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 이중섭· 김환기 화백과 그림 값 이야기
엊그제 텔레비전 뉴스에서 아주 희한한 장면이 나왔습니다.
외국 영화에서나 가끔 볼 수 있는 미술품 경매현장이 서울에서 열린 광경을 보여주었는데요, 최종 낙찰가가 무려 25억원! 이라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벽에 걸린 디지털 숫자판에 25라는 숫자가 빨간색으로 표기되었습니다.
고 박수근 화백의 ‘시장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화면은 일반인 몇 명을 등장시켜 “이제 그림이 투자처로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왔습니다.” 등등의 말하는 모습이 나왔습니다.
텔레비전 뉴스가 ‘투자와 치부'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 같더군요.
그 경매장에서는 박 화백 이외에도 김환기의 ‘항아리’가 12억 5천만원, 이중섭의 ‘통영 앞바다’가 9억9천만원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간 사람의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언론에서도 이 세 분의 작고한 화백들이 드디어 ‘밀리언 달러 클럽’ 작가 시대를 열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저는 TV화면에 나온 박 화백의 ‘시장의 여인들’ 그림을 보면서 25억원에 낙찰되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오! 저건 아니야”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텔레비전이 있는 우리 집 마루에서요.^^
그리고는 곧 직감적으로 “또 시작되었군”이라는 냉소적인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10년 전 쯤 한 때 국내 화랑은 굉장히 활황장세를 보였습니다. 그림 값이 엄청 비쌌죠. ‘선화랑’이니 ‘현대화랑’이니 하는 한국에서 최고라는 화랑의 여주인들이 화제를 몰고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녀들은 거의 ‘여제’처럼 모셔지기도 했지요.
지금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미술을 담당하는 웬만한 신문사 기자들은 몇년만 그 쪽 일을 하면 월급 외에 ‘촌지’로 받은 돈으로 아파트 한 채는 생긴다는 믿어지지 않는 ‘실화’들이 공공연하게 떠돌곤 했습니다. (이 아파트는 신문사의 밸류에 따라 평수가 달라졌다죠.^^ 물론 청렴한 기자들은 예외였겠지만요.)
국내에서 손꼽히는 어느 화랑 여주인은 여상을 중퇴하고 아주 오래전에 개인 화상의 경리출신이었는데 워낙 영리해서 거의 ‘자수성가’로 일가를 이루었다는 뒷얘기도 들려왔습니다.
그녀가 경리시절 그냥 아무개야 하며 이름 두자만 부르던 어떤 어른은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 그녀를 만나 눈치 없게시리 그냥 예전처럼 ‘아무개야’라고 불렀다가 샐쭉해진 그녀 얼굴을 보고 놀랐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녀는 화랑가에 ‘큰 손’으로 군림하는 여걸로 성장했다는 얘깁니다. 자신의 집안을 일으켜 세운 건 물론이고 내로라하는 화가들도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는 전설도 전해집니다.
아무튼 그렇게 흥청거리던 화랑가가 아마도 IMF때인가부터 그림값이 ‘폭락’하면서 ‘좋은 시절 다 갔다’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동안은 파리만 날린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화랑가가 엊그제 ‘경칩’이 지나선지 드디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박수근 화백의 그 그림이 ‘25억원!’이라는 건 제가 워낙 그림 볼 줄 몰라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좀 ‘웃기는 가격’이지요.
저는 텔레비전에서 경매현장을 비춰주면서 그냥 ‘사실 보도’만 하는 게 좀 가소롭게 여겨졌습니다. 도대체 그게 말이 됩니까!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이 세 화가들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세 분 모두 제가 좋아하는 ‘스토리가 있는 작가’들입니다.
제일 비극적인 인생은 나이 마흔에 요절한 이중섭화백이지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 화가의 ‘존재’를 알고 지냈습니다.
