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배우 윤정희 알츠하이머 투병

스카이뷰2 2019. 11. 11. 13:49



1967년 23세때 영화 ‘청춘극장’으로 데뷔,60년대 남정임·문희와 함께 ‘트로이카’로 불리던 윤정희의 20대 모습. 스포츠동아DB





2016년 7월 본지 인터뷰 때 백건우가 빗을 꺼내 윤정희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있는 모습. 머리를 다 빗은 뒤 윤정희는 백건우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메르시(고마워).”

2016년 7월  인터뷰 때 아내 윤정희의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있는 백건우씨. “여보, 메르시(고마워).” /오종찬 기자



 

 평온한 일요일을 보내던 어제 대한민국 대표 원로 여배우 윤정희씨가 10년째 알츠하이머를 앓아왔고

요즘은 딸의 얼굴 조차 몰라볼 정도로 증세가 심각하다는 보도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물론 '젊은 치매'도 있고 60대에도 '증세'가 심한 치매환자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1944년생,75세라면 아직은  '괜찮을 나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던 일반적 상식을 뒤엎듯 그의 중증 치매소식은 팬들은 물론 웬만한 한국인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 같다.

남편과 딸이 전하는 '증세'는 인생무상을 새삼 느끼게 한다. 요즘도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촬영 스케줄 어떤가"라고 묻거나 남편의 연주상황에 대해 같은 질문을 100번쯤 한다는 것이다. 전형적 '치매환자'증세 중 하나다. 보도된 내용 하나하나가 천하남이 들어도 애잔한 기분을 떨칠 수 없게 한다. 

그만큼 윤정희 씨는 개발연대 시절 대한민국에서 특히 '사랑받아온 여배우'였다. 1960년대 7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활동해왔고, '총명해 보이는 미녀'로 알려졌던 그가 '슬픈 노년의 병'을 앓고 있다는 건 만추의 스산한 바람과 함께 우리를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도 '듬직한 바위'같아 보이는 2세 연하 남편 피아니스트 백건우씨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다는 게 '불행 중 다행'이다. '쾌유'는 어렵겠지만 가족이나 영화팬들의 '위로와 성원'속에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기를 바란다.  인생은 슬프다!!! 쎄라비!(C'est la

vie!그것이 인생이다.)



충무로의  영원한 연인 윤정희  <1994년 졸저, '한국의 1/2을 만드는 여성들' 중에서>



 1994년 4월 2일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에서 '만무방'으로 여우주연상을 따낸 윤정희(50)씨는 감격에 겨워하며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특유의 비음이 섞인 목소리로 "저 영화 계속 할 거예요"라며 울먹거리는 쉰 문턱에 들어선 이 중년 여배우에게 관중들은 많은 박수를 보냈다.


우리나라처럼 여배우들의 연기생명이 짧은 영화풍토에서 그는 나이든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여줬다는 점에서도 당당한 '배우 졍신'에 기여했다고도 할수 있다. 아마 그 나이의 여배우가 여우주연상을 탄 건 국내에서는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1991년, 청와대에서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문화예술인의 시 낭송의 밤'행사가 열렸다. 그때 윤정희씨는 여배우답게 화사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참석했다. 1966년 그는 120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은막에 데뷔,60,7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톱스타였다.


영화배우를 동경했던 어린 시절 나는 신문에 실린 예쁜 신인 여배우  윤정희의 사진을 보고 한참이나 부러워했던 기억이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뒤  청와대 문화행사에서 그와 인사를 나누는 '영광'을 누렸다. 쉰살 무렵인데도 여전히 예쁜 여배우는 교통이 너무 막혀 혼났다며 동년배 연극배우 손숙에게 푸념을 했다. 여배우의 그런 푸념을 함께 듣던 나는 생활인으로서의 그 모습에서 인간적인 색다른 매력을 느꼈다.


