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떴다는 영화 ‘왕의 남자’를 보고
베스트셀러가 모두 ‘양서(良書)’는 아니다는 말은 어디에나 적용이 가능한 것 같다. 특히 방화부문에서는 거의 언제나 ‘관객동원’에 성공한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요 몇 년 사이에 줄곧 경험해왔다.
시중에서 요즘 한국영화 ‘왕의 남자’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개봉 9일 만에 2백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렸다는 소리에 ‘혹시’하고 갔지만 ‘역시’하고 나왔다.
더구나 메이저 급 일간지에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을 전면 인터뷰한 내용을 미리 본 게 영 께름칙했다.
인터뷰 기사에는 “‘왕의 남자’가 ‘태풍’ ‘킹콩’ ‘청연’ 등 거대 경쟁작을 누르고 흥행돌풍을 일으키자 이번엔 충무로가 경악했다. 게다가 관객반응은 순도 99%일만큼 열광적이다.
이 감독 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라며 기사 초입부터 이 영화를 한껏 띄워주고 시작해 기사를 보면서도 찜찜했다. ‘순도 99%’라는 표현은 객관성을 유지해야할 신문기사에서는 아주 위험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렇게 많은 관객이 몰려들고 있다는 것은 ‘시대의 트렌드’를 읽는데 도움이 될 듯싶어 시작하기 2시간 전 동네 영화관을 찾았다.
‘좋은 자리’를 부탁했더니 ‘나쁜 자리’도 너덧 자리만 남았다고 한다. ‘돌풍’이 일긴 일었나보다. 앞에서부터 5번째 자리로 겨우 표를 구입했다.
평소 좋아하는 소재나 주제는 아니지만 ‘편견 없이’ 보려고 했다.
영화에 대한 전문지식도 일천하고 역사에 대한 일가견도 없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요즘 유행한다는 ‘퓨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퓨전 사극 영화’라는 표현은 없겠지만 한 번 만들어 봤다.
꽤 오래 전 뉴욕에서 활동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예술은 사기야”라고 쾌도난마식으로 예술에 대한 ‘정의’를 내렸던 일까지 떠올랐다.
영화의 흥행과 주식 장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이 ‘3대 흥행업’의 운명은 오직 신만이 아신다고 했던가. ‘운7기3’ 이런 단어도 생각났다.
아무튼 ‘왕의 남자’는 맛으로 친다면 ‘찐한 맛’인 것 같다. 초등학생들이 ‘불량식품’을 더 좋아하듯 몸에 좋지 않지만 ‘아주 맛 좋은’ 그런 식품들이 잘 팔리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영화의 주제나 내용보다는 포장이 훨씬 그럴싸한 게 멋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탓인지 영화의 화면은 ‘미적’으로는 일단 시선을 끌어당겼다. 별 거 아닌 스토리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화면에 몰입할 수 있게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기법으로 전개해 나갔다.
줄거리야 다 알려진 대로 연산군 시대, 남사당 광대패들이 어찌어찌하여 한양의 ‘어전’으로 진출하는 ‘횡재’를 거머쥐고 약간 제정신이 아닌 연산군을 ‘남색’으로 사로잡고 그런 와중에 ‘요부’ 장녹수도 등장해 영화에 짭짤한 간을 친다.
장녹수가 연산군에게 말을 놓았다는 소리는 야사의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지만 왕의 면전에서 왕에게 ‘미친놈’이라고 했다는 소린 이제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버젓이 나온다.
뭐 시시콜콜한 걸 일일이 지적하고 싶지 않지만 감독이 신문 인터뷰에서 “사극의 대가인 신봉승씨가 사극은 ‘연도와 이름만 같으면 다 바꿔도 된다’고 그러더라”라고 말한 대목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감독은 대가의 그 같은 ‘조언’을 ‘금과옥조’로 삼고 ‘무한한 상상력’으로 이 ‘현대식 퓨전 사극’을 만들어 내놓은 것 같다.
‘왕의 남자’라는 제목도 굉장히 도발적이다. 이 시대의 트렌드라고도 할 수 있는 ‘호모 섹슈얼리티’에 재빨리 영합한 기운이 감지된다.
거기에 ‘광대’들의 ‘한없는 자존심’은 정체성의 혼돈을 겪거나, ‘청년백수 시대’라고도 하는 현 시점에서 젊은이들이 자칫 동경에 빠질 수도 있는 ‘집시 풍의 유랑민’적인 정서를 슬쩍 건드린 것도 같다.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동성애 코드’가 뻔히 보이건만 감독은 “노인이 어린 소년과 침소를 같이 하는 행위, 그게 호모 섹슈얼인가. 그건 ‘기’를 흡수하려는 ‘음양론’에 입각한 행위다. 동성을 탐닉하는 서양의 동성애와는 다르다.
셋은 연민으로 물고 물리는 관계다”라는 낯간지러운 변명을 하고 있다. 엄연히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라고 본다. 연산군이 공길 이라는 광대에게 입 맞추는 대목과 장생이 공길을 한사코 ‘양반이나 왕’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대목, 마지막에 장생과 공길이 줄을 타면서 뱉어내는 ‘언사’등을 보더라도 이 영화는 오갈 데 없는 ‘동성애 영화’이다.
노골적 성애 장면은 없지만 분위기상으로는 그 이상의 ‘성적 호기심’을 자극시키는 장면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 시대의 트렌드 중의 하나라고도 하는 ‘동성애’에 대해서 흠을 잡으려는 게 아니다. 감독의 ‘정직하지 않은’ 변명이 좀 거슬렸다는 얘기다.
‘동성애’를 주제로 했다 손치더라도 영화의 격이 떨어지는 건 아닐텐데.
인터뷰를 쓴 기자도 이런 한심한 기사를 쓰고 있다. “특히 남성 동성애를 혐오하는 우리 관객들 사이에서 이에 대한 비난이 나오지 않는 것이 신기하다” 이런 투의 기사가 국내 유수의 일간지에 버젓이 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난이 나오지 않는지 나오는지 ’ 기자가 다 조사를 해봤단 말인가. 더구나 이 영화에서는 노골적인 동성애 장면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무슨 ‘비난’이 나오고 말고 하겠는가. 설령 그런 장면이 나온다 하더라도 이미 우리 관객들의 수준은 그런 걸 비난할 단계는 벗어났다고 본다.
영화가 꼭 역사적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지만 최소한 ‘왜곡’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사극의 대가가 ‘이름과 연도만 틀리지 않으면 된다’는 괴상한 논리를 제시했다 손치더라도 터무니없는 과장과 자의적 해석은 위험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처럼 호소력과 설득력이 강한 미디어야말로 ‘중립적이고도 객관적 시각’을 잃지 않아야만 ‘예술’도 나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예술이 사기라고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광대’가 되겠다고 울부짖는 두 광대의 모습을 보면서 감독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튼 ‘왕의 남자’는 일단 ‘흥행 상승세’를 탄 것 같다. 관객이 ‘선택’하게끔 만들었다는 점은 이 영화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군중심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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