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만화가 허영만과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만남

스카이뷰2 2007. 2. 5. 20:37
 

        만화가 허영만과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만남


여러분은 ‘만화’ 하면 무슨 생각이 맨 먼저 떠오릅니까?

저는 일단 ‘공상’이라는 단어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 이미지는 하늘을 맘껏 날아다니는 공상의 나래와 연결됩니다.  

그리고는 곧이어 책 표지가 딱딱한 ‘엄마 찾아 삼만리’와 ‘플란더스의 개’라는 만화책이 생각나면서 기분 좋은 추억에 빠져듭니다.


제가 유치원 시절 아버지께서 이 두 권의 만화책과 ‘백설 공주’ 그림동화책을 사주셨던 게 지금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물론 달랑 세권의 책만 사주신 것은 아닙니다.


당시 저는 주로 일본 그림책을 많이 보는 아주 ‘지적인 어린이’였었죠.^^ 저희 집엔 어른들이 보는 책들도 주로 일본책들이 많았지만 아이들이 보는 책들도 일본 ‘제품’이 많았습니다.


그렇다고 뭐 제가 그 때 일본어를 깨친 건 아니구요, 어인일인지 저의 부모님은 일본 그림책들을 많이 사오셨습니다. 아마도 당시 만해도 한국 그림책들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백설 공주’는 4·6배판 크기의 일본 책으로 연두 빛 하드커버의 책 표지 가득 하얀 피부의 공주님 얼굴이 그려져 있었지요.

핑크빛 볼 터치에 쌍꺼풀 진 큰 눈이 아주 예쁜 백설 공주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앞머리가 이마를 가린 그 부분에 커다란 까만색 일본글자로 ‘시로 유키 히메’라고 써  있던 것까지 기억납니다.


이 세권의 책은 당시 저의 재산 목록 1호였지요.

지금이야 물자가 풍족해 두·세 살 어린 아가들도 몬테소리니 뭐니 해서 한 질에 수 십 만원하는 그림책을 ‘소장’하고 있지만 저희 때는 책이 아주 귀했던 시절이라 만화책이나 그렇게 화려한 칼라의 일본 그림책 같은 건 참 희귀한 것들이어서 저는 그 만화책과 그림책만으로도 한껏 재면서 살았었죠.^^


그 책들은 제가 '국민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의 작은 ‘서고’에 귀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제 자랑이지만 ‘국민 학교’ 3학년 때 서울시 글짓기 대회에 나가 입상하면서 상품으로 받은 ‘이솝 동화책’은 아직도 우리 집 책꽂이에 꽂혀있습니다.^^


분홍색  하드커버 표지에 이솝 우화의 한 장면이 삽화로 그려져 있는 ‘정음사’에서 나온 책입니다. 전 때때로 우울하거나 기운이 없을 때는 이 책을 펼쳐보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철없이 즐겁기만 했던 유년 시절로 돌아간 듯해져 마음이 어느새 따스해지곤 합니다.   


요새야 유치원생 열이면 열, 한글은 기본으로 깨치고 그것도 모자라 그 병아리 같은 입으로 ‘에이 비 씨 디’노랠 부르며 간단한 영어회화는 물론, 토익까지 공부하는 세상이라 만화책 정도로 재면서 살았다는 게 좀 우습게 들리겠지만 그 시절엔 유치원생이 ‘책’을 읽으면 ‘신동 급 어린이’로 대접받던 시절이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 저는 네 살 때 한글을 깨쳐 ‘어머니의 자랑거리’로 동네에선 거의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답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대외적 체면치레’를 위해서도 우리집엔 자꾸 자꾸 어린이 도서가 쌓이기 시작했고, 제가 국민 학생이 되면서는 만화책 뿐 아니라 동화책이 많이 있었는데 그래도 제 기억에 지금껏 가장 선명하게 남는 건 바로 이 두 권의 만화책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만큼 만화의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저와 만화의 인연은 이 두 권에서 끝이 나게 됩니다. 저희 때는 국민학생들도 ‘입시 지옥’에 시달렸고, 학부모들은 자녀들이 초등 4년 정도만 되면 ‘입시모드’로 체제를 변환시키고는 ‘만화’따위는 엄격하게 금지시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화는 일종의 ‘금서’였던 겁니다.


그 때만해도 비교적 ‘순종적인 어린이’였던 저는 부모의 ‘학습 지침’에 따라 ‘만화’를 보는 건 아주 ‘나쁜 일’이라고 세뇌 당해, 결국 만화는 거의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러니까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는 얘기들을 하는가 봅니다.