이윽고 낭송회가 시작되자 그는 순간적으로 '기품있는 여배우'로 다시 돌아갔다. 청중 앞에서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서정주 시인의 시 '자화상'을 약간 떨리는 음색으로 낭송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여배우로서의 매력이 가득했다. '천생배우'다 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여러 명의 내로라하는 멋쟁이 여성인사들이 시를 낭송했다. 내 개인 취향으로는 윤정희가 제일 멋지게 보였다. 물론 낭송하는 시가 워낙 좋았던 탓도 있었겠지만 '국민학생' 시절부터 동경하던 여배우가 시를 낭송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 만으로도 나는 그날의 '본전'은 충분히 건졌다는 치기 어린 생각마저 했다.


그 얼마 후 운정희씨는 서정주 시인의 시집 '화사집에 실린 시 스물 네 편 전부를 음악과 함께 낭송해 담은 카세트 테이프와 콤팩트 디스크를 내놓았다. 그가 낭송하고 남편 백건우 씨가 배경음악을 반주한 이 낭송집은 아마 국내에서는 최초로 여배우가 '배우자와 함께' 선보인 문화상품이었을 것이다. 윤씨 부부는 서정주 시인을 평소 부모처럼 깍듯이 모셔온 인연으로 '화사집' 출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일에 앞장 섰다고 한다.


파리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그는 "유럽에서는 국민학교 어린이들에게 시를 외워오도록 하는 것이 숙제이며 학교 교육에서도 시와 함께 사는 생활을 가르친다"면서 "우리도 어린아이 시절부터 시를 가까이 하는 습관을 길러주면 여유있고 따뜻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영화계에서는 배우 윤정희씨를 똑똑한 여자라고 부른다. 그의 눈빛에는 총기가 어려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석사 여배우로 한때 그가 출연하는 영화 광고문안에는 이 '최초의 석사 여배우'라는 글귀가 반드시 들어갈 정도로 학구파 여배우의 대명사로 통해왔다. 게다가 여배우로는 또 최초로

파리 유학을 떠나 명실상부한 지성파 여배우로 인정받기도 했다.


60년대 당시로는 거금 50만원의 현상금을 내고 공모한 '청춘극장'의 히로인 오유경 역 모집에 당당히 합격,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 영화로 대종상 신인상을 따내면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당시 '청춘극장'에는

허은옥 역에 고은아가, 백영민 역엔 신성일이 캐스팅된 초호화 배역이었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윤정희 씨는 자존심 강한 여배우로도 알려져 있다. 이십대 한창시절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한 여배우보다 자신의 배역이 다소 처지자 감독에게 "이런 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면서 영화출연을 거부하고, 그때부터 영화사 전속이 아닌 프리랜서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자존심 마케팅'이 성공한 셈이다. '분례기' '안개' '장군의 수염' '석화촌' 등 300편이 넘는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고 대종상 아시아 영화제 청룡상 등에서 여우 주연상을 20차례 넘게 휩쓸었다. 대단한 실력파 여배우다.


윤씨는 그렇게 한 7년 쯤 충무로 영화판에 군림하다가  돌연  파리 유학을 결행했다. 1974년의 일이다. 그때 장안에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지금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당시에도 유명 여배우가 해외로 나가기만 하면 이상한 소문들이 금세 퍼지곤 했다. 그런 연예게 풍토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파리유학은 당시 그에겐 어떤 행복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 행복이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혼신을 다해' 바친 연기력이 소진해 가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최고권력자'를 둘러싼 루머엔 견디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1960년대 그와 함께 황금의 트로이카로 불렸던 문희 남정임 등이 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갈 때에도 윤정희가 영화인으로서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그의 지적 탐구욕도 한 몫을 했으리라 본다.


지금도 공부하는 여배우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는 그는 이제 단순한 연기자 차원에 머물지 않고 작품을 직접 선정,제작까지 하는 본격적인 영화제작자로서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감독으로 나설 준비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만큼 영화에 대한 욕심이 대단한 '천생배우'다.


29년째 여전히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그의 저력은 미모에만 의존했던 종래의 여배우들과는 달리 의식을 갖고 문화적 감각을 끊임없이 갈고 닦아온 '노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의 방센 가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지만 '영화인의 영혼'은 언제나 충무로 영화판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