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영화

소외된 인생들의 성공 이야기는 눈물겹다- 내가 찍은 그녀는 최고의 슈퍼스타

스카이뷰2 2019. 7. 22. 15:50



  톰 디칠로 감독.

 

 

 

    내가 찍은 그녀는 최고의 슈퍼스타



  오랜만에 영화 한편을 종영 일 마지막 시간에 간신히 봤다. 안 봤더라면 아까웠을 영화다. 바로 ‘내가 찍은 그녀는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좀 싱겁고 너무 길어 말하기도 힘든 제목이지만 ‘뚝배기보다 장맛’이라는 말처럼 아주 재미있었다.  


언젠가도 우리 블로그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역시 영화는 감독이 한 50대 정도는 되어야 ‘숙수의 솜씨’를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느꼈다. 30대 감독이 만든 영화와 40대, 50대 감독이 만든 영화는 확연히 다르다.


뭐랄까 영화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감독의 ‘시야’가 연령별로 점차 넓어진다고나 할까. 50대 감독이 만든 영화는 대번에 느낄 수 있는 그런 구석이 반드시 있다.

물론 나만의 노하우다.^^


그동안 적잖게 봐온 영화보기의 저력이라고 한다면 제 자랑이라는 비웃음을 선사받을 수도 있지만 하여튼 30대 감독과 50대 감독의 영화는 하찮은 장면 장면에서 금세 알아차릴 수 있어서 영화보기의 소소한 즐거움을 더 느끼게 만든다.


이 영화도 그렇다. 현재 미국 인디영화계의 중진으로 맹활약중이라는 톰 디칠로 감독(1953년생)은 이 영화에서 영화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2008년 55세때 각본을 직접 쓰고 감독했다.

뉴욕대학에서 연출로 석사까지 한데다 30년 가까이 영화판에서 익혀온 연륜이 묻어나는 솜씨를 느낄 수 있어서 감독과 내가 특별한 어떤 교감을 주고받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 영화다.


직접 각본 쓰고 감독까지 했으니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관객에게 웬만큼 다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굳이 거대 자본을 끌어들여 대중의 입맛에 맞게끔 생쇼를 하지 않으면서도 ‘구수하게’ 산다는 것의 본질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감독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 연륜이 더해지니 편안하면서도 설득력있는 그런 솜씨를 느끼게 해준다.


원제목 ‘Delirious’를 ‘내가 찍은 그녀는 최고의 슈퍼스타’라고 장황하게 붙인 이유를 영화를 보면 알 것도 같지만 제목으로선 ‘실패작’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재미에 비해 손님이 안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 영화를 수입한 한국의 영화사는 제목 붙이는데 나름 엄청 신경 썼겠지만 이런 식으로 말하기조차 힘든 장황한 제목을 붙였다는 게 아쉽다. 이렇게 재밌고 좋은 영화는 많은 사람이 보는 게 좋을 텐데.

모름지기 영화든 책이든 식당이든 거의 모든 비즈니스 분야에서 이 ‘제목장사’가 반은 차지한다.


예전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대중소설이 크게 히트한 적이 있다.

처음엔 그 제목이 아니었는데 출판사가 바뀌면서 ‘무궁화~’로 붙이고 수백만부가 히트한 소위 대박을 터뜨렸었다. 무명의 저자를 하루아침에 남자신데렐라로 만들어 주었다. 너무 잘나가다보니 '표절시비'에도 휘말렸다. 그 이후 그 저자는 국회의원에 도전하기도 했다. 물론 떨어졌지만.


‘내가 찍은~’ 이 영화도 제목만 좀 근사했다면 얼마든지 히트할 수도 있었는데...

어쨌든 이 톰 디칠로 감독, 관객을 행복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감독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아무리 시시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나름의 ‘철학’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제 3자가 왈가왈부해선 안 된다는 걸 말하고 있다.