그렇다고 아주 만화를 멀리한 것은 아니어서 ‘슬픈 옥이’의 엄희자· ‘꺼벙이’의 길창덕· 김경환 이런 만화가들의 이름이 가물가물 떠오르긴 합니다.

외국 만화로는 일본의 그 유명한 ‘아톰’의 귀여운 모습이 맘에 들었고, 헨리라는 미국만화의 꼬마주인공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워낙 부모의 강한 ‘교육’ 덕분에 어린 저는 만화를 몰래 보는 날엔 이상한 죄책감에 시달렸고 결국은 그 재미나다는 만화를 자발적으로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고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도 만화가 주는 즐거움은 잘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명색이 ‘문화 예술에 관심 있는’ 일을 하면서도 정작 유명한 만화가들은 잘 모르고 지냈습니다. 이를테면 만화는 제게 ‘불모지대’였습니다.

고작해야 고우영이나 강철수 이현세 이런 분들의 이름을 바람결에 들어서 알았지 그분들의 ‘작품’을 탐독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에선 ‘만화’가 ‘소설’을 압도해 ‘만화천국’이라는 정보를 접하게 되었고, 예전에 좋아했던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만화가’가 되려다 실패해 소설가가 되었다는 소릴 듣고 조금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언니가 유명 만화가라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지요.


아무튼 ‘만화’혹은 애니메이션의 분야가 그리 ‘만만히 볼 것’이 아니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되면서 그 쪽 분야에도 조금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문화산업’분야 중 이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는 소식에 ‘트렌드 워처’를 자임하는 저로선 자연히 이 분야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엊그제 입춘 하루 전날,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 문화센터(소장 코바야시 나오히토)의 주최로 ‘미스터 초밥왕 식객을 만나다’라는 좌담회가 열렸습니다.


교토대학 법학부 출신의 엘리트 공무원답게 코바야시 소장은 인사말의 시작 을 한국말로 하는 ‘성의’를 보였습니다. 한·일 문화교류 사업의 하나로 ‘음식’을 주제로 한 만화가들의 대담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각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들이 몰려든 것만 봐도 이 대담이 굉장히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요즘 동아일보에 5년째 ‘식객’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허영만씨와 일본에서 1천만권이나 팔린 슈퍼 베스트셀러 ‘미스터 초밥왕’의 작가 테라사와 다이스케씨가 ‘음식’을 소재로 한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자리라고 해서 당연히 우리 스카이뷰의 블로그 독자 여러분들에게 ‘읽을거리’를 선사하는 차원에서 기꺼이 ‘디카’를 메고 출동했습니다.^^


작년 5월 19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 씨와 김우창 교수의 대담회를 취재한 이래 두 번 째로 우리 블로그에 올리는  ‘한· 일 문화 대담’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요즘 젊은 세대들은 소설보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그리고 게임에 몰두하고 있으니까 아무래도 오에 겐자부로씨의 이야기보다는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와 문학평론가의 대담이야 저의 ‘전문분야’의 하나이니까 별 부담이 없었지만 ‘만화가들의 대담’은 잘 모르는 분야이기에 조금은 긴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 일 양국의 두 거장의 대담을 듣다보니 ‘거장들의 이야기’는 분야를 막론하고 재미있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들의 치열한 작가정신을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발언들을 들으면서 ‘대가(大家)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는 격언을 만들어 봤습니다.^^(‘로마’의 격언을 패러디한 거죠)


그들은 ‘음식’이라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상의 소재’를 놓고 나름대로 각고의 노력을 한 끝에 그런 베스트셀러를 내놓은 것 같습니다.


조금은 근엄한 수도승 타입의 허 화백은 문하생들에게 “칼의 세계를 그리려면 섬뜩한 느낌이 들도록 그려야 하고 음식을 만화로 그리려면 독자들이 그 그림을 보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그려야한다”고 늘 강조해서 말한다고 합니다.


그는 잠자는 시간만 빼고 의식이 있는 한 하루 온종일 ‘만화’에 대해서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대단한 거죠!  스스로를 메모광이라고도 소개한 그는 음식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모은 자료들을 다 쓰지 못하고 3분의 1정도만 쓴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만큼 자료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뤄진다는 얘기겠지요.


테라사와씨도 ‘미스터 초밥왕’을 그릴 때 한 일식 요릿집을 400회 이상 드나들며 주방장에게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말했습니다. 생선의 종류에서부터 생선 뜨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뭐든지 물어보면서 초밥의 ‘완성도’에 대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쌓게 되었다는 겁니다.  


