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일본영화 '내일의 기억'-누구에게나 닥칠 늙어가는 것에 대해

스카이뷰2 2017. 10. 26. 11:07


                                

     

 

                                                                                              

일본영화 '내일의 기억은 중년기의 사람들에겐 남의 일 같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다. 한창 때라고 할 수 있는 49세의 엘리트 회사원이 알츠하이머라는 ‘노인성 질환’으로 알려진 끔찍한 병마의 공격으로 어쩔 수 없이 무너져 내려간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론 질병을 소재로 한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렇고 그런 일상생활을 소재로 정서적 공감대를 만들어내는 일본 영화가 주는 매력에 끌려 본 영화다.  이 영화 역시 '일상성의 재현'을 솜씨있게 연출해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영 시간 두 시간이 언제 지나간지 모르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든 ‘웰 메이드 무비’였다.

 

'내일의 기억'을 만든 츠츠미 유키히코 감독은 55년생으로 일본에선 ‘츠츠미 월드’라는 신조어를 만들 정도로 다방면의 문화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실력파 감독이다.

국내에 개봉된 ‘박치기’나 ‘클럽 진주만’ ‘셸위 댄스’등의 감독들도 모두 50대 중견감독이라는 점이 일본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 같다. 영화감독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50대인 것 같다. 50대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인생의 ‘제반 상황’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인생의 눈’이 밝아지는 나이여서 그런 것 같다.

 

영화팬의 한사람으로 어떤 영화를 보러갔을 때 전혀 ‘사전 정보’없이도 대충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의 ‘연령대’를 알아맞히곤 한다. 비단 일본영화 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 영화들을 볼 때도 나의 ‘감독 나이 알아맞히기’는 거의 정답을 낸다.

 

히 ‘50대 감독’의 영화들은 금세 느낌이 온다. 그들의 영화를 만드는 ‘솜씨’에서 ‘연륜’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감독들의 ‘조로현상’이 좀 심한 것 같다. 지금 충무로에서 50대로 명함 내밀고 활동하는 감독이 금세 떠오르지 않는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감독 층은 얇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이런 ‘조로현상’은 비단 영화뿐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듯해 걱정스럽다. 무슨 ‘사오정’이니 ‘오륙도’니 하는 단어가 그런 ‘조로현상’을 대변해주는 말이다. 기업체에서야 조직의 ‘활성화’를 이유로 40대 중반만 되면 ‘명예퇴직’을 강요하고 있다지만 ‘예술계’에서까지 그런 ‘명예퇴직’현상이 일어난다는 건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본다.  

 

 영화이야기를 하려다가 느닷없이 ‘조기· 명예퇴직’이야기부터 하게 되었지만  이런 사회현상이 ‘내일의 기억’이라는 영화 자체와도 맥락이 닿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와타나베 켄은 영화에서 54년생으로 광고회사 부장이다. 거의 절정기에 도달한 광고맨으로 주인공은 어려운 프로젝트 하나를 따내고 부하직원들과 환호한다.

 

 광고’라는 직종이 상징하듯 굉장히 활기차고 바쁜 일상을 보내는 주인공 사에키는 그 나이의 거의 모든 회사원들이 그렇듯 ‘회사 일’에 인생을 걸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  영화는 2004년 봄 그가 한창 회사일에 몰두하던 시점에 그에게 나타나는 병세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의 나이 49세때 일이다.

 

어느 날부터 그는 서서히 ‘이상 증후군’에 시달린다. 사소한 일상의 일들을 기억해내기 어려워지게 된다. 사람의 이름· 날짜· 늘 다니던 길목에서 길을 헤매기 시작한다. 같은 라벨의 면도 크림을 사고 또 사와서 아내에게 ‘지적’을 받기도 한다. 

 

‘회사에 목숨 걸고 살아온 회사인간’으로선 있을 수 없는 ‘회의시간’을 잊어버리는 일대실수를 저지른 끝에 아내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간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의사로부터 아주 시시한 질문-오늘은 몇 월 며칠 무슨 요일이냐 등-들을 받고 정밀 검사를 거친 끝에 사에키는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청천벽력의 진단을 듣고야 만다.

 

사에키는 처음 그 진단명을 들은 순간 버럭 화를 낸다. “당신 몇 살 먹었어. 의사생활한지 몇 년 되었어”라며 ‘애송이’의사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나타낸다. 냉철한 스타일의 그 ‘젊은 의사’는 자신이 10년차 의사이며 이 병원 뿐 아니라 그 분야에선 알려진 전문의라고 말한다.  그 젊은 의사는 자신의 병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사에키에게 이렇게 말한다.  “늙어가고 병들고 죽는 건 피할 수없는 인간의 숙명 아닙니까? 인간은 태어나서 십수년 간을 제외하곤 점차 쇠퇴해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못하는 건 아닙니다.”

 

의사에게 병명을 진단받고 나온 이 중년부부는 병원 복도의 계단에 주저앉아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한참 흐느껴 운다 . 함께 시련을 겪어야할 운명공동체인 ‘부부의 초상’을 보여주고 있다. 자식이 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이런 역경에선 결국 부부만 남게되는 건 어디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주인공 사에키는 당분간 병명을 숨기고 회사에 다니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탐내는 부하직원의 ‘밀고’로 국장에게 불려가 ‘희망퇴직’을 권고받는다.