언젠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중에 ‘이발사에게도 철학은 있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아마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발사를 경시해서 그렇게 말하려 한 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읽은 지 하도 오랜 글이라서 전후 문맥은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이 영화를 보면서 그 ‘이발사의 철학’이 떠오른 것은 우리 사회에서 소외당하거나 발언권이 약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그 감독의 눈이 하루키의 눈과 겹쳐져서 일 것이다. 무릇 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들 중 하나가 그런 소외된 인간군상을 어루만져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연예인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그들의 사생활 사진을 찍어 연명해가는 파파라치 레스(스티브 부세미)와 배우지망생이지만 집도절도 없는 홈리스 토비(마이클 피트) 두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중년의 독신남 레스는 비록 파파라치이긴 하지만 ‘세상을 뒤흔든 순간’을 찍고 말겠다는 프로 사진작가로서의 ‘자존심과 철학’을 갖고 있다. 

비록 스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주제지만 당당할 수 있는 건 그런 ‘직업철학’ 덕이다.


레스는 길거리에서 스타를 기다리다 우연히 알게 된 홈리스 토비가 오갈 데가 없다며 애원하자 그를 자신의 비좁은 아파트에 기거하도록 허락한다.

예전 우리 어렸을 때 오시이레라고 하는 벽장 비슷한 곳에 토비의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장면이 우스꽝스럽다.


파파라치와 홈리스 청년의 동서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조수 겸 말동무 삼아 토비를 데리고 찍기 어려운 스타의 사생활 사진을 헌팅하는 데 애쓰는 레스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면서도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려는 모습이 숙연하게 느껴진다.


진짜 파파라치처럼 느껴지는 스티브 부세미라는 50대 초반 남자배우의 연기도 일품이다. 파파라치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큐멘터리로 찍은 것처럼 자연스럽다. 

노부모에게 여전히 홀대당하는 레스의 모습과 생모가 자신의 얼굴을 칼로 찔러 상처가 남아 있는 토비는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더 가까워진다. 동병상련의 친구가 된 것이다.


레스는 아들 뻘인 토비에게 수시로 ‘교훈 조’의 인생철학을 주입시키려고 한다.

영화에서 감독은 ‘흐르는 대로 살아간다’라는 말을 자주 들려준다. ‘순리대로’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토비라는 청년의 인생유전도 재밌다. ‘선한 품성’의 토비는 고비 고비마다 ‘귀인’들이 도와줘 결국은 톱스타 자리에 올라간다. 이런 설정도 어쩌면 감독이 ‘동양적 인생관’에 조금은 경도된 것처럼 보인다.

감독의 외모에서도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 분위기가 감도는 것 같다. 


어느 날, 토비는 최고 톱스타인 여가수 카르마 옆에 우연히 서 있다가 그녀의 호텔에서 하룻밤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을 잡는다. 물론 토비가 의도했던 건 아니다. 이럴 때 우리는 운명처럼 만났다유행가 가사가 어울리는 것 같다. 레스는 이런 토비의 사정도 모른 채 ‘출세하니까 배은망덕’해졌다고 난리를 친다.


영화는 이렇게 우연한 행운이 계속 찾아오는 토비를 보여주고 그 옆에서 나이 들고 기회도 못 잡은 듯한 초라한 중년사내 레스의 경박스런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그 나이되도록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도 알아주지 않는 레스의 일상을 보여주는 배우 스티브 부세미의  연기력이 능청스럽다.


‘남자 신데렐라’같은 토비의 성공하는 모습과 함께 레스의 진짜 같은 연기를 보면서 오랜만에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톱스타 반열에 들어선 토비는 이런 말을 한다. “사랑하는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가야죠.” 인생, 흐르는 대로 살아간다는 건 그의 ‘스승’ 레스의 말버릇이다. 아마 감독은 그렇게 사는 게 편하다는 걸 절감했나보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건 감독도 나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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