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섬세한 명주실로 자아낸 애잔한 가족 이야기
섬세한 감성으로 애잔한 가족이야기를 그려낸 일본영화 ‘걸어도 걸어도’는 요 근래 본 영화중엔 단연 수작(秀作)이다. 모처럼만에 가슴 저리게 만드는 ‘아무렇지도 않은 가족 스토리’에 아련한 향수마저 느껴진다.
일본에서 뿐 아니라 국제무대에서도 이미 그 이름을 날리고 있는 62년생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은 이 영화를 2년전 ‘제목’부터 먼저 정해놓고 나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영화제목 ‘걸어도 걸어도 (歩いても歩いても)’는 1970년 일본에서 대히트했던 유행가 블루라이트 요코하마에 나오는 구절로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가 생전에 이 노래를 자주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는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일본 감독 특유의 솜씨 넘치는 ‘일상성의 재현’에서 산다는 것의 복합적인 의미를 되새기게 해주는 영화다. 잘 만든 다큐멘터리처럼 예리하면서도 애틋한 페이소스(pathos)가 넘친다. 오정희의 잘 쓴 단편소설을 읽은 듯 개운하면서도 쌉쓰름한 느낌이 든다. 잠시 잊고 있었던 예전 우리네 가족들의 이야기가 ‘화면’에서 오롯이 되살아난 듯하다.
영화는 언제나 무뚝뚝한 아버지와 늘 잔걱정 많은 늙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고향집으로 장성한 자식들이 일찍 세상 떠난 큰형의 기일을 맞아 모인 하루 동안의 일상을 극세화처럼 그려내고 있다.
‘제사 음식’을 만들면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모녀의 모습은 예전 우리네 명절 때 가족풍경과도 아주 비슷하다. 화면 가득 채워지는 갖가지 일본 전통요리를 만드는 장면에서부터 감독의 범상치 않은 솜씨가 느껴진다.
‘진짜 늙은 엄마’처럼 뛰어난 연기력을 발휘한 어머니역의 키키 키린(樹木希林)은 우리로 치면 김혜자나 강부자 정도로 일본에선 아주 유명한 여배우. 67세 여배우가 보여줄 수 있는 원숙한 연기가 최고조에 이른 것 같다.
지방 소도시에서 자그마한 개인의원을 운영해온 남편으로부터 사회적일을 하지 않은 전업주부라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구박을 받으며 늙어온 아내의 심드렁한 표정은 영화 같지 않고 현실 같다. 그만큼 배우들을 부리는 감독의 솜씨가 탁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세상물정 모른다고 자식들에게도 무시당하며 살아온 늙은 엄마는 하지만 이제는 ‘득도’의 경지에 도달한 생활철학자이다. ‘아깝디 아까운’ 장남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아픔을 속으로만 삭혀온 엄마는 “너희들이 나를 알아”라고 부르짖는다.
차남이 아직 아기였던 시절, 남편의 바람을 이미 눈치 채고 있던 아내는 늦은 밤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던 남편을 찾아 나선 적이 있다. 애써 찾아낸 그곳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에게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불러주던 남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내는 문 밖에서 남편을 불러보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던 길, 레코드 가게에 들러 ‘블루라이트 요코하마’가 담긴 LP판을 하나 산다. 그렇게 아내의 마음에 애증으로 남은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오랜 세월 그녀의 가슴 절절한 18번이 된다.
그 ‘피맺힌 가슴의 노래’를 장성한 자녀들과 늙은 남편 앞에서 틀어주는 늙은 아내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아무도 몰라주는 ‘모정의 세월’을 엄마는 유행가 한 곡조를 뽑으며 버텨온 것이다.
아들의 제사상에 신기하게 날아든 ‘노랑나비’를 보면서 ‘아들’이 왔다며 조심스럽게 나비의 날갯짓을 안타깝게 따라가는 그녀의 슬픈 표정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한때는 동네 명의로 이름을 떨치던 아버지는 이제 일선에서 은퇴해 무기력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웃집 할머니로부터 자신의 마지막을 지켜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지만 정작 할머니가 쓰러지자 ‘응급차’를 부르라고 다급하게 외친다.
