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영화 <메종 드 히미코>를 보고
지난 토요일(18일) 오랜만에 일본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영화에 대한 사전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동행한 ‘젊은 친구’가 ‘좋아서 두 번째 보러 간다’는 소리에 두 말 않고 따라 나섰습니다.
‘인디 영화’라는 알쏭달쏭한 범주에 들어있는 이 일본영화 <메종 드 히미코>는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요 몇 년 사이 본 영화 중 최고 수작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타인들의 이야기’인데도 마치 ‘내 이야기’같은 착각 속에 영화에 빠져 러닝 타임 144분이 짧게 느껴지는 그런 영화였습니다. 울고 웃는 사이에 두 시간이 넘는 영화가 끝나버려 아쉬움마저 느낄 정도로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영화를 다 본 뒤에도 가슴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영화의 잔상을 반추해보면서 ‘작은 행복감’으로 마음이 따스해졌습니다. 마치 가슴 속에 등불이 켜져 어두운 인생을 밝혀주는 듯한 기분 좋은 환상에 빠져드는 듯했습니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이렇게 ‘메말랐던 정서가 환해지는 듯’한 경험은 아주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그러니까 영화평이나 자세한 영화의 줄거리를 거의 모른 채 ‘백지 상태’에서 본 덕을 봤다고나 할까요.
평소 같으면 자칫 ‘왜곡된 시선’으로 볼 수도 있었던 영화의 소재는 모르고 봐서인지 오히려 ‘평범한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감독의 연출력이 그만큼 탁월했다는 얘기겠지요.
영화가 끝난 뒤에야 이 영화를 만든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프로필을 비롯한 뒷얘기들을 인터넷을 통해 자세히 접하고 더더욱 이 영화가 좋아졌습니다.
알려진 대로 <메종 드 히미코>는 히미코라는 남자의 집입니다. 단순한 집은 아니고 히미코가 늙은 게이들을 위해 풍광 좋은 바닷가에 지은 사설 양로원이지요.
히미코는 1980년대 도쿄의 번화가 긴자에서 ‘히미코’라는 바를 경영하던 게이였습니다. 2000년에 암에 걸려 가게 문을 닫을 때까지 긴자에선 최고의 바로 손꼽혔듯이 이곳에는 게이 뿐 아니라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영화에서 히미코 역을 맡은 다나카 민(田中 泯)이라는 배우는 한 눈에 봐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출신으로 2003년 예순의 나이에 배우로 데뷔해, 그 해 일본 영화제에서 ‘신인 남우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아주 특이하죠. 나이 예순에 배우로 나선 거 하며 그 나이에 단번에 신인상을 수상한 거하며. 아무튼 이 배우는 이 영화에서 젊은 남녀 배우와 함께 ‘3인의 공동 주연’을 맡아 영화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합니다.
그의 ‘존재감’이 주는 무게는 이 영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신비감’마저 뿌립니다. 다 죽어가는 암환자지만 ‘새빨간 매니큐어’로 단장한 긴 손톱은 히미코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인간의 존엄성’으로 다가와 숙연한 기분마저 느끼게 합니다.
진보랏빛 롱드레스를 입고 거니는 히미코의 자태는 죽음을 앞둔 인간이 저렇게도 의연하고 당당할 수 있구나싶어 경외감마저 들게 하더군요.
히미코의 ‘젊은 연인’ 하루히코 역을 맡은 오다기리 죠 라는 올해 나이 서른의 젊은 남자배우는 어찌나 잘 생겼든지 쳐다보기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슴이 서늘해지는 미남’인데요, 요즘 일본 젊은 여성들 이 남자땜에 난리 났다는군요.
한 방송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떤 남자의 DNA를 갖고 싶나’라는 이상한(?) 질문에 뽑힌 30명의 ‘최고 남성’중에 이 오다기리라는 남배우가 11위를 차지했답니다.
10위엔 지금 일본의 권력서열 2위인 아베 간사장이 뽑혔고, 5위엔 축구영웅 나가타 선수, 8위엔 영국 축구선수 베컴이 뽑혔답니다. 그러니까, 오다기리의 ‘DNA서열'은 꽤 높은 편이죠.
하여튼 체격 좋고 꽃미남인 ‘일본 최고 남자배우’가 이 영화에서는 ‘게이’로 나오는데 연기력 또한 출중해 2005년 이 영화로 그는 최고 남우주연상을 받았답니다.
