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이 유우
일본영화 ‘훌라 걸스’는 재일 동포 이상일 감독이 2007년 폐광 직전의 ‘불모지 탄광촌’에 피어나는 희망과 감동의 이야기를 실화를 바탕으로 탁월하게 그린 '추억의 영화'입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것을 보면서 ‘좋은 영화’라는 느낌이 벅차게 밀려왔습니다.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뻐근해지더군요.
대한민국의 정세가 극도로 어지러웠던 시절 조간신문 1면에 한 여인이 기둥에 묶인 채 일그러진 얼굴로 울부짖는 모습의 사진이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강원도의 ‘사북 탄광촌’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마 노조위원장의 부인으로 그런 수모를 겪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무튼 그 ‘린치사진’은 당시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었지요.
자세한 사건 내막은 다 잊어버렸지만 아무튼 공포에 가득 찬 그 여인의 얼굴이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탄광’하면 인생 막장에 내몰린 사람들이 살기위해 마지못해 다다른 마지막 생업의 현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나마 요즘은 거의 다 ‘폐광’이 된 구시대의 산업이 되었지요.
그러기에 그런 곳에서는 꿈이라든지 희망이라는 단어는 좀처럼 찾기 어렵지요.
하지만 어린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뤄내 가는 영화의 과정은 왜 그렇게 언제 봐도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완강한 사고방식에 젖어있던 기성세대들이 뒤늦게 자신들의 미욱함을 깨우치고 ‘젊은 그들’을 돕기 위해 앞장서는 ‘협찬장면’이 더해지면 눈물샘은 최고조로 뜨거워지지요.^^
이른바 ‘성장 영화’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영화들이 다 그렇듯이 ‘훌라 걸스’ 역시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해 나가는 젊은이들을 그립니다.그들이 순수한 열정으로 ‘1백년 역사와 전통’의 허상만 믿고, 거기에 기대고 싶어 하는 굼뜬 기성세대들을 감화시켜나가는 그 과정이 참 눈물겹습니다.
남자들도 눈물 나게 한 이 영화의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생존마저 위협받는 위기를 이겨내려는 젊은이들의 몸짓과 이를 지켜보면서 드디어 ‘멋대로 변해버린’ 시대에 순응해가는 기성세대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낸 감독의 연출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꿈’이라는 삶의 버팀목을 발판으로 기어코 그 꿈을 현실로 이뤄내는 소녀들의 열정이 보는 사람들 저마다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활력소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몇 해 전 본 영국 영화 ‘빌리 엘리어트’도 ‘훌라 걸스’와 아주 비슷한 구조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한 ‘성장 영화’였습니다. ‘빌리’가 한 소년이 ‘꿈’을 이뤄나가는 이야기였던데 비해 '훌라 걸스’는 한 마을이라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힘을 합해 생존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훌라 걸스’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인생의 대명제가 주는 절박한 존엄성에 저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영화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단결력 강한’ 일본적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감동의 세기’가 훨씬 더 강렬한 영화입니다. 감동을 무게로 재기는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한 사람의 감동보다는 여러 사람의 감동이 합해질 때 그 강도는 세 지게 마련이지요.
<훌라 걸스>의 무대는 1965년 일본에서도 아주 시골인 후쿠시마의 이와키시라는 곳입니다. 1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탄광촌이지만 ‘멋대로 변하는 시대’에 ‘석유’라는 신종 자원에 떠밀려 폐광위기에 휩싸이고 있는 동네입니다. 얼굴에 숯 검댕이 자국이 가득한 한 소녀가 ‘훌라 댄서’를 모집한다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떼어내 가슴속에 소중히 간직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시작합니다. 한 소녀의 소중한 ‘꿈’이 잉태되는 순간이지요.
사나에라는 이 소녀는 ‘훌라 댄서’라는 신세계를 향해 한껏 부푼 가슴으로 둘도 없는 친구 기미코에게 ‘비밀 엄수’를 몇 번이고 다짐한 끝에 ‘훌라 댄서’로 함께 나서자고 말합니다.
사나에는 비록 엄마대신 어린 동생 셋을 건사하느라 학교에도 못가는 신세지만 “아무리 비누로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손톱 밑의 석탄 가루”가 걱정인 꿈 많은 소녀입니다. 그런 소녀에게 ‘훌라 댄서’는 인생을 바꿔줄 구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 소녀는 외칩니다.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아!”
사나에의 간곡한 권유에 세라복을 입고 학교에 가던 기미코도 엄마 몰래 훌라춤을 배우러 나섭니다.
문 닫을 탄광 자리에 ‘하와이안 센터’라는 휴양지를 세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아래 ‘훌라 춤’ 선생님을 도쿄로부터 모셔옵니다.
수줍은 탄광 소녀들은 배꼽을 보여주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훌라춤은 못 추겠다고 돌아서는 바람에 ‘훌라 춤’ 수강생은 사나에와 기미코를 포함해 고작 4명뿐입니다.
도쿄에서 내려와 ‘콧대 높은’ 히라야마 마도카라는 춤 선생은 첫날 이 탄광촌을 바라보며 ‘뭐야 이게’라고 절규합니다. 온통 검은 색의 옹색한 산골에 떨어진 자신이 가여웠겠지요. 게다가 화려한 도회풍의 춤 선생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역시 견디기 어려운 듯 마도카 선생은 시큰둥한 모습으로 소녀들을 바라봅니다.