부친께서 사주신 마해송선생님의 ‘모래알 고금’이라는 동화책의 표지가 바로 이 화백의 그림으로 장식되어있었습니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나는데요, 벌거숭이 어린애 두셋이 이렇게 손을 잡고 있는 가운데 복숭아나 개구리 뭐 그런 걸로 가장자리가 장식된 그림인데 구석에 ‘주ㅇ섭’이라는 한글이 적혀 있었지요. 그때 아버지로부터 그 화가의 존재를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국민 학생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그런 예술가들의 존재에 대해 부친으로부터 많이 전해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빙점’이라는 소설을 쓴 일본의 미우라 아야코라는 여류 작가에 대해서도 제가 국민학교 5학년 시절 아버지로부터 그녀가 당시 아사히신문인가 무슨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왜 그런 이야기를 제게 해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아마도 당시 한국의 국민학생 중에 미우라 아야코라는 일본 여류작가의 존재를 아는 꼬마는 저 하나였을 거라는 좀 유치한 ‘자부심’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별 의미 없는 이야기입니다만.^^)
그밖에도 당시 동아일보에 소설이 당선됐던 이규희, 홍성원 이런 작가들 이야기도 부친으로부터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꿈을 찍는 사진관’을 쓴 동화작가 강소천선생님은 부친과 함께 뵌 일도 있습니다. ‘문화 예술적인 분위기’를 일찍부터 체득했던 꼬마였지요.^^ 그 이후로도 수많은 작가 화가들의 이야길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야기가 잠시 샛길로 빠졌는데요, ^^ 다시 화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중섭은 우리에게 잘 알려졌다시피 너무도 ‘슬픈 예술가’였지요. 생활고 끝에 일본인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요즘말로 ‘기러기 아빠’로 지내면서 엄청난 고독과 병마에 시달렸지요.
지난번 EBS에서 처음으로 방영한 드라마 ‘명동 백작’에서 이중섭의 고통스런 삶이 나와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중섭은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아무도 임종하지 않은 외로운 죽음 끝에 무연고자로 처리돼 시체실에 사흘이나 방치되었었지요.
그 이후 최근 몇 년 새 그의 장성한 아들은 아버지의 그림이 ‘위작’시비에 휘말리면서 매스컴에 조명을 받기도 했습니다. 행색으로 봐선 그 아들도 그렇게 여유 있는 모습은 아니더군요.
어쨌거나 유족들은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고인이 세상 떠난 지도 반세기가 지났건만 그의 그림들이 이제 와서 10억원이라는 엄청난 고가에 팔려 ‘밀리언 달러 작가’에 그가 끼였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의 그림에는 예술성이 넘쳐난다는 건 인정합니다만 10억원으로 거래된다는 건 좀 이상하다는 겁니다.
박수근 화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불과 51세로 단명한 인생이었고, 살아생전에 엄청난 ‘생활고’에 시달려 제 때 치료조차 받지 못해 한 쪽 눈이 실명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답니다.
박 화백은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데뷔작 ‘나목’에서 실존 모델로 그려낸 인물입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너무 재미있게 읽었던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 박 화백이라는 점에서 그는 제게 상당히 가까운 예술가로 존재했습니다.
박 화백은 이미 12세 때 “하나님 제가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받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지만 가정형편으로 정규 미술 교육은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6·25 전쟁 통에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거나 한 장에 1달러 남짓하는 한국 기념스카프에 그림을 그려주고 장당 6달러 정도를 받아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물론 그 시절과 그 이후 60년대까지만 해도 GNP100달러 남짓인 대한민국은 최빈국 그룹에 속해있던 가난한 나라이니까 그렇잖아도 가난한 화가들의 삶이야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이번에 25억원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낙찰되었다는 ‘시장의 여인들’도 주한 미군 출신인 로널드 존슨이라는 사람이 1965년 ‘5명의 여인과 소녀’와 함께 고작 320달러! 에 사갔던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한국의 화상이 ‘입도선매’식으로 값을 왕창 올려버렸다는 추측을 할 수도 있게네요. 마치 별 볼일 없는 외국소설에 국내 출판업자들이 몰려들어 값을 올려버리는 현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물론 박 화백의 ‘작품 자체’야 훌륭하지만 화상들이 중간에서 ‘투기 열풍’을 조성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박 화백의 그림은 얼핏 보기만 해도 ‘고향의 정서’가 느껴지는 그런 작품들입니다. 비록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에게도 그의 그림은 푸근한 정이 느껴지지요. 잿빛을 띤 흰색을 사용해 주로 생활주변 풍경을 그렸는데 한국서민의 정서를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 역시 생활고와 병마에 시달리면서 51세에 타계했습니다. 살아생전에 그는 늘 그림물감 살 돈이 없어서 애를 태웠고, 생의 마지막에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라는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지요. 천재예술가의 그런 마지막 말에 다시금 숙연해집니다.