두 만화가는 한일 양국 요리에 대해 자신들이 느낀 점을 허심탄회하게 말했습니다.


우선 테라사와씨는 “한국음식하면 일단 맵다는 게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낙지볶음을 먹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듯하고 머리에서 땀이 나왔다”며 제스추어까지 써가며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동생은 그 맵다는 인도 요리도 잘 먹었다면서 한국식당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풋고추를 먹고 나서는 입안을 바늘로 찌르는 것 같다고 외치면서 식당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는 말로 좌중을 웃겼습니다.


그는 또 신라호텔에서 초밥을 대접받은 적이 있는데 ‘개불’이라는 해산물 초밥이 신기하게 생각돼 그 길로 야간열차까지 타고 부산에 내려가 개불을 봤는데 마치 SF 만화에나 나오는 것 같이 기괴하게 생겼더라는 말도 했습니다. 


허영만씨는 일본음식은 대체로 모양과 색을 중요시 하는 것 같은데 전반적으로 달착지근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별로 입에 맞지 않는다는 투였지만 그는 그래도 미국이나 유럽의 음식보다는 견딜만하다고 말하더군요. 


그와 함께 동행했던 후배는 ‘일본 요리에 꼬박꼬박 곁들여 나오는 계란에 물려 한국에 가선 당분간 계란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답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선 스키야키를 먹을 때도 날계란에 찍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토를 먹을 때도 계란을 날로 풀어서 먹기도 하지요.


두 만화가는 양국의 식사습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흔히 알려진대로 한국 사람은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지 않지만 일본인은 손에 밥공기를 쥐고 먹습니다. 이에 대해 테라사와씨는 젓가락문화가 한국으로부터 들어왔는데 그때 왜 숟가락은 안 들어왔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갯소리도 했습니다.


테라사와씨는 ‘초밥’에 대해 일본인에게 있어서 초밥은 ‘특별한 날에 먹는 행복한 음식’이고 축제 같은 느낌을 주는 음식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초밥은 일본사람들도 집에서 만들어먹지 않고 주로 초밥요리 전문점에 가서 먹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프로’가 만드는 솜씨가 더 낫다는 얘기겠지요.


허 화백은 ‘음식’을 주제로 7년간 취재를 해왔고 5년째 신문연재를 하고 있는 사람답게 ‘먹을거리’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현재 세계적으로 음식물이 25% 정도 과잉생산 되고 있지만 아프리카 같은 데서는 아직도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이 ‘전어’를 좋아하는데 예전엔 5천원 정도만 주면 삽으로 퍼올 정도로 싸고 맛있는 생선이었는데 요즘은 1킬로그램에 3만원이나 한다면서 음식 값의 고가화(高價化)를 안타깝게 여기는 듯 말했습니다.


그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음식값 정말이지 너무 비쌉니다. 일본이나 미국보다도 더 비싼 게 요즘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음식값이 아닌가 생각하거든요.


언젠가 어느 일간신문에서 ‘맛있는 식당’ 기사에 점심 1인분에 2만원이 ‘저렴하다’고 소개를 해 제가 직접 신문사에 항의전화를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요리가짓수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끼 식사에 2만원이나 하는 걸 저렴하다고 쓴다면 그 기자의 인식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멀리 아프리카까지 갈 것 없이 북한에서도 수백만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오늘날 우리 현실을 볼 때 허영만 화백의 지적에 상당한 공감이 느껴지더군요.


허화백은 또 음식 맛은 ‘어머니의 숫자’만큼 다양하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죠. 하느님이 각 가정에 일일이 갈 수 없어서 파견한 ‘어머니’들이 그들의 온갖 정성어린 ‘솜씨’로 ‘맛’을 내니 그 숫자만큼 ‘맛’이 다양하겠지요.^^  


허영만씨는  12년 연하의 테라사와 씨에게 ‘초밥’이라는 한 주제로 그렇게 오랫동안 작품을 내왔다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도 ‘김치’ 한 주제로 끌어가려고 했지만 요즘은 음료나 술 이야기도 곁들이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만큼 ‘일상의 음식 한 가지’를 주제로 몇 년씩 작품 활동을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자존심’ 강한 예술가답게 그는 ‘미스터 초밥왕’이 처음부터 끝까지 대결구도로 가지만 자신의 작품세계는 가급적 경쟁구도를 피하고 주로 사람사는 모습에 음식을 슬쩍 끼워 넣는 식으로 가져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작품세계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얘기일 겁니다.


