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영화 크래쉬와 브로크백 마운틴

스카이뷰2 2006. 4. 16. 13:38
 

 

 

      영화 ‘크래쉬’와 ‘브로크백 마운틴’


어제 미국 영화 ‘크래쉬’를 봤습니다. 지난 3월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에서 최고의 영예인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해 ‘각본상’과 ‘편집상’ 등 ‘알짜배기’ 3개 부문의 상을 받았던 영화라서 개봉하면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영화입니다.

 

시상식을 생중계한 텔레비전을 통해 감독 폴 해기스와  여배우 샌드라 블록과 출연배우들이 손뼉을 치며 환호하던 장면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할리우드의 유명여배우인 샌드라 블록은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보고 출연료를 받지 않고 ‘무조건’ 출연하겠다고 했고, 덩달아 다른 유명배우들도 출연하는 것만으로 ‘영광’으로 알겠노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크래쉬’는 제작단계에서부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금년 아카데미영화제에선 이 ‘크래쉬’와 ‘브로크백 마운틴’, ‘뮌헨’ 등이 최고 작품상 후보로 경합을 벌이다가 결국 ‘크래쉬’가 상복(賞福)이 있었는지 영예의 트로피를 거머쥐었죠.


서울에서는 ‘브로크백 마운틴’이 먼저 개봉해, 저도 지난 달 이 영화를 먼저보고 블로그에 글을 올린 터여서 ‘크래쉬’를 보러 가면서는 거의 ‘아카데미 심사위원급 관객’의 심정이었습니다. 두 영화를 모두 보고 ‘평점’을 매겨본다는 건 꽤 재미있는 일 같았습니다.


스스로 ‘심사위원’의 입장이 되어 영화를 보자니 긴장감마저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공평한 심사’를 위해 사전에 자세한 영화 줄거리나 영화평 같은 것은 일절 보지 않고 영화관에 갔습니다.^^  


관객이 많은 줄 알고 전날 예매까지 했지만 예상보다 빈자리가 더 많았습니다. 관객이 많이 든다고 꼭 좋은 영화는 아니지요. 베스트셀러가 꼭 ‘양서(良書)’의 보증수표가 아니듯.


하지만 소위 ‘재미있는 영화’에는 관객이 ‘귀신같이’ 알고 몰려든다는 걸 감안할 때 그렇게 ‘깨가 쏟아지듯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감(感)을 영화시작하기 전에 받았습니다.


역시 그 감(感)대로 ‘크래쉬’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의미 있는 영화’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용(用)’영화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매년 정초에 대한민국의 각 신문사에서 ‘백만 문학청년’들이 ‘꿈의 등용문’으로 여기는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발표하면서 싣는 심사위원들의 평들을 보면  ‘신춘문예용 모범답안 스타일’같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그런 평은 종종 당선작에도 해당되지만 대부분은 아깝게 낙선된 작품들을 아쉬워하면서 앞으로 좀더 ‘힘’을 내라는 ‘격려용’ 멘트로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신인’다운 창의력이나 실험정신이 약하고, 너무 ‘깎아 놓은 밤톨같이’ 뺀질뺀질한 작품들을 평하면서도 나오는 말이기도 합니다. 뭐랄까요, 상투적이거나 작위적인 냄새가 너무 많이 날 때도 지적받는 말이기도 하지요.


‘크래쉬’를 보면서 ‘자칭 심사위원’인 저는 ‘아카데미 작품상용(用) 영화’라는 평을 달아보았습니다. ‘도덕 교과서적’이면서 ‘작위적’인 그런 기운을 감지했거든요. 좀 심하게 말하자면 ‘단순한 미국인들의 정서’에 기를 쓰고 어필해 따낸 전형적인 ‘영화제용 수상작’이라는 평을 내놓고 싶군요.


그렇다고 ‘크래쉬’가 형편없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나름대로 ‘수작(秀作)입니다. 아니 각본을 직접 쓴 폴 해기스 감독의 탁월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그 정도의 영화를 내놓는 다는 것은 감독의 역량이 어지간 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재능 있는 영화 각본가로 작년에 이어 올해 연속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각본가답게 해기스 감독의 솜씨는 거의 ‘숙수(熟手)’의 경지에 올라 있더군요.


게다가 이 영화는 20여 년 간 각본만 써온 그가 직접 메가폰을 든 ‘감독 데뷔작’이어서 그야말로 ‘신인’의 패기마저 느껴지는 그런 작품이어서 비판보다 칭찬할 대목이 더 많은 영화였다는 걸 먼저 말하고 싶습니다.


