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크백 마운틴>과 청와대 행정관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 하겠어요.’
요 며칠 새 영화와 현실에서 만난 ‘사랑의 종말’에 대해 곰곰 생각하다가 문득 이런 유행가 가사가 떠올라 혼자 웃었습니다.
예전엔 좀 유치하다는 느낌을 가졌던 그 가사가 ‘정곡’을 찌른다는 기분이 들 정도로 최근 본 영화나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종말’은 예외 없이 ‘눈물’로 엔딩 마크를 찍었습니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눈물’도 없었겠지요.
아무리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가 만고불변의 진리라지만 ‘이별 없는 사랑’은 불가능한 것일까라는 우매한 생각도 해봅니다.
나이가 몇인데 ‘사랑 운운’하느냐고 하겠지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이 ‘사랑’이란 테마는 삶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꼭 남녀 간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라는 전제조건이 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무슨 일이든 정성과 열정이 바쳐지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그 ‘사랑’은 ‘생명’의 다른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생명의 원동력이 바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며칠 전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미국 영화를 봤습니다. 52세의 중국인 감독 이안(李安)이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금년 ‘78회 아카데미 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수작이라 한국에 개봉 전부터 기다려지던 작품이었습니다.
아카데미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다가 감독· 음악· 각색상의 3개 부문을 수상했지요. 이안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처음엔 영어로 수상소감을 말하다가 말미에는 대만· 중국· 홍콩 등지의 중화권 동포들을 호명하면서 ‘모국어’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장면이 퍽 인상 깊었습니다. 예술가에게도 ‘조국’은 언제나 그리운 ‘영원한 어머니의 나라’인가 봅니다.
이안 감독은 대만에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 30년 가까이 살며 영화에 매달려온 사람인데 미국 사람보다 더 미국인의 정서를 잘 아는 감독으로 평가 받고 있다고 합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잘 알려진 대로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위 요즘 ‘시대의 트렌드’라고 하는 동성애 코드를 기반으로 만든 영화죠. 이안감독은 그 전에도 ‘결혼피로연’ 등의 작품에서 ‘남자들의 사랑’을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번 영화는 좀 더 본격적이고 진지하게 동성끼리의 사랑에 접근해갔지만 결국은 ‘사랑의 본질’을 동양인의 감각으로 접근한 것이 미국인의 정서를 울린 것이라고 봅니다.
며칠 전 TV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이 영화의 주연 남자배우들과 조연 여배우들이 나와 영화 제작과정에서의 뒷얘기와 소감을 말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이안 감독에 대한 존경심과 애정도 상당한 듯 보였습니다.
진행자인 그 유명한 흑인여성 오프라 윈프리는 시청자들을 향해 “꼭 보셔야할 영화”라고 두 번이나 힘주어 말하더군요. 만약 우리나라에서 토크쇼 진행자가 “이 영화는 꼭 보시라”고 했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 그들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부럽게 여겨졌습니다.
미국인들이 그만큼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를 영화를 보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인스턴트식 사랑’이 판치고 심지어는 ‘사랑의 부재’를 한탄하는 그들이기에 영화 속 두 남주인공의 ‘기나긴 사랑 이야기’는 심금을 울렸을 것이고 어쩌면 ‘경이로운 세계’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갓 스물을 넘긴 두 청년,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길렌할)은 여름 한철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수 천 마리의 양떼를 치는 카우보이들입니다. 광활한 대자연 속에 단 둘이 일하던 그들은 어느 날 함께 밤을 지냅니다.
며칠 뒤 그들은 ‘기약 없는 이별’을 하게 됩니다. 각자의 생활로 돌아간 그들은 각각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다가 4년 뒤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잊은 줄 알았던 ‘사랑’을 확인합니다.
에니스의 부인이 ‘그들의 장면’을 목격하며 비탄에 젖는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습니다. 남편과 ‘불륜의 상대’를 느닷없이 맞닥뜨리고 난 뒤 그녀가 겪어야 했을 정서적 혼란이 선명하게 그려집니다. ‘남편의 남자’라는 존재가 그들 부부생활에 걸림돌로 작용하면서 부부는 헤어지고 말게 되지요.