탄광이 문을 닫고 수천 명이 해고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지만 남편을 탄광에 바치고 꿋꿋이 살아온 기미코의 엄마는 “턱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합니다. “천황폐하가 32분간이나 다녀가셨던 1백년 역사와 전통의 탄광이 왜 없어지겠냐”며 큰 소리 칩니다.
천황폐하가 32분 동안! 시찰한 것을 힘주어 말하는 엄마에게 기미코는 “오빠는 매일 8시간씩이나 그곳에서 일하잖아”라며 대듭니다. 그러자 오빠는 “폐하와 내가 같냐”라며 철부지동생을 야단칩니다.
엄마 몰래 학교대신 무용교실로 달려간 기미코는 들통이 나자 오히려 엄마에게 대듭니다. “난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내 인생은 내가 살아가는 것이야”라구요.
거의 모든 세상의 딸들은 아마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겁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어머니 세대’를 향해 반항해오면서 인류는 발전을 해온 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당찬 성격의 기미코는 처음엔 무용선생님과도 트러블을 일으킵니다.
어리버리한 시골소녀들에게 ‘한번 춤을 춰봐’라고 말하는 무용선생님을 향해 기미코는 ‘우리들은 선생님한테 춤을 배우러 온 것’이라면서 오히려 먼저 시범을 보여줄 것을 당당히 요구합니다.
당찬 모습의 기미코 역을 맡은 앳된 아오이 유우는 현재 일본의 모든 감독들이 함께 작업하고 싶어 한다는 촉망받는 신세대 여배우라죠.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오동통한 볼에 촉촉한 눈빛에서 앞으로 대성할 재목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85년생 아오이유우도 어느새 33세가 됐네요 여전히 맹활약중이랍니다)
‘훌라 교실’에 차츰 활기가 돌아갈 무렵 탄광촌엔 대량해고 사태가 현실로 나타나고 사나에의 아버지도 30년간 일해 온 탄광에서 밀려납니다. 아버지의 해고 사실도 모르고 동생들에게 ‘훌라 춤’ 시범을 보이던 사나에는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습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히라야마 무용선생은 사나에 아버지가 목욕하고 있던 남자 목욕탕에 돌진해, 그 아버지를 때려줍니다. 아주 보기 드문 장면이지요. 여자 무용선생님이 남탕으로 뛰어 들어가 학부형을 난타하는 장면! 객석에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결국 사나에는 아버지를 따라 유바리라는 다른 탄광촌으로 이사를 떠나게 됩니다. 기미코가 “이곳에 남아 훌라 댄서로 돈을 벌어 집에 송금해주면 안되겠니?”라고 말하자 사나에는 “어린 동생들을 돌봐줘야 해”라고 말합니다.
친구를 배웅하러 나온 소녀들이 일제히 훌쩍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사나에는 히라야마 무용선생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그 장면부터 영화는 관객들에게 ‘눈물’을 요구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었다고 외치는 어린 소녀의 절규! 손톱 밑의 석탄 가루가 지워지지 않는 게 고민이었던 철부지 소녀였지만 자신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나가야 좋은지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사나에가 그렇게 떠나고 한층 더 연습에 박차를 가한 ‘훌라 걸’들은 이제 예행연습삼아 동네 순회공연도 나설 정도가 됩니다.
그 와중에 탄광에 집착하던 기미코의 엄마도 “평생 어두운 탄광에서 일하는 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저렇게 춤을 추면서 남을 기쁘게 해주는 일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 아이들이 웃으면서 일하는 새 시대를 만들어 줍시다”라면서 ‘훌라 걸’들의 막강한 지원세력이 되어갑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엄마는 이제 소녀들의 든든한 백으로 나섭니다.
엄마는 외칩니다. “남편은 나라를 위해 석탄을 캐다가 탄광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는 게 전부인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제 시대는 변하고, 저 아이들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새 시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소개하겠습니다.^^&)
‘훌라 걸스’는 일본영화이긴 하지만 감독도 한국계이고 제작도 일본에선 유명한 재일동포인 ‘시네 콰논’ 대표 이봉우씨가 제작을 맡은 작품이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봉우씨는 우리 블로그에서 소개했던 일본영화 ‘박치기!’도 제작해 이미 일본 영화계에선 내로라하는 존재라고 합니다.
‘훌라 걸스’는 2007년 일본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등 ‘노른자위’상을 비롯해 11개 부문을 수상해 ‘최다 수상작’으로 뽑힌 영화입니다. 더구나 감독상을 수상한 이상일(李相日)이라는 감독은 재일동포 3세로 1974년생인 ‘청년 감독’입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에 나온 이상일 감독은 “아버지가 일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영화를 만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다소 서툰 우리말로 말하더군요. 이 장면이 영화 못지않게 사람을 뭉클하게 만들더군요.
소장파 재일동포 감독이 보수적 성향이 강한 일본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일본인들을 제치고 작품상과 감독상을 동시에 거머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수재형’으로 보이는 이상일 감독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영화학교에 다시 입학해 영화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2000년 영화학교 졸업 작품인 ‘청’으로 일본 영화계에 ‘혜성’이 나타났다는 평을 들었답니다. 그 이후 ‘스크랩 헤븐’ ‘69 식스티나인’등의 작품으로 계속 역량을 발휘했고 이번 ‘훌라 걸스’로 차세대 일본 영화계를 대표할 청년 감독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이 감독은 ‘훌라 걸스’의 시나리오도 직접 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난 한국계 감독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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