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시오노 나나미에 대하여
일본인 여성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대표작 ‘로마인 이야기’는 일본에서 800만부 가까이 팔렸고, 한국에서도 무려 200여만 부가 팔렸다.
유사 이래 최악의 불황이라는 국내 출판계에서 일본인이 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예는 무라카미 하루키 이외에는 시오노 나나미가 처음일 것이다. 그것도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라는 장편 소설을 위시해 주로 소설류로 주가를 올렸지만 나나미의 경우는 역사에세이라는 독보적인 장르로 그만큼 팔았으니 어찌 보면 하루키보다 한 수 위인 것도 같다.
시오노 나나미는 1992년 ‘로마인 이야기 1’권을 출간하면서 앞으로 매년 1권씩 2006년까지 15권을 시리즈로 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녀는 약속한대로 며칠 전 15권 째의 ‘로마인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고, 한국인 기자들을 도쿄로 불러 모아 놓고 ‘15년 치 인터뷰’를 당당히 했다.
아직 여성의 자태가 남아있던 50대 중반에 시작한 그녀의 ‘글쓰기 작업’은 이제 그녀를 70세의 원숙한 노작가의 풍모로 변신시킨 채, 우리 앞에 한 인간의 ‘존엄한 업적’을 선보이고 있다.
‘여성은 어느 나이에서나 아름다울 수 있다’는 속언도 있지만 방금 미용실에서 정성들여 드라이를 한 것 같이 보이는 우아한 헤어스타일에 멋스러워 보이는 검은빛 뿔테 안경과 체크무늬의 회색 재킷을 입은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워 보였다.
일흔 살의 여성도 저처럼 당당하고 우아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게 멋있고 고마웠다.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저 당당함은 아마도 그녀가 혼신의 힘을 바쳐 20년간의 자료준비기간과 15년 간 ‘휴가도 없이’ 매달려온 글쓰기라는 ‘생업’이 그녀에게 그런 ‘아우라’를 만들어 준 것이라고 본다.
15년 동안 1년의 절반은 자료수집과 자료 정독으로 나머지 반은 집필에 매달리느라 단 한 차례도 병원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독한 ‘프로근성’으로 무장하고 죽기 살기로 ‘로마인’을 그려내기 위해 ‘건강검진’조차 하지 않았다.
“건강검진을 했다가 뭐라도 나오면 일이 중단된다. 독자들은 기다려 주겠지만 나로선 한번 중단하면 다시 시작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다. 지금 병원에 가면 큰 병이 발견돼 죽을 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독기’를 품지 않고서는 200자 원고지 2만장 분량의 ‘역작’을 그려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행여 병이 발견돼 집필을 중단한다’는 건 어쩌면 그에겐 ‘정신적 죽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런 작가로서의 ‘비장한 자세’를 보니까 문득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떠올랐다. 자신의 온힘을 쏟아낸 대하장편소설 ‘혼불’을 마무리하고 얼마 후 그녀는 50대 초반이라는 아까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물론 ‘인명이야 재천’이지만 그녀가 글 쓰는 시간을 조금만 줄이고 건강검진을 하거나 글 쓰는 일이 주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적당히 풀어나갔다면 ‘요절’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을 해본다.
시오노 나나미씨가 ‘병이 난 걸’ 차라리 모르고 글을 쓰고 싶어 한 그 심정은 나 같은 일반인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어떤 일에 몰입할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그 사람 자신의 ‘운명’이면서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온 힘을 바쳐 어떤 일을 이뤄낼 수 있다는 건 그가 이미 ‘범인(凡人)’은 아니라는 것일 테고, ‘업적’을 쌓았다는 점에서 그의 인생은 축복받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나이 칠십에 한국의 젊은 기자들을 불러 놓고 인터뷰를 했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인생은 ‘대단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한국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로마인의 역사’를 쓴 작가의 통찰력이 묻어나오는 격언 같은 말들을 많이 했다.
“마키아벨리는 역량· 운· 시대와의 부합성을 리더의 3대 요건으로 꼽았다. 아무리 뛰어나도 시대에 맞지 않으면 리더가 되기 힘들다. 인간의 재능이란, 운명이란, 그런 거다. 역사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고 운 좋은 사람만 있는게 아니다.”
