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영화 ‘8명의 여인들’
동네에서 우연히 프랑스 영화 ‘8명의 여인들’을 볼 수 있었던 건 거의 복권 당첨수준의 유쾌한 행운이었다. 동네 영화관이지만 나름 관객을 유치하려는 차원에선지 ‘SF영화관 출관 기념’ 이라며 현재 시중에서 상영하지 않는 흘러간 영화 몇 편을 돌리고 있었다.
마침 시간대가 맞은 영화가 ‘8명의 여인들’이었다. 어떤 내용이냐고 안내데스크에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고 한다. 어느 나라 영화인지, 감독이 누군지, 출연배우가 누군지, 무서운 영화인지 슬픈 영화인지 전혀 모르는 채, 그래도 무슨 기념이라니까 ‘나쁜 영화’는 아니겠거니 해서 티켓을 끊었다. 가격도 착했다. 한 편당 5천원.
관객은 나를 포함 모두 8명. 모두 여성이다. 영화제목 ‘8명의 여인들’과 우연의 일치였다.
이렇게 보게 된 ‘8명의 여인들’은 최근 본 영화 중 제일 신선하고 재미있고 발랄했다.
예전에 많이 봤던 프랑스 영화와는 사뭇 다른 산뜻한 색채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감독의 솜씨가 탁월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8인의 여배우들 모두가 개성미 넘치는 그야말로 인형 같은 ‘불란서 여배우’답다.
언제까지나 늙지 않을 것 같았던 깜찍한 미인 까뜨린 드뇌브도 65세라는 나이 도망은 못가선지 그 고운얼굴에 살짝 세월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농의 샘’에서 눈에 띄게 예쁜 처녀로 나왔던 엠마뉴엘 베아르는 정체불명의 하녀로 여전히 예뻤다. 그녀도 어느새 40대 중반이란다.
무엇보다도 연초에 봤던 ‘마리아 칼라스’에서 열연했던 프랑스의 국민여배우라는 파니 아르당의 농염한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반가웠다.
아르당은 드뇌브와는 다른 관능적 매력이 넘치는 자태로 화면을 꽉 채웠다.
노래 솜씨도 얼마나 일품인지... 그녀도 어느새 우리 나이로 칠순이 넘었다.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 예쁜 여배우들을 보는 건 썩 유쾌하진 않다. 언제까지나 그녀들의 그 화려한 미모에서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 연기를 보고 싶건만.
하기야 그런 미녀들도 세월 앞에선 ‘평등’하다는 진리가 우리를 겸허하게 해주는 건지도 모르겠다.
프랑스와 전세계 여배우들 중 가장 재능 있고 존경받는 여배우 중의 하나라는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도 화려하다. 표정연기가 일품이다.
그 밖에도 발랄한 신세대 여배우들이라는 비르지니 르두아�과 뤼디빈 사니에르 도 프랑스 여배우들의 전통적 계보를 이어받아 그 깜찍한 미모가 눈이 부시다.
아무튼 이런 내로라하는 8명의 프랑스 여배우들이 화면을 휘저으면서 노래와 연기를 뽐내는 ‘8명의 여인들’은 2002년에 제작, 프랑스에서 개봉하자마자 대박히트였다는데 우리나라에선 4년 전 개봉했지만 전혀 인기를 끌지 못하고 조용히 묻혔던 영화다.
영화팬을 자처하는 나도 어제 우연히 보는 ‘행운’을 만나고 나서야 이런 영화가 있었던 걸 알았으니...
나중에 검색창을 쳐보니 이 영화 보통 영화가 아니었다. 요즘처럼 ‘수입소고기 문제’를 비롯한 각가지 현안들로 심란해진 나라 분위기는 국민을 짜증나게 하지만 이렇게 '티켓’하나로 영양제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반짝 맑아졌다는 건 이 영화가 내게 준 가장 큰 미덕이다.