늙은 아내의 '지시'대로 빨래를 잘 펴서 널어놓았다가 그런 자신이 못마땅해졌는지 금세 구겨서 다시 널어놓을 만큼 가부장적 권위의식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이젠 그 누구에게도 예전만큼 권위가 통하지않는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는 쓸쓸해진다. 가부장적 권위로 군림해오던 아버지의 시대도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동네 어린애를 구하려다 세상을 뜬 장남은 의사인 아버지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었다. 여느 집에서처럼 이 집 차남은 그런 형의 그늘에 가린 채 자라나 부모의 기대에 못 미치는 스스로가 못마땅해선지 사사건건 아버지와는 대립각을 세우곤 한다.
더구나 아이 딸린 젊은 과부와 결혼해 처음으로 부모를 찾아오는 길인 그는 고향집에서 ‘하룻밤’ 묵는 것마저 부담스러워하는 실직자다. 아내에겐 자신의 ‘실직’을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계부(繼父)를 아빠라 부르지 않고 여전히 ‘료짱’이라고 부르는 철부지 아들에게 제발 하루만 아빠라고 불러달라고 사정사정하는 젊은 엄마의 하소연도 찡한 울림을 준다.
어릴 적 아빠를 잃은 소년은 계부의 고향집에서 처음 만난 사촌들이 새아빠를 뭐라 부르냐는 물음에 짐짓 아무렇지도 않게 '아빠’라 부른다고 말한다. 엄마의 하소연엔 어깃장을 놓았지만 속으론 이미 ‘철’이 든 꾀가 멀쩡한 아이다.
이 집 장남이 목숨을 구해준 이웃집 소년은 10년 세월 사이 장성한 청년이 되어 ‘기일’이면 해마다 찾아오지만 번듯한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입장이라 영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그런 그를 보며 바른말 좋아하는 차남은 그가 돌아간 뒤 그가 딱해보인다며 이제 그만 오게 하자고 말했다가 늙은 어머니에게 된통 야단을 맞는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질 않는가.
세상일에 실패한 차남 역의 아베 히로시(阿部 寬)를 비롯한 출연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한데 어울려 ‘좋은 영화’만들기에 한몫을 크게 한 것 같다.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간다. 대단한 사건도 없고 아기자기한 스토리도 없으면서도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소한 스토리’를 두 시간 가까이 끌어나가는 감독의 힘이 대단하다. 아주 오래전 봤던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도쿄이야기(東京物語)'와도 비슷한 이미지가 풍긴다. 어쩌면 이런 '일상에 강한' 일본 영화의 힘이야말로 일본의 저력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고향집 주방 풍경은 내가 아는 도쿄의 일본인 집 주방 풍경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했다. 그만큼 영화제작진들이 ‘디테일에 강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무슨 흡혈귀 신부가 나오는 '박쥐'가 설치지 않고 살인자 아들을 구하려는 '마더'가 이리 뛰고 저리 뛰지 않더라도 ‘걸어도 걸어도’는 영화 보는 편안한 행복감을 선사해준다.
사소한 일상에서마저 ‘영화제작’을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감독의 예술가적 열정이 느껴진다. 자신의 일상의 순간순간을 영화제작에 연결시켜놓는 감독이기에 화면위에 그토록 섬세하게 일상을 복원시켜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거창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를 멋진 영화로 만들어내는 고레에다 감독의 ‘작가정신’이 부럽다.
이 영화는 상복(賞福)도 많아 2008년 토론토 영화제, 산세바스티안 영화제, 바르샤바, 런던, 테살로니카, 아르헨티나의 마르델플라타 영화제를 휩쓸었고 일본 내에서도 유수한 영화제에서 최우수 감독상, 남우 주연상, 여우조연상등 을 받았다. 많은 상을 받을만한 잘 만든 영화다.
*아래는 영화 ‘걸어도 걸어도’를 탄생시킨 유행가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
街の灯りが とてもきれいね 거리의 불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ヨコハマ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あなたとふたり 幸せよ 당신과 둘이서 행복해요
いつものように 愛の言葉を 언제나처럼 사랑의 이야기를
ヨコハマ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私にください あなたから 내게 주세요. 당신에게서
歩いても歩いても 小舟のように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私はゆれて ゆれてあなたの胸の中 나는 흔들리고 흔들려서 당신 품 안에
足音だけが ついて来るのよ 발자국 소리만 따라 오네요
ヨコハマ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やさしいくちづけ もう一度 부드러운 입맞춤 다시 한번
歩いても歩いても 小舟のように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私はゆれて ゆれてあなたの胸の中 나는 흔들리고 흔들려서 당신 품 안에
あなたの好きな タバコの香り 당신이 좋아하는 담배 향기
ヨコハマ ブルーライト・ヨコハマ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二人の世界 いつまでも 둘 만의 세계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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