에이스케가 앉은뱅이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아서 사각사각 펜을 놀려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그런 예술의 공간입니다. 거기에 소설가를 꿈꾸는 류조와 화가 지망생인 케이, 가수 지망생 쇼이치가 눈치 없이 얹혀 살아가는 겁니다. 전당포가 물주인 그런 생활입니다.


요즘 같아선 어림 반푼 없는 이야기죠. 지금이야 대중식당도 1인용 칸막이를 설치해 ‘개인적 자유’를 최대한 보장해주는 그런 시대 아닙니까! 요샌 어린아이들마저도 예전처럼 길바닥에서 무리지어 노는 건 거의 볼 수 없습니다. 다들 집에서 게임기와 친구하면서 노는 시대이지요.


그러다보니 ‘오타쿠’니 뭐니 해서 ‘준 정신병자’같은 젊은이들을 양산해내고 있어서 기성세대들은 큰 걱정을 하고 있질 않습니까! 그러나 저 빛나는 1960년대의 일본에선 아직 ‘더불어 사는 삶’이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그런 시대였지요. 게다가 뜻 맞는 친구들과 서로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함께 얼려 술도 마시고 함께 새우잠 자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정서적 행태였었지요.


영화 ‘황색눈물’이 바로 그런 빛나던 ‘꿈의 60년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비록 ‘하얀손(白手)’들이어서 어디 갈 데도 오라는데도 없지만 그냥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두려울 게 없는’ 그런 충만된 시간을 보내는 ‘가슴 따뜻한 청춘백서’가 바로 이 ‘황색눈물’이라는 영화입니다.   


제가 우리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이 일본 영화감독들은 ‘일상성의 귀재’들이라는 점을 이 영화에서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일도 없이 ’ 그날이 그날처럼 지나버리는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영화’라는 화면위에 깔끔한 요리로 내놓는 저들의 빛나는 솜씨는 아마도 그것이 ‘일본적인 힘’이 아닐까 싶네요.


이누도 잇신은 영화 홍보차 한국에 왔을 때 그런 그네들의 ‘재능의 배경’을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이누도 감독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본 영화들은 극히 일상적인 , 별거 없는 것을 영화로 만드는 작가나 감독들이 꽤 있다. 그들은 그런 걸 만드는데 별 두려움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연출한 이번 영화 역시 극중에서 작은 사건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일상생활을 그대로 그렸다. 특히 이번 영화에서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 좋았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이런 영화를 즐기는 마니아층이 있으니 투자자들이 투자를 한다.”


그렇습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했듯이 일본 감독들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로 장사해먹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시시한 스토리를 즐기는 ‘마니아층 관객님’이 언덕처럼 버텨주고 있는 덕분일 겁니다.^^


우리는 드라마나 영화나 온통 희한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얽히고 설키지요. 툭하면 출생의 비밀이 설쳐대고, 그것도 모자라 주인공들은 불치의 병으로 쓰러져 가고, 아주 부자연스럽고 거부반응 일어나는 설정들이 난무하다보니까 관객들은 자연 외면하게 되는 겁니다.


선무당이 작두 나무란다고, 관객들을 한없이 식상하게 만들어놓고 관객이 들지 않는다면 곤란하겠지요.

설탕물이나 꿀물은 한 두 모금이면 질리지만 숭늉은 언제 마셔도 질리지 않듯이 숭늉같은 ‘일상생활’에서 길어 올린 소재야말로 우리 관객에게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게 저의 개인적 생각입니다.


아무튼 이누도 잇신감독은 자신이 중학생 때 열광하면서 봤던 NHK텔레비전 드라마 ‘황색눈물’을 이번에 영화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배경은 도쿄에서 친구 너 댓 명이 몰려다니면서 생활하고 예술에 대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자체가 너무 멋있게 보였기에 그 ‘감동’을 영화로 재현했다는 겁니다.


각본도 30여년 전 그때 드라마 각본을 썼던 이시카와 신이치에게 부탁했다는군요.  일본의 저력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섬뜩한 기분이 들더군요. 영화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20대 중반 청년들은 일본 최고의 아이돌 인기 그룹 ‘아라시’의 멤버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15세 전후에 데뷔해 그동안 두어 차례 영화에 출연해 호흡을 맞춰온 ‘동지’들이라고 하는군요.


‘월세 방’의 주인공이자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가고 마는 서정만화가 지망생 무라오카 에이스케 역의 니노미야 카즈나리라는 배우는 1983년생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픽업됐죠.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라는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영화에 출연해 ‘할리우드’에 진출했답니다.