 

 “딸아이가 결혼하는 10월 27일까지는 현직에 있고 싶습니다.” 이 심정은 아마도 ‘일본 아빠’나 ‘한국 아빠’나 비슷한 것 같다. 될수록 ‘현직’에 있을 때 자식들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심정! 사에키는 자신의 상사에게 이런 사정을 부탁하면서 등을 구부려 ‘새우등’으로 만들며 95도 각도의 절을 한다.  ‘새우등 인사법’은 일본인들에겐 거의 일상화된 예법이지만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 인사하는 모습은 너무 애처롭다.

  

사에키는 거래처 사람들에게 인사할 때도 ‘새우등’이 되도록 등을 굽혀 5초 정도를 ‘스톱 모드’로 있는게 몸에 뱄다. 바로 그런 모습이야말로 일본을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새우등’을 보이는 것 자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하나의 ‘충성서약’표시라고나 할까.  

 

‘외동딸’을 위하여 병구를 이끌고 회사에 나가는 사에키는 비로소 ‘지난날’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게 된다. 오로지 ‘회사’에 열정을 바치느라 ‘가정’은 돌보지 않았던 자신을 돌아보면서 마음 아파하기도 한다. 제작 일선에서 밀려나 ‘한직’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중년의 한국 샐러리맨’들도 ‘남의 일’같지 않다는 진한 공감대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드디어 딸의 결혼식! 인사말을 미리 썼던 원고를 깜빡 잊고 나온 사에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가족대표’로 더듬더듬 인사말을 해나간다. 옆에 선 아내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러고 난 다음날  사에키는 마침내 ‘퇴직’을 한다.

 

26년간 ‘청춘’을 바쳐왔던 회사문을 나오는 초라한 그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중년 남자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아마 뭉클해질 것 같다.  이제 그 남자 앞에는 자신의 기억을 망각해가는 일만 남은 ‘무서운 투병생활’만이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미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천사표’ 아내는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곁에 내가 있고 우리 가족이 있습니다.”라며 한없이 착한 웃음 속에 눈물을 보인다. 유능한 시절의 남편은 가족과 가정은 두 번째이고 오로지 회사에만 열정을 바쳤지만 이제 ‘병든 몸’이 되어서야 아내 곁으로 돌아왔으니 그 아내의 심정은 어땠을까. 

  

외동딸도 출가하고 이제 덩그마니 둘만 남겨진 부부! 더구나 아직 한창때라고 알았던 남편은 알츠하이머라는 ‘불치병’으로 점차 ‘폐인’이 되어가고... 아내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고 남편은 ‘외로운 투병생활’을 해나가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인생!’인 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남편과 아내의 눈물겨운 일상생활을 감독은 섬세하고 따스한 시각으로 예리하게 잡아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자세한 내용은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여기까지만 .^^;;

 

주인공 사에키로 열연한 와타나베 켄은 이 영화의 홍보를 위해 서울에 왔었다. 와타나베는 '라스트 사무라이'나 '게이샤의 추억'에서 중후한 연기로 할리우드에서 유명해진 일본배우지만 그의 모친과 부인은 한국인이라고 한다.^^ 왠지 좀 뿌듯하다.

 

그는 실제로 20년전 백혈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치유한 경험이 있어서 이 '내일의 기억'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연기에 혼신을 기울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그런 실생활의 배경이 그에게 그토록 절박한 표정연기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인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일본 영화팬들에겐 익숙한 얼굴들이 조연으로 꽤 많이 나온다. 그들을 만나는 ‘재미’도 꽤 괜찮다. 반갑다고나 할까. 국내에도 개봉한 ‘셸위 댄스’ ‘스윙 걸즈’ 등에서 나온 와타나베 에리코는 이번 영화에서 ‘천사표’ 아내의 친구로 나온다.

 

‘유레루’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등에서 고지식한 역으로 나온 도쿄대학 출신의 카가와 데루유키는 사에키를 격려해주는 직장상사로 나와 그에게 “빨리 쾌유해 복직하라, 당신만한 인재가 없다”라는 덕담을 해준다. 그밖에 사에키가 요양소에 갔을 때 ‘안내’를 맡았던 안경 낀 여직원도 ‘셸위 댄스’에서 얼굴을 비쳤다.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그렇듯 이런 ‘조연’들의 받침대가 튼튼해야 영화가 더 감칠맛 나는 것 같다. 영화를 본 적지 않은 관객들이 ‘가슴이 메어지는 듯했다’는 소감을 말하고 있다.  ‘눈물’을 강요하는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공감대가 자연스레 형성되는 주제이기에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이 영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숲속에서 부부가 해후하는 모습이다. 사람의 마음을 에이는 듯하다. ‘아나타’라고 남편을 부르는 아내의 간절한 외침을 낯설어 하는 ‘이방인’ 남편의 그 눈길이라니.... 어떡하란 말인가! 10여년 쯤 전,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레이건이 가족을 통해 발표한 ‘국민에게 드리는 편지’가 떠오른다. “나는 지금 인생의 황혼기로 향하는 여로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미국의 앞날에는 항상 밝은 아침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자신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것을 국민 앞에 고백하고 ‘공개 투병생활’에 들어갔던 레이건 대통령은 아내 낸시의 얼굴마저 기억해내지 못할 자신의 병세를 두려워하며 10년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걱정한대로 끝내 아내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내일의 기억’에서도 주인공 사에키는 말한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기억할 수 없어서...”  

‘내일의 기억’이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따스하게 여겨지는 것도 아마 우리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런 참담한 현실’에 대해 그저 성실한 자세로 최후까지 열심히 살아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서인 것 같다. 이 가을 모처럼 인생과 ‘눈물의 의미’를 음미해 볼 수 있게 해준 영화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