감독 프랑수와 오종은 67년생으로 알만한 영화팬은 다 아는 재간둥이 미남감독이다. ‘스위밍풀’이나 ‘타임 투 리브’같은 영화로 그의 재능은 이미 알려져 있다. 범죄· 미스터리·코믹·뮤지컬로 분류된 이 ‘8명의 여인들’ 역시 그의 영화재능을 한껏 보여준 작품인 듯하다.
영화는 1950년대 프랑스,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의 한적한 시골 대저택을 무대로 시종 이 저택의 거실에서 스토리가 전개된다. 마치 연극 무대를 보는 것 같다.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기 위해 파리로 유학갔던 이 집 큰 딸이 돌아오고, 엄마, 이모, 할머니, 동생이 모여 즐거운 이야기꽃이 핀다.
재미있는 시간도 잠시, 2층 아빠 방에 차를 가지고 올라갔던 하녀의 비명이 들린다. 아빠가 등에 칼이 꽂힌 채 살해당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온 가족은 비명을 지르며 충격에 빠진다.
경황없는 가운데 8명의 여인들 중 막내딸이 범인은 이 중에 있다면서 ‘범인 색출’을 선언한다. 그때부터 영국의 유명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소설 같은 분위기가 영화전편을 흐른다.
폭설로 외부와 연락이 단절됐고, 누군가가 전화선마저 절단해버려 경찰도 부르지 못하는 상태다. 8명의 여인들은 모두 공포에 떨면서 서로를 의심한다. 범인은 필시 이 중 한명이라는 암시가 계속 흘러나온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자의 어두운 비밀들이 하나씩 폭로되고 그럴 때마다 그녀들은 그럴싸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젊은 하녀는 죽은 아빠의 정부였고, 엄마는 아빠 몰래 애인과 함께 도망가기 직전이었다. 할머니 역시 나름 아픈 과거가 있고, 공부하러갔다 휴가차 집에 온 큰 딸은 임신 중이다. 고모는 아빠의 재산을 애인에게 빼돌리려 한다. 충직한 흑인 요리사는 고모와 동성애 중이다.
이렇게 듣기에 따라선 한없이 칙칙하고 어두운 이야기들이지만 감독은 그런 ‘흉한 이야기들’마저 예쁘게 포장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다.
출연 여배우들이 고비 고비 마다 부르는 샹송은 그녀들의 노래 솜씨도 뛰어나지만 가사가 구구 절절 가슴에 다가온다. 거의 시(詩)고 철학이다.
이 노래들을 다시 듣고 싶어서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 영화다.
영화는 마지막에 충격적인 ‘대반전’을 보여주면서 엔딩(FIN)자막이 나온다.
외국의 영화 저널에선 이 영화에 대한 극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필름 저널 인터내셔널의 케빈 랠리는 “환상적인 프랑스 스타 여배우들의 앙상블로 이뤄진 익살스럽고 유쾌한 미스터리· 코미디· 뮤지컬의 전시장”이라고 했다. 아주 적절한 평이다. 다른 영화평도 “지난 반세기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들의 퍼레이드다. 드라마 음모 미스터리와 색채들로 넘쳐 정말 독창적이고 너무 재미있어서 다시 보고 또 보게 만드는 영화”라고 칭찬했다.
평소 영화평론가들의 평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오랜만에 이 외국 영화평론가들의 ‘한 말씀’에 동감의 박수를 치고 싶다. 아니 이렇게 예쁘고 산뜻한 영화를 만든 프랑수와 오종 감독과 빼어난 미모와 노래솜씨를 자랑한 8명의 여배우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52회 베를린영화제에선 이 8명의 여배우들에게 은곰상 단체연기상을 주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녀들의 연기가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모처럼 재미있고 유쾌한 영화였다. 유감스럽게도 동네영화관에선 어제로 그 영화는 막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마지막 날이나마 우연히 볼 수 있었던 행운이 정서적 엔돌핀 역할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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