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오브 스파이스- 안방에서 만난 행복한 그리스 영화
지금 이 순간도 우연히 그 영화를 본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해진다.
아직 산타 할아버지의 존재를 믿는 일곱 살 꼬마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을 때 느꼈을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
오랜만에 내 취향에 꼭 맞는 ‘요리와 인생’을 다룬 ‘터치 오브 스파이스(A Touch of Spice)’라는 그리스영화를 뜻하지 않게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과장법이 심하다고 말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솜씨있게 만든 영화를 보면 이상하게 ‘행복감’을 느끼는 버릇이 있는 나로선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여름날 일요일 오후 세시 쯤? 우리 집 마루에서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감전된 것처럼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영화의 처음 부분을 놓친 게 그렇게도 아깝고 아쉬울 수 없었다. 텔레비전이라는 걸 깜빡 잊고 나도 모르게 ‘리와인드’버튼을 누르고 싶을 정도였다.
정체불명의 그리움과 아련한 아쉬움을 풍기는 장면들을 보면서 감독의 범상치 않은 ‘재능’을 발견해내는 것도 영화 보는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그리스 영화는 거의 처음 보는 것인데 이렇게 ‘월척’을 만나고 보니 ‘문명의 발생지’중 한 곳인 그리스의 문화역사적 전통의 힘을 새삼 생각해봤다.
영화는 그리스 혈통의 소년 파니스가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할아버지의 향신료 가게에서 ‘요리와 인생철학’을 배우는 과정과 소년이 성장해 가면서 만나는 인생, 그리고 성년이 되어서 겪게 되는 삶의 이런저런 풍경을 요리와 믹스시켜 보여준다.
손자를 향한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슷한 것 같다. 할아버지는 총명한 손자에게 ‘인생의 잠언’을 ‘향신료’에 비유시켜가며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하늘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단다. 보이지는 않지만 음식의 맛을 내주는 소금 같은 것 말이다.”
영화는 코스요리처럼 만들어졌다. 에피타이저-메인 디시-디저트 순으로 펼쳐 보이는 화면에는 영화로웠던 국제도시 터키 이스탄불의 화려한 요리와 기품 있는 그리스 가정식요리를 풍성하게 보여준다.
요리와 함께 요소요소에 배어나오는 ‘잠언’은 관객에게 ‘수준 높은 요리철학’을 공부한 것 같은 문화적 포만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스탄불 요리의 설탕은 동화의 해피엔딩이다. 주인공이 품어온 두려움을 말끔히 녹여내주니까. 성찬이 끝나는 슬픔을 디저트로 달래야 한다.”
영화에는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산물로 빚어진 민족 차별 같은 이야기도 슬쩍 건드린다. ‘키프로스 사태’로 그리스로 강제이주 당하게 된 소년의 가족은 “터키에선 그리스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는데, 새로운 조국 그리스에 와보니 그리스 인들은 그들을 터키인이라고 이단시 한다” 마치 재일 동포들이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할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요리솜씨로 ‘요리영재’처럼 맛있는 요리를 척척 만들어내는 꼬마의 모습이 그렇게도 귀여울 수가 없다. 고향에 두고 온 ‘첫사랑’ 사이메라는 소녀를 그리워하는 소년이 ‘향수병’까지 겹쳐 시름시름하는 장면은 꽤나 안쓰러워 보인다. 소년의 이런 마음은 장년이 되어서까지 지속된다.
할아버지와 소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스탄불 식 요리를 하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다며 부모는 소년에게 주방출입을 금지시킨다.
학교에서도 소년은 수업에 적응치 못한다. ‘학부모 호출’에 불려나간 아버지는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집중력과 애국심이 약하다는 주의를 듣는다.
세월이 흘러 천체물리학 교수가 된 파니스는 할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스탄불로 날아간다. 요리의 진수를 가르쳐주시던 할아버지의 앙상한 손을 부여잡고 중년이 된 손자는 슬퍼한다. 그곳에서 첫사랑소녀 사이메를 만나지만 그녀는 이미 딸 하나를 둔 유부녀가 되었다.
남편을 따라 이스탄불을 떠나는 사이메를 배웅하면서 파니스는 “뒤돌아 보지마라”고 소리친다. 아주 소박하고 전형적인 플랫폼 이별장면이지만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만큼 감독의 재능이 탁월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영화는 ‘요리와 인생’을 교차시키면서 요리에 숨어있는 인생의 묘미를 관객에게 전해준다. ‘달콤 쌉쓰름한 초콜릿’이나 ‘그린후라이드 토마토’ ‘카모메 식당’ 그리고 ‘시네마 천국’ 같은 류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훈훈하면서도 쓸쓸한 인생이야기’가 영화 전반에 펼쳐진다.
이 영화는 2003년 그리스에서 개봉하자마자 당시 내로라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을 제치고 7주 동안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때까지 침체해 있던 그리스 영화계는 이 영화로 ‘부활’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타소스 불메티스 감독은 1957년 터키 콘스탄티노플 태생으로 64년 그리스로 이주했다. 아테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LA) 장학생으로 영화제작을 공부했다. 물리학도 출신이어선지 영화 속 대사 중엔 '물리학적 시선'이 등장한다.
그리스로 돌아와선 국영방송국 PD로 일했다. 1990년 첫 영화 ‘드림 팩토리’로 테살로니카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2003년 내놓은 두 번째 영화 ‘터치 오브 스파이스’로 테살로니카 영화제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 음악상 등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도 10대 유럽영화 비평가상도 받았다.
DVD로 다시한번 꼭 보고 싶은 영화다. 블로그 방문객 여러분께도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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