할리우드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니 할아버지와 손자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미소년의 자태’가 가시지 않은 니노미야 카즈나리 라는 이 곱상한 청년배우에게 반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섬세한 얼굴선이 깨끗하면서도 예민해 보여 척 보자마자 A형일 거라는 느낌을 받았는데 검색창에 보니 ‘피 도망’을 못했더군요.^^


영화는 이 에이스케가 ‘전쟁이 끝나던 해 나는 여덟 살이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믿을 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오로지 내겐 만화 밖에는 없었다.’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해서 예술가 친구들이 끝내 인생과 타협해 ‘생업’에 종사하면서 ‘건실한 생활인’으로 변모한 채 예술가로 남은 친구에게 전하는 ‘인생 편지’의 나레이션으로 끝납니다.


여기서 그들은 말합니다. “인생을 앞에 두고 허둥대기만 하는 무능하고 가련한 청춘이지만 지금, 이마의 첫 주름과 함께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에 대한 신뢰와 동의와 친구, 그리고 너에 대한 거라면 다 알고 있어 라고 말하는 그런 의미의 미소이다. 인간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인생은 인간을 속이지 않는다. 인생은 한 번도 인간을 속이지 않았다고.”


‘생업의 현장’속으로 동참할 수밖에 없지만 ‘그 것이 인생 아니겠냐’는 거겠죠. ‘8대2’ 가르마를 타고 건실해 보이는 샐러리맨 혹은 밀짚모자 쓴 채 땀 뻘뻘 흘리는 성실한 농부로 변신했지만 ‘그래도 친구!’ 네가 있어서 우리 청춘은 아름다웠다 라고 말하고 싶었나 봅니다.


영화는 러닝타임 128분으로 꽤나 깁니다. 그런데도 별 지루함 없이 그냥 그들 젊은이들의 ‘청춘의 나날’들 속에 함께 침잠해 우리도 그렇게 늙어가는 겁니다.


갸냘퍼 보이는 섬세한 인상으로 ‘등에 애수가 묻어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주인공 에이스케만이 ‘외롭게’ 서정만화가의 길을 고집합니다. 그 시대에는 이제 막 선정적인 S로 시작하는 메뉴를 요구하기 시작한 그런 시대였지만 그는 자신의 세계를 소중하게 키워나가고 싶다는 ‘독립선언’을 확실히 합니다.              


이 영화는 2007년 4월 도쿄 긴자에서 개봉하자마자 4분 만에 표가 매진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군요. 어쩌면 지금 일본 사람들은 ‘그 빛나던 60년대’의 일본적인 성실함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일본의 한 보수우익 쪽 대학교수 한 분은 ‘일본인으로서 이것만큼은 알아뒀으면 하는 것’이라는 책을 냈습니다.(나카니시 테루마사, 교토대학 대학원교수) 지금 일본은 ‘예전 일본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의 많은 국민이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라고 말할 만큼 정신면에서 일본은 악화하고 있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입니다. 예전 ‘일본적인 걸 회복해 나가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낡았지만 좋은 일본’모델에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있답니다.


어쩌면 이런 정신이야말로 우리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필요한 건 아닌지요.

‘일본판 친구’라고도 할 수 있는 ‘황색눈물’을 보면서 일본의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정신적인 올바름’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한국에도 필수적으로 있어야할 것들이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도 ‘황색눈물’은 ‘그리운 시절’ ‘끈끈한 우정’ 뭐 이런 아름다운 것들을 그려냄으로써 낡았지만 좋은 일본적인 모델을 회복해내는데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비교하긴 좀 뭐하지만 몇 년 전 우리 영화계를 들썩거리게 했던 ‘친구’와 이 ‘황색눈물’의 친구를 비교하니 왠지 우리가 가야할 길이 더 멀고 험난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래 전 장동건이 나온 ‘친구’를 보고나서는 진저리를 쳤거든요. 그 영화에서 장동건이 친구에 의해 난도질당한 끝에 죽어가는 라스트신을 보고 3시간동안 식사를 못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황색눈물’은 보고나니까 마음이 착해지는 듯 하더군요. 정서적으로 순화되는 듯한 괜찮은 기분 상태! 일상을 소재로 이런 쿨한 여운을 선사해주는 것도 감독의 재능이라고 봅니다.


‘꿈과 희망에 대한 잔잔하고 가슴 따뜻한 청춘백서’라는 ‘황색눈물’같은 소소하면서도 다정한 영화가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