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유서깊은 예술적 DNA를 계승한 영국영화
‘영국 영화’하면 일단 안심하고 볼 수 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전통의 명가’가 빚어내는 솜씨는 대대로 전승되어 거창하게 말하자면 ‘문화적 'DNA’에 자리 잡게 된다고 생각한다.
‘영국 영화’가 바로 그런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셰익스피어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영국인의 ‘문화 예술적 전통’은 세계의 종주국으로서 그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영국국민의 65%가 ‘휴가 선용법’으로 소설읽기를 꼽고 있으며 현재 세계 뮤지컬계를 장악하고 있는 ‘BIG4의 뮤지컬’들이 모두 ‘메이드인 잉글랜드’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제작하는 ‘문화예술품’은 일단 기본은 보장한다고 본다.
조안 롤링이라는 평범한 가정주부가 쓴 ‘해리포터 시리즈’가 세계 독서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만큼 영국은 문화예술분야에서는 여전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의 위상을 확인해 주고 있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영국 영화를 오랜만에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 영화는 역시 ‘영국스러운’ 고급의 우아함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언제나 영국영화를 보고나면 왠지 풍요로워지는 감수성, 문화적인 충족감에 행복해지는 마음까지, 분명 다른 영화를 봤지만 보고난 소감은 비슷해지는 그런 경험을 또 다시 했다.
꽤 오래 전에 봤던 <전망 좋은 방>이나 <하워즈 앤드>와 요근래의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등도 ‘행복감’을 선사하는 영국영화다.
<오만과 편견>의 원작은 거의 200년 전의 여성작가 제인 오스틴이 쓴 소설이다. 19세기에 쓴 소설을 21세기에 영화로 만들었지만 ‘오래된 얘기’가 아니라 바로 오늘 지금 시대의 이야기 같은 친숙함이 느껴진다.
역시 고전 명작의 파워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19세기 이야기라 ‘따분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지금 서울에서 바로 일어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영화는 시공을 초월한 ‘동시성’을 과시한다. 감독의 솜씨이자 ‘빛나는 원작자’의 재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먹고살기 힘든 시골에서 다섯 딸을 키워낸 ‘엄마’는 이제 장성한 딸들을 ‘부잣집’으로 시집보내는 것이 ‘지상 최고의 과제’이다. 앉으나 서나 그저 딸들 시집보낼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품이 21세기의 대한민국 엄마들과 영락없이 닮은꼴이다. 딸들도 ‘부자와 결혼하는 게 최대의 꿈’이어서 ‘멋진 백마 탄 왕자님’이야기에 목을 맨다.
그런 다섯 자매 중에 둘째 딸 엘리자베스만은 ‘돌연변이’로 자아가 강하고 ‘조건’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당찬 ‘신여성(?)’이다.
그날이 그날인 조용한 시골마을에 어느 날 명문대가집 아들들이 나타나 다섯 자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지금은 다소 약해졌겠지만 19세기 영국은 철저한 계급사회로 ‘신분’을 뛰어넘은 ‘사랑’은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았다.
하기야 21세기 한국에서도 여전히 ‘신분’이나 ‘재산상태’에 따라 혼인이 이루어지는 것은 여전한 것을 감안해 볼 때 그 당시에는 얼마나 그러한 ‘제약’이 심했을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영화는 비록 19세기 영국의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당시의 처녀들이 지향하는 꿈과 사랑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힘을 보여준다.
화려한 무도회 장면들이나 시종일관 흐르는 풍성한 클래식 선율 속에 19세기와 21세기를 구분하는 장벽을 뛰어넘어 영화에 몰입하다 보면 두 시간이 언제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진행된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난 사건이나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섯 자매와 극성쟁이 엄마, ‘가정의 중심’을 잡아주는 고목나무 같은 아버지가 보여주는 ‘일상의 힘’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마을에 들른 ‘부잣집 도련님’ 두 명과 사랑의 줄다리기를 벌이는 자매, 그 중에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둘째딸 엘리자베스(키이라 나이틀리)와 남주인공 다아시(매튜 맥파든)의 ‘사랑싸움’은 그 결말이 훤히 보이지만 그래도 재미있다. 엘리자베스는 ‘오만하게’ 보이는 다아시로 인해 언니의 혼사가 깨졌다는 맹신(편견) 속에 그를 ‘평생 미워하기로’ 한다.
“당신같이 오만한 남자와는 죽어도 결혼 안해요”라고 절규하던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의 ‘진심’을 알아내고 “난 바보가 됐어요”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결국 ‘무뚝뚝하고 오만한’ 다아시도 “난 마법에 걸렸소”라며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다.
결국 영화는 그렇고 그런 ‘연애와 결혼의 지침서’ 인 셈이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전혀 지루하지 않다. 특히 극성쟁이 엄마가 딸들을 ‘훈육하는’ 대목이나 ‘자존심’을 앞세운 처녀들의 ‘속 보이는’ 튕기기 작전을 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일상의 시시한 일들’을 소재로 이 정도의 솜씨를 보여준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영국영화의 파워인 것 같다.
되는 일 없어 우울한 당신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영화로부터 특별한 것을 기대하는 분들에겐 다소 미흡할 것 같지만 인생 자체가 뭐 특별한 게 없는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시고, 소소하게 지나가버리는 순간들을 아쉬워하는 분들에겐 안성맞춤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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