죽어가는 ‘늙은 연인’을 끝까지 죽도록 사랑하는 그의 애잔한 연기를 보면서 가슴이 메어지는 슬픔을 느꼈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 같아 미리 밝혀둡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그 쪽 성향은 아니라는 걸 미리 밝혀둡니다.^^
아무튼 젊은 남자와 늙은 남자가 ‘당당히’ 사랑하는 관계임을 과시해도 전혀 추한 기운이 들지 않으니 신기할 수밖에요. 병상에 누워있는 늙은 연인에게 키스하는 젊은 연인의 모습이 동성 간인데도 애틋한 감상을 자아내는 걸 보면 이 영화가 왜 성공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또 요 근래 보기 어려운 매력 넘치는 주연 여배우의 ‘당돌하면서도 연민이 느껴지는’연기가 가세한 것이 이 영화를 결정적으로 수작으로 만든 요인 같습니다.
올해 스물다섯밖에 안된 시바사키 코우 라는 이 여배우의 그 ‘위풍당당한 눈빛 연기’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것 같더군요. 미안한 얘기지만 같은 나이또래로 한국에 이만한 여배우가 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 게 좀 안타깝
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확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탄탄한 연기력으로 무장한 이 3명의 톱스타급 배우들을 전면배치한 ‘이누도 잇신(犬童一心)’ 이라는 감독의 재능 덕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6세의 이누도 감독은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로 크게 주목받았던 감독이라고 합니다.
한눈에도 ‘대가의 풍모’임을 알아볼 수 있는 이누도 감독은 이 영화를 5년 동안이나 ‘공’들여 만들어 지난해 일본에서 개봉해,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더고 하더군요.
원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게이’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만화 영화가 활발히 나오고 있어서 소재 자체만으로는 주목받기 어려웠지만 감독의 연출 솜씨가 워낙 탁월하다 보니 매스컴의 각광을 한몸에 받았다고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여주인공 사오리(시바사키 코우)는 게이로 커밍아웃하고 오래 전 어머니와 자신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엄마마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병원비며 장례비용등으로 큰 빚을 진 사오리는 조그마한 회사에 다니지만 부업을 해 돈을 모아야할 입장입니다.
어느 날 사오리에게 꽃미남 청년이 찾아와 ‘아르바이트’를 제안합니다. 가출한 아버지의 ‘젊은 연인’인 하루히코는 사오리가 ‘히미코의 집’에 와서 1주일에 한 번 일하는 조건으로 3만엔을 제시합니다. 돈이 궁한 사오리는 어렵사리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히미코의 집’에 가서 일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 영화를 보셔야 할 분들을 위해 생략하겠습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은 이렇게 ‘특이한 소재’를 ‘평범한 소재’처럼 만들어 버리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 같습니다. 그냥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처럼만들면서도 또 ‘재미’를 놓치지 않고 배치했습니다. 평범한척하면서도 재미있기는 상당히 어려운 법 아닙니까?
영화의 화면 하나하나도 매우 공을 들여 만든 흔적이 보입니다. 아름답고 깨끗합니다. ‘양로원’이 주 무대라면 구질구질할 법도 한데도 밝고 활기찹니다.
그 속에서 일상을 보내는 늙은 게이들의 이야기,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버지에게 ‘절대로 용서 못해’라고 절규하는 딸에게 ‘게이 아빠’는 “그래도 난 너를 좋아한단다”라고 힘겹게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부녀간에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는 거죠.
눈물 나는 장면들도 참 많습니다. 보다 보면 젊은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쿡쿡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장면에서도 저는 눈물이 나왔습니다.
인생이란 누구나 그 시작을 ‘울음’으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인지 웃고 춤추는 그들을 보면서도 눈물이 납니다. 꼭 무슨 유행가 가사 같네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조용필의 노래처럼요.
아무튼 토요일 오후 평온했던 저의 마음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메종 드 히미코>에게 엉겁결에 속은 것 같아, 월요일에 다시 또 ‘히미코의 집’을 구경 갔습니다. 그 젊은 친구와 함께요. 그러니까 그 친구는 세 번째 저는 두 번째 그 ‘집’에 간 셈입니다. 감정이 둔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누선’을 자극하는 강도는 변함이 없더군요.
토요일에 본 영화를 월요일에 또 본 일은 이제까지 제 사전엔 없었습니다. 주연 남배우인 꽃미남 오다기리 죠가 “또 오셨어요?”라면서 식 웃었고, 카리스마 넘치는 ‘늙은 연인’ 다나카 민은 ‘또 찾아오신 귀한 손님한테 제대로 인사해야지’하면서 다시한번 정중하게 맞아주는 것 같았어요. 그 잰틀함이란...
‘배우생명’이 비교적 짧은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나이든 남자배우가 한결 멋있게 느껴지더군요.
오랜만에 아니 생전 처음으로 한 편의 영화를 하루걸러 구경 가는 진기록을 세웠지만 마음은 따스해져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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