“밖에 적이 있는데 내부 싸움에 빠져 붕괴해 버린 아테네, 피렌체 같은 나라들이 그렇다. 작은 문제에 집착하면 큰 것을 놓친다. 일본에 나쁜 결과를 가져올 대표적인 예가 ‘좁은 의미의 내셔널리즘’이다.”
“정치가는 정치를 하면 된다. 자기들이 모르는 것은 말하지 않으면 된다. 정치가들이 말하는 것을 믿지 않는 게 좋다.”
“리더는 조직을 생각하고 자기 배를 채우지 않는 인물이다. 로마에는 공공건물의 유적만 있다. 로마에는 베르사유 궁전 같은 개인적인 유적이 없다. 지도자가 업적을 남기고 싶을 때 대중에게 필요한 공공건물을 기증했다. 로마인들은 모든 사람이 살아생전에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었다. 나는 이런 민족이 좋다.”
젊은 한국의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일본의 여성작가 시오노 나나미에게서는 이미 ‘일본인’이라는 국적의 한계를 벗어던진 코스모폴리탄의 원숙한 멋이 느껴진다.
개인적으로는 그녀가 쓴 신변잡기 스타일의 에세이를 즐겨 읽곤 했다.
일본에서 제일 좋다는 ‘히비야 고교’ 출신으로 도쿄대학에 들어가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듬해 학습원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학습원대학은 일본의 황손들이나 왕족들이 주로 다니는 ‘귀족 대학’이라고 한다. 비틀스의 멤버 존 레논의 부인이었던 오노 요코와는 ‘아끼는 선·후배’사이.
올해 74세인 오노 요코는 또 얼마나 대단한 일본 여성인가. 이젠 세계의 최대 갑부 여성 중 4위의 ‘재력가’로 꼽히고 있는 오노 요코나 시오노 나나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부인이었던 구보타 시게코 씨 등은 어쩌면 일본여성의 ‘세계화’를 보여준 걸물들인 것 같다.
오노 요코나 구보타 시게코는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국제결혼해 그들의 ‘명성과 후광 덕’으로 유명해졌고, 역시 이탈리아인과 결혼했던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만년필 하나로 위업을 달성한 여성이니까 여성학자들이나 여성운동가들의 눈에는 ‘최고의 여성’으로 추앙받을 만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게자리 태생답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섬세함’을 그의 작품 곳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요즘도 컴퓨터를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만년필로 글을 써내는 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스타일리쉬하고 예민한 성품인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부친을 따라 영화구경을 자주 했던 12세 때부터 미국 배우 게리 쿠퍼의 ‘왕 팬’이었다. 학습원 대학시절 게리 쿠퍼가 세상을 뜨자 학교를 쉴 정도였다. 그 때의 에피소드는 이렇다.
서양철학시간에 시오노 나나미가 보이지 않자, 담당 교수가 “시오노 군은 왜 안 나왔나?”라고 물었다. 동급생들은 “시오노는 상중(喪中)입니다”라고 답했다. “가족 중 누가 돌아가셨나?” “게리 쿠퍼가 세상을 떴답니다.” 좋아하는 배우가 죽자 학교마저 결석할 정도의 ‘감수성’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그녀가 쓴 ‘내 마음의 사나이’라는 영화에세이를 보면 게리 쿠퍼에 대한 ‘경배’수준이 요즘 우리나라 소녀들 가운데 ‘동방신기’나 ‘비’의 팬들이 보여주는 극성보다 더하면 더했지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시오노 나나미는 여고생 시절 게리 쿠퍼의 브로마이드를 3장 구입했는데 이 사진들은 그녀가 ‘로마 생활’을 시작할 때도 그녀의 방을 장식할 정도였다.
오매불망 게리 쿠퍼만을 좋아한 것에 대해 자신의 에세이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가 죽은 후에도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
그녀가 게리 쿠퍼 후에 유일하게 꼽은 남자배우로는 오마 샤리프인데 그것도 ‘아라비아의 로렌스’ 한 작품에 한해서였다. 그 유명한 ‘닥터 지바고’에서의 오마 샤리프도 그녀의 마음을 휘어잡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게리 쿠퍼의 영화는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그가 출연한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도 보러 다녔다고 한다. ‘모로코’에 나온 쿠퍼에 대해선 ‘신발 벗고 사막 끝까지 따라 갈만하다’ 고 말했다.