얼마전 일본 영화 ‘박치기’를 보면서 ‘50대’가 만들었을 거라고 느꼈듯이 ‘크래쉬’를 보면서도 ‘50대의 연륜’이 감지되었습니다. 나중에 자료를 보니 역시 폴 해기스도  52세랍니다.^^

 

아무래도 그렇게 감독의 ‘사회를 보는 시야’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면 ‘50대의 안목’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뭐랄까요, 인생이라는 복잡하면서도 또 어쩌면 단순하기도 한 괴기스러운 ‘생존 과정’의 전반에 대해 ‘이야기할 줄 아는 능력’은 그 정도의 연령에 도달해야 가능할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크래쉬’는 알려진 대로 ‘다인종 국가’인 미국의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인종차별과 갈등’을 다룬 작품입니다. 말 그대로 복잡합니다.

영화의 구성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봐야 눈에 들어옵니다.


제 자랑 같지만 저는 영화 보기 전 ‘아카데미 심사위원’ 자격으로 본다는 ‘사명감’아래 봤기에 ‘영화의 전모’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만 같이 간 친구는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영화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그렇게 관객이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야말로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같은 그런 분위기의 영화였습니다.

폴 해기스 감독의 치밀한 각본솜씨는 대단했습니다. 얼기설기 복잡하게 짜여진 영화의 플롯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사전지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더군요.


영화의 간략한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미국 LA 교외의 한 도로에서 시신이 발견되면서 현장에 도착한 흑인 수사관 그레이엄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순간, 이야기는 36시간 전으로 돌아가 10여명의 등장인물들의 일상(日常)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거기서 이 영화의 주제인 ‘인종 차별과 갈등’이 아주 세밀하게 그려집니다.


미국하면, 자유가 넘치고 민주주의의 최고 선진국이자 세계 최강대국으로 ‘억울한 인권침해’는 거의 없을 것으로 알고 있기 쉽지만 영화에서는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들이 어떻게 ‘선량한 시민’을 마구잡이로 괴롭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물론 여기서 횡포를 부리는 경찰은 대개 백인이고 당하는 자는 대개 흑인입니다.

 

트레일러에 살면서 부친을 간병하느라 삶에 지쳐 늘 분노에 찬 하층계급의 백인 경찰이 텔레비전 감독으로 부유한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있는 흑인부부에게 성적(性的) 모욕을 가하는 장면은 ‘저게 미국 맞아?’라는 의구심을 일게 할 정도입니다.


만약 한국에서 저런 일이 일어났다면 난리가 났을 텐데. 흑인 감독은 자기 아내가 거의 성희롱수준의 모욕을 당하는 걸 목격하면서도 꾹 참고 맙니다.


그 뿐 아닙니다. 영화에 나오는 백인 경찰 혹은 백인들은 드러내놓고 흑인을 경멸하고 조롱합니다. 심지어는 ‘수틀리면’ 쏴 죽여 버리겠다는 ‘총구의 권력’을 가진 자의 횡포를 공공연하게 보여줍니다.


백인의 흑인에 대한 차별만 있는 게 아닙니다. 흑인은 또 ‘자유의 나라’에 어렵사리 도착해 ‘천신만고’ 살아가는 아시아인들을 경멸합니다. ‘흉보고 미워하면서 닮는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러니까 ‘먹이사슬’ 구조의 최하층엔 ‘아시아계’인 한국인 중국인 베트남인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감독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이미지 역시 모멸스럽습니다. 흑인이 모는 차에 친 ‘인신매매업자’한국인은 응급실로 허겁지겁 달려온 한국인 아내에게 “그 수표 빨리 캐시로 바꿔와”라고 소리칩니다.

 

일각에서는 감독이 한국인을 너무 멸시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감독이 그렇게 그린 건 우리 한국 사람들이 미국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 나가고 있는지를 거의 정확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봅니다.


백인경찰에게 ‘성희롱수준’의 검문을 당한 흑인 여성은 두고두고 흑인남편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결국 ‘운명의 장난’으로 그 흑인 여성은 교통사고를 당해 거의 죽기 일보 직전 바로 그 ‘백인 경찰’의 목숨을 건 구조 활동으로 ‘구사일생’합니다. 이 대목에선 ‘순수하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조건 없이 ‘순수한 인류애’가 느껴졌던 겁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나온 멕시칸 열쇠수리공의 여섯 살 바기 딸아이가 인종이 다른 어른들끼리의 ‘충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장면에선 슬그머니 화가 났습니다.