또 한명의 남주인공 잭 역시 원만한 가정생활을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에니스 보다 감성적인 잭은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몇 년에 한 번 만 만나야 하느냐”며 함께 새 출발하자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그들은 몇 년에 한 번 만나 ‘낚시’를 핑계로 고작 며칠 함께 있다 헤어지는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냥저냥 살아갑니다.
지금도 ‘동성애’에 대해선 선뜻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닌데 하물며 1960년대 초반에는 더 심한 사회적 압박을 느꼈겠지요.
통신수단조차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에 그들은 편지로 만남을 약속해 오다가 어느 날 에니스가 자신이 보낸 편지가 ‘수취인 사망’이라는 도장이 찍혀 되돌아오면서 그들의 사랑도 ‘종지부’를 찍습니다. ‘클로스 업’으로 비쳐주는 ‘수취인 사망’이란 글자가 가슴을 아리게 하더군요.
결국 이 두 남자의 사랑은 한 쪽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20 여년의 질긴’인연을 끝냅니다. 동성의 사랑 자체에 대해선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사람과 사람간의 ‘애틋한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들의 사랑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미국인들은 이런 ‘기나긴 인연’의 지속과 ‘한없는 기다림의 미학’에 경이로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람이 사람을 저토록 깊이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점에선 저도 깊은 감동을 받았으니까요.
젊은 두 남자 배우 특히 ‘과묵한 동양인’같은 에니스의 연기도 큰 몫을 했다고 봅니다.
어쨌든 이런 ‘기나긴 사랑’이 주는 울림은 현실의 비틀린 사랑이야기를 접하면서 더 돋보이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청와대 행정관의 아내 살해사건’은 온 국민을 경악케 했습니다.
아마도 ‘청와대가 생긴 이래’ 처음 있었을 이번 살인사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봅니다. 30대의 젊은 부부가 그것도 현 정권의 핵심부서에서 일한다는 소위 ‘신진 엘리트 세력’인 그들이 어찌 그리 흉악스런 ‘사랑의 종말’을 보여주었을까요?
아파트 폐쇄회로에 찍힌 그들 부부의 ‘마지막 외출’ 장면은 지금까지 봤던 어떤 장면보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렇게 엘리베이터에 탄 것이 그녀 생의 마지막이란 걸 전혀 몰랐겠지요. 불과 한 시간도 안 돼, 그녀는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을 남편에 의해 교살 당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도 끔찍한 ‘사랑의 종말’이지요.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도 이 시대엔 통용되지 않나봅니다.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 넥타이를 집어넣고 나섰다니까 ‘준비된 살인’인 것 같습니다.
싸움의 발단은 심야에 걸려온 ‘여자의 전화’였다니, 젊은 부부의 싸움치곤 좀 뜻밖이네요. 그 나이 정도면 그래도 서로 좋을 때인 것 같은데.
이번 사건은 단순한 ‘부부싸움’으로만 보기엔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운동권 출신’의 이들 커플은 남편은 그 들어가기 어렵다는 ‘청와대 행정관’으로 부인은 집권여당의 부대변인이라는 여성으로는 ‘녹록지않은 자리’를 차지했던 ‘파워 부부’였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39세 나이에 청와대 3급행정관이라면 ‘벼락출세’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일반 공무원이라면 행정고시를 붙은 엘리트들도 15년정도 걸려야 겨우 올라갈 수 있는 자리라고 하더군요.
‘대통령을 모시는 막중한 자리’에 낙하산으로 내려간 ‘운동권출신’이라 그렇게 과격한 종말을 선택했을까요? 아니 그것보다도 혹시 ‘청와대 인사시스템’에 근본적 문제점은 없었을까요? 시중에는 “요샌 개나 소나 다 청와대에서 일한다”는 우스갯말이 떠돌아다닌답니다.
‘새 사랑’이 얼마나 ‘치명적인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를 교살할 정도로, 아니면 그토록 소중한 ‘일’을 팽개칠 정도로 강렬했는지 궁금하군요.
만약 그렇게 ‘죽음보다 강한 사랑’이었다면 차라리 자신이 죽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청와대 행정관 사랑 때문에 자살하다’라는 제목이 ‘애인 때문에 아내를 교살하다’는 쪽 보다는 더 절절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모든 게 끝난’ 그들에겐 부질없는 소리겠지만 그들이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더라면 그런 극단의 선택은 안했을 텐 데라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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