그들은 작품속의 주인공과 작가 자신이 닮았냐는 질문엔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 쇼타는 성실하고, 다른 작품의 주인공도 여유 있고 낙천적이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테라사와)

“‘식객’의 성찬이는 남의 얘기 잘 들어주지만 나는 변덕이 심하고 성질이 급한 편이다.”(허영만)


두 만화가의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저는 문득 그들이 자신의 작품속 주인공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부모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 ‘자랑’을 아끼지 않습니다. 물론 철없는 자식들이야

부모에게 불평불만을 쏟아 놓은 것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자랑하는 일들이 더 많지만요.^^     


두 만화가들에겐 좀 미안한 얘기지만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의 작품이 얼마나 잘 팔렸는지는 대담이 끝난 뒤 인터넷 자료를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작품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 만화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그들은 자신의 원작이 다른 장르에서 성공한 것에 대해 그리 탐탁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우선 허영만씨는 작년 가을 자신의 ‘타짜’가 영화로 대성공을 했지만 편집시사회에서 영화를 보면서 ‘허점’이 보였다고 지적하더군요.

하지만 20여명의 스태프들 앞에서  젊은 감독에게 그런 ‘쓴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감독의 ‘자존심’도 살려줘야겠고, 자칫 하면 ‘몰매’맞을 분위기여서 삼갔다는 소리에 좌중에선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테라사와씨도 처음엔 굉장히 기뻤지만 점점 불만이 많아지기 시작해 요새는 그저 한 명의 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원작자의 의도를 감독들이 따라주질 못한다는 얘기일  겁니다.


두 만화가는 ‘음식’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뤄 크게 히트했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허영만화백은 얼핏 보기에 60세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나중에 인터넷 자료를 보니까 1947년생이더군요. 제 눈썰미가 거의 정확했다는 얘기겠죠^^

게다가 그는 저와 생일이 같은 6월 26일생이었습니다! 나이는 다르지만 생일이 같다는 데 어쩐지 ‘정서적 공감대’가 느껴졌습니다.


‘대지’라는 장편소설을 쓴 미국의 유명여류작가 펄벅도 6월 26일생이라서 무명의 자연인에 불과한 저로선 잠시 우쭐한 기분이었습니다. 뭐랄까요, 지금 저야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저와 같은 날 태어난 사람들이 ‘일가’를 이룬 예술가들이라는 점이 괜히 기분 좋게 여겨지더군요. (이래서 제가 철없다는 소릴 듣나봅니다.^^)


허화백은 진홍빛 스카프를 멋스럽게 목에 두르고 나와 굉장한 ‘멋쟁이 패션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빛깔의 스카프를 맨다는 건 그의 패션에 대한 ‘내공’이 상당한 수준이라는 걸 말해준다고 봅니다.

실제로 그를 아는 대부분의 지인들이 그가 ‘멋쟁이’라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1959년생인 테라사와 씨는 볼 살이 오동통한 얼굴이 마치 자신의 ‘미스터 초밥왕’의 주인공 쇼타가 어른이 된 모습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주인공을 자신을 닮은 모습으로 그린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더구나 테라사와 씨는 하얀 주방장 모자만 쓴다면 바로 일식집 주방의 수석 요리사 분위기를 갖고 있는 것 같이 보이더군요. 아무래도 오랜 세월 자신의 작품세계에 몰두하다 보니까 그 ‘직업’이 얼굴에 나타나게 되었나봅니다.^^

그래도 그는 이제까지 초밥을 직접 만들어 본 일은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한 사람의 사는 법과 가치관이 먹는 행위에 나타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만큼 ‘먹는 행위’가 곧 한 사람의 인격을 말해준다는 얘기겠지요.


두 만화가는 모두 세계적 식량위기를 함께 걱정했고, 같이 먹는 사람을 배려하는 것의 중요함에 인식을 같이했습니다.


한·일 양국에서 최정상급 만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 ‘그림의 고수’들은 공교롭게도 모두 ‘그림’을 전공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천부적 재능’과 ‘각고의 노력’이 그들을 오늘날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한 것이겠지요.


의식이 있는 동안엔 늘 ‘만화’만 생각한다는 허영만 화백과 한 음식점에 4백번 이상 드나들며 집요한 취재를 했다는 테라사와 씨.

이들이 자신들의 ‘일’에 쏟아 붓는 열정이 있는 한 우리네 평범한 독자들은 편안하게 ‘만화 삼매경’에 빠질 수 있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