뭐랄까요, 감독이 ‘재기가 승하다보니까’ 너무 기교를 부려 ‘모범답안’을 작성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냥 ‘순수하게 자연스럽게’ 호소하는 것하고 ‘재주를 부려’ 눈물을 짜내려하는 것쯤은 웬만한 관객들이라면 다 가려낼 줄 알거든요.


감독의 ‘재주’는 인정하지만 ‘영합’하려는 자세는 그렇게 점수를 줄만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쯤 되면 ‘엄정한 심사위원’스럽죠?^^

 

이 영화에는 그렇게 ‘작위적’으로 ‘화해’를 시도해 나가려는 장면들이 좀 많이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상투적’이라는 평가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런 대목들 탓이라고 봅니다.


어쨌거나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인종간의 차별과 갈등을 이런 식으로나마 다루려했던 ‘감독의 노력’은 칭찬할만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카데미심사위원들도 폴 해기스 감독에게 ‘작품상’이라는 최고의 영예와 함께 ‘각본상’도 수여한 것이겠죠.


‘브로크백 마운틴’의 이안 감독이 이번 아카데미에서 ‘감독상’만 수상하고 ‘작품상’을 놓친 게 ‘몹시 아쉽다’는 소감을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더군요.

‘브로크백 마운틴’도 대단한 영화입니다. 바로 보고 나서는 잘 못 느꼈는데 날이 갈수록 문득문득 ‘두려울 정도로 대단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영화자체’가 대단하다는 게 아니구요, 영화 속 두 ‘남자 연인’의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의 ‘사랑’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사랑’! 소중한 거죠. 우리가 자고 깨면 들려오는 게 바로 이 ‘사랑’ 아닙니까. 사랑에 울고 웃고 살다가 죽어가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걸 ‘캐치한’ 이안감독도 ‘대단한 감독’입니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크래쉬’가 ‘작품상’을 수상한 걸 두고 미국내에서도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패가 갈려서’ ‘브로크백마운틴’이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크래쉬’가 작품상으로는 제격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전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이야기들도 나온답니다. 만약 아카데미 시상식이 LA가 아니라 뉴욕에서 열렸다면 ‘브로크백 마운틴’이 당연히 ‘작품상’을 받았다는 거죠.

 

 ‘크래쉬’의 무대가 LA였고, 영화제 역시 LA에서 개최돼, 말하자면 ‘지역정서’라는 점수를 따고 들어갔다는 얘기지요. 게다가 미국사회에서도 아직까지는 ‘동성애 코드’에 대해선 거부감들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자칭 아카데미 심사위원’인 제가 볼 때는 이번 아카데미 상패는 제대로 ‘임자’를 찾아갔다고 봅니다.


우선 ‘브로크백 마운틴’은 누가 뭐래도 대단한 영화임은 확실합니다. 곱씹어볼수록 ‘묘미’가 느껴지는 그런 영화입니다. 이안감독의 철학이 분명하게 전달된 영화죠.

 

52세인 이안 감독의 ‘인생을 바라보는 깊어진 안목’은 그야말로 당연히 ‘감독상’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작품’ 전체로 봤을 때는 사회를 그려내는 ‘스케일’면에서 다소 쳐지는 감이 듭니다.


‘크래쉬’ 역시 대단한 수작입니다. ‘작위적’이네 ‘상투적’이네 비판은 했지만 그래도 그만한 역량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건 일단 대단한 일이지요. 게다가 미국인들이 좋아할만한 ‘사회문제’에 카메라를 들이댔고, 적나라하게 ‘미국 사회의 치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는 ‘작품상’을 받아 손색이 없는 것 같습니다.           


폴 해기스 감독의 인터뷰를 보니 이 영화 만드는데 애 많이 먹었더라구요. 주제가 주제인 만큼 ‘자금줄’들이 손사래를 쳤답니다. 말하자면 ‘장사 안 될게 뻔한 스토리’에 왜 돈을 대냐 이거겠죠. 간신히 제작사를 붙잡아 미국 영화로서는 저렴한 650만 달러를 들여 간신히 만들었답니다.


하지만 유명배우들이 출연한 ‘호화캐스팅’에 ‘선한 것’에 약한 미국인들의 ‘단순한 정서’를 파고든 ‘전략’이 먹혀들어 ‘5500만 달러’의 수익을 뽑아낸 대박을 터뜨렸다는군요.


결국 세상살이는 ‘운’이 좋아야 한다는 게 여기서도 그대로 먹혀들어간 셈이죠. 아무튼 ‘한국주재 아카데미 심사위원’으로 주말을 보낸 것은 유쾌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자비를 들여서 참가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