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소나타에 등장하는 쓰라린 일본 현실
명동을 어슬렁거리다가 사람의 마음을 잡아채는 영화포스터에 발걸음을 멈춘 일이 있다. 이제는 사라진
명동의 중앙시네마 건물 측면 벽에 커다랗게 걸린 영화포스터 ‘도쿄 소나타’는 요 근래 본 것 중 최고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당기는 힘이 서려 있는 듯했다. 야마하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하고 있는 앳된 소년의 옆모습엔 아릿한 슬픔이 묻어있어 사람의 마음을 잡아 당기는 힘이 서려 있는 듯 했다.
사춘기로 막 들어간 듯 여리고 예민한 소년의 프로필에는 이제 얼마 살지도 않았을 텐데 삶의 페이소스가 서려있어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켰다.
감독이 누군지 배우가 누군지도 모른 채 저 어린 사내아이의 피아노 치는 애잔한 옆모습에 끌려 ‘도쿄 소나타’라는 일본영화를 봤다.
‘보통 영화’가 아니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는 구로사와 기요시라는 감독의 2008년 작품으로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탔고, 세계 각국의 까다로운 영화비평가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상을 많이 타서가 아니라 이 영화는 현재 일본사회와 가족의 문제를 예리하면서도 서정적으로 제대로 그려낸 ‘수작’이라는 느낌이 확연했다. 감독의 너른 시야와 예술적 감각이 적절히 배합돼, 일본영화 특유의 ‘일상의 미학’을 아주 섬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잡아내고 있다. 더구나 사회파적인 감독의 시선이 잡아낸 ‘붕괴하는 일본가정’에 대한 우려와 엔딩 신에서 내보인 처방전에서 감독이 지향하는 시선에 동감의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일본영화를 적잖게 봐왔지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작품은 한번도 보질 않았다. 꽤 오래 전 영화잡지에 소개된 그의 이름과 작품을 본 적은 있었다. 그때 그 감독은 나의 ‘취향’에는 별로 맞지 않았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하지만 그가 몇 살이고 무슨 영화를 주로 만들어왔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이 영화 ‘도쿄 소나타’를 보면서 나의 취미인 ‘영화 보며 감독나이 알아 맞추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영화를 보자마자 ‘감독은 50대로군’ 이라는 감이 왔다. 인터넷 검색창을 클릭해보니 그는 1955년생! 오호!
혼자서 쾌재를 불렀다. 구로사와 기요시군(君)! 나이도망은 못 갔구려!^^*
‘도쿄 소나타’라는 서정적 느낌의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쓰라린 현실을 그리고 있다. 지금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경제위기가 일본의 한 가정을 어떻게 덮쳐버리는지를 잘 보여준 작품이다.
‘가정의 붕괴’ 혹은 ‘가족의 해체’는 현대사회의 단골 걱정거리다. 일본도 이 걱정 거리 앞에 맥을 못춘다.
대기업 서무과장으로 아들 둘과 ‘현모양처’ 아내를 거느린 가장이 하루아침에 실직해 거리에 내몰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출발한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계속된다. 구조조정을 통보받고 짐을 싸들고 거리로 나온 가장은 아내를 속이며 거리로 매일 출근한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말쑥하게 차려입고 바쁜 전화를 받는 고교동창을 거리에서 조우하지만 그 역시 실직자.
실직자 동창생은 실직의 ‘내공’이 어느 정도 쌓여 ‘대처법’도 남다르다. 휴대폰을 1시간에 5차례 벨이 울리도록 설정해 그는 마치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처럼 10분에 한 번씩은 바쁜 ‘업무 전화’를 받는 모습을 주변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아직 한국에선 그런 소리는 들어보진 못했지만 일본 실직자들의 ‘노하우’는 이토록 처절한 것 같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그런 '설정'을 해놓은 실직자들이 벌써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그 동창생은 자신의 집으로 친구를 데려가 자신의 직원인 것처럼 아내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만큼 아내에게만은 자신의 실직을 ‘1급 비밀’로 삼고 싶은 남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해서든 직장을 알아보려는 주인공은 처음엔 자신의 ‘전직’커리어를 내세우다가 결국엔 쇼핑몰의 청소부 일을 맡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내는 남편이 다음 달 보너스타면 외제차를 사려고 자동차 매장에 ‘우아한 사모님’차림으로 얼쩡거린다.
대학생 큰아들은 세계 평화를 위해 살고 싶다면서 ‘미군’에 입대할 것을 선언해 부모에게 큰 충격을 준다. 미국에 살지 않는 외국인도 미군에 입대할 수 있다는 걸 영화를 보면서 처음 알았다. 어쩌면 감독은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렇게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는 걸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같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아들과 그 친구들은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들어 어른들에겐 무조건 반항하고 싶어 한다. 피아노를 너무 배우고 싶어 하는 둘째는 엄마가 주는 급식비로 피아노를 몰래 배운다. 실직자 아빠는 큰아들이 미군에 입대하는 걸 결사반대하고 둘째가 피아노 배우려는 것도 주먹다짐까지 해가면서 막아선다. 하지만 자식이기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결국 두 녀석 모두 제 갈 길을 가고 만다.
안락한 ‘주부생활’의 복에 겨운 아내는 늘 외로워한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그녀의 공허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대한민국의 적잖은 중산층 주부들도 영화 속 이 아내처럼 공허함에 시달린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인간이란 모두 외로운 존재인 것을 ‘주부’ 들은 자기들만 외롭다고 착각하는 바람에 이런저런 문제가 터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은 아내와 아들에게 실직당해 초라하고 나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 들지만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가족은 갈래갈래 찢어지는 듯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감독은 2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자칫 ‘지루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면서 가정이 붕괴되는 이 모진 현대사회에서 구원의 터전은 결국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소나타’를 연주하는 둘째 아들을 통해 전하려 하고 있다.
릿쿄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처음 도전한 ‘가족 영화’장르에서 ‘구로사와 월드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구로사와 감독은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중의 한명으로 새 영화를 내놓을 때마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재능 있는 감독이다.
그가 작심하고 내놓은 이 ‘도쿄 소나타’는 일본을 걱정하는 중견 감독의 근심과 휴머니즘이 잘 녹아있어 보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가장의 실직과 가정의 붕괴’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소재로 경제위기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도 ‘남의 이야기’같지 않은 친밀감을 주고 있다.
한국 팬들에게도 낯익은 도쿄대 출신의 카가와 테루유키와 연기력 좋은 코이즈미 쿄코, ‘셸위 댄스’의 야쿠쇼 코지 등 일본 정상급 배우들이 화면을 빛냈다. ‘희망의 소리’를 아들의 피아노 연주에서 발견해 보여준 구로사와 감독에게서 '게자리태생'들 특유의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심성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50대 감독이 보여주는 영화세계는 그렇게 자상하고 섬세했다.
‘도쿄 소나타’는 경제위기 시대를 맞은 오늘의 일본 아니 오늘의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이어서 세계적인 공감을 얻어낸 것 같다. 놀라운 재미는 없지만 잘 만든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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