심지어 시오노 나나미는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나오는 주연 여배우들에겐 맹렬한 ‘질투의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모나코의 왕비가 되었던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 ‘하이 눈’에서 쿠퍼의 연인이었다는 이유와 좀 ‘척’하는 여배우라는 점에서 시오노씨의 눈 밖에 났다.
‘쿠퍼의 상대역으로 내가 용서할 수 있는 여배우는 마를렌 디트리히와 잉글리드 버그만 뿐이다. 다른 여배우는 무시한다.’ 이쯤이면 그녀의 ‘쿠퍼 사랑’은 수준급이라고 할 만하다.
그녀는 게리 쿠퍼의 매력을 이렇게 꼽고 있다. <우선 키가 크고 훌쩍한 몸집의 사나이다. 친절하고 마음이 따뜻한 남자일 것이다. 우직스러울 정도로 성실하고 정직하다. 여자를 배반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남자다. 역시 미남이다. 그러나 깎은 듯한 미남이란 느낌은 없다. 푸근한 몸가짐이 주위 사람에게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지.>
시오노 나나미는 아주 예리한 작가적 시각만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 하는 여성’으로서의 본심도 간간이 드러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마를렌 디트리히가 “나는 사랑받기를 원한다. 이것이 마를렌 디트리히이다. (I wish love. This is Marlene Dietrich.)라는 말을 패러디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사랑받기를 원하다. 이것이 시오노 나나미이다. (I wish love. This is Nanami Shiono.)
부친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여배우는 오로지 마를렌 디트리히 만을 좋아한다면서 마를렌이 나오는 영화라면 뭐든 비디오 테이프에 담아두었다고 말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를렌 디트리히가 30년 연하의 작곡가 겸 지휘자와 ‘나이의 장벽’을 초월한 사랑을 나눈 사실도 몹시 부러워하는 것 같았다.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여배우에 대해선 “이 여자는 남에게 이해받는 것보다는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라고 평한다. 그러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마를렌의 이런 ‘명쾌한 라이프 스타일’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어쩌면 ‘만년필 한 자루’로 ‘일가’를 이뤄낸 작가의 눈에 ‘여배우의 삶에 대한 본능적 통찰력’이 눈부시게 다가왔을 지도 모르겠다.
젊어서는 상당한 ‘미모’였을 그녀는 영국인 의사와 결혼했가 이혼 후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40년 넘게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에서 ‘타국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녀는 한 에세이에서 첫 결혼 상대자와 ‘로마의 밤 문화’를 신물 날 정도로 누렸다면서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를 쓰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부터 ‘놀이’를 접고 공부를 시작했고, 그런저런 사연으로 홀로 된 ‘사연’을 고백하기도 했다.
언젠가 일본 잡지에서 본 그녀의 ‘로마 생활’ 모습은 굉장히 우아하고 화려해 보였다. 화보로 나온 그녀가 살고 있는 저택의 거실은 마치 ‘로마인 귀족’들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다. 고급 레이스의 하얀 테이블보가 덮인 식탁 모습도 일반 가정보다는 귀족의 식탁 같았다. 어쩌면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실감나게 로마인 이야기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동양인 여성의 ‘이탈리아 살기’는 아마도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그녀의 다채로운 삶의 반경에 대해 일일이 확인 할 수는 없지만 이탈리아와 영국의 ‘지식인 계층’과 교류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안목을 국제화하는데 성공한 듯하다.
남자들을 보는 ‘안목’도 여간 까다롭지 않아 그녀가 쓴 남자들에 관련된 에세이를 보다보면 시오노 나나미라는 일본 여성의 ‘남성관’이 주는 예리한 안목에 기가 눌릴 정도다. 그녀의 재미난 ‘남자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한다.
어쨌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단신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어떤 공식교육기관에도 적을 두지 않고 ‘순수한 독학’으로 ‘로마인이야기’라는 방대한 저서를 세상에 내놓은 노작가는 아직도 ‘형형한 눈빛’으로 세상을 향해 ‘인류평화’에 대해 소리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이 원로급 여성 작가의 존재는 어쩌면 세계 2위 경제대국인 일본의 ‘문화적 위상’도 그리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는 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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