김환기 화백의 그림도 참 정감이 가지요. 미술교과서에도 실렸고, 달력 그림으로도 많이 봐왔던 그림입니다. 그 부인이었던 김향안 여사와의 ‘금슬’이 매스컴에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요. 김화백도 61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김여사는 경기여고 출신으로 한때 그 유명한 소설가 이상의 연인으로 알려진 분이기도 합니다. 당대에 최고의 멋쟁이 여성이었지요.
한국에서 손꼽히는 화가의 아내로서 말년의 김여사는 남편의 유작으로 미술관을 짓는데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모두 저마다의 가슴 아픈 ‘스토리’를 갖고 있는 세 화가의 그림 값이 그들의 사후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이 현실은 그리 달가운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화랑가 주변에선 이번 ‘경매’가 일종의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었느냐 라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작년 초에 5억원 호가했던 박 화백의 ‘노상’이라는 작품은 불과 몇 달 후인 지난 12월13일 경매에서 별안간 10억 원으로 뛰었고, 엊그제 3월7일엔 25억원이라는 상식 밖의 가격에 ‘낙찰’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하더군요. “혹시 박수근 작품을 몇 십 점 보유한 화랑이 출품하고 제 3자를 내세워 다시 낙찰 받은 것은 아니냐.”
아무리 ‘명화’라 해도 불과 몇 달 사이에 두 배에서 다섯 배까지 치솟는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현상이지요.
소위말해 ‘큰손들의 조작’이 있지 않고서는 이렇게 두어 달 사이에 몇 배씩 왕창 올라서 급기야는 ‘25억원’에 낙찰되었다는 건 저로선 이해하기 어렵네요.
하기야 그 유명한 고흐도 살아생전에는 딱 한 점의 그림을 단돈 400프랑에 팔았던 게 고작이었지만 그의 사후 100년이 흐른 요즘 그의 그림은 800억원에 팔린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죠. 대체적으로 대부분의 화가들이 생활고속에 괴로운 삶을 살았던 게 세계적 공통 현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림’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건 굉장히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합니다.
이런 형편인데 무슨 ‘아파트 투기’식으로 ‘작전 세력’이 매달려 그처럼 ‘황당한 미친 그림값’을 조성했다면 그건 미술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날 경매에 참석한 사람은 30명 정도, 그나마도 한 사람이 여러 점을 사가는 모습에서 어떤 사람은 정상적 거래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글은 3월 21일 다음의 흥미진진UCC에 소개되면서 많은 방문객이
다녀가셨구요, 찬반의 많은 답글을 남겨주셨습니다.
저는 무슨 의도를 갖고 글을 쓴게 아닙니다.
단지 몇달 사이에 폭등한 그림값이 이해가 안갔고,
유족들은 어려운 생활을 한다는 소리를 전해듣고 개인적 소감을 쓴 겁니다.
어떤 분들은 공감을 해주셨고(화가 혹은 화가의 아내들) , 또 어떤 분들은
혹독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답글을 남기신 많은 분들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단, 뭣도 모르면서 나대지 말고 반성하라는 식의 비아냥같은 답글에 대해선
동감하기 어렵군요.
물론 전문가입장에서 그림시세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걸
우습게 볼 수도 있겠지만 비록 그림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의사표시는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계 미술시장의 추세에대해서도 저는 평소 너무 비싸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물론 전문가들 입장에서야 다르겠지만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천문학적인 그림값들을 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아무튼 우리 스카이뷰의 블로그를 찾아주시고 활발한 의견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편달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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