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눈물이 주룩주룩'을 보고

스카이뷰2 2007. 5. 21. 10:35
 

 

        ‘눈물이 주룩주룩(淚そうそう)’을 보고


모처럼 젊은이들의 명주실 같은 감성에 빠져 볼 수 있는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 ‘눈물이 주룩주룩’이라는 일본영화였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동네에 새로 생긴 영화관에 갔다가 젊은이들의 애틋한 사랑을 다뤘고, 오키나와 올 로케이션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고 솔깃해서 봤습니다. 오키나와는 언젠가는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관광지여서 사전 답사 차원(?)에서 영화를 보게 된 겁니다.


자세한 영화 줄거리나 영화에 대한 평은 전혀 보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영화는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오빠와 오키나와 중심부의 명문고교에 입학한 여고생이 주인공입니다. 두 남매는 각자의 엄마와 아빠가 새로 결혼하면서 맺어진 인위적인 남매입니다. 혈연관계는 전혀 없지만 오누이의 애틋한 사랑은 친 남매 이상입니다.


오빠의 엄마는 재혼한 남편, 그러니까 여동생의 아빠가 결혼한 얼마 뒤 바람처럼 사라진 뒤 홧병을 얻었는지 곧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엄마는 아들에게 여동생 카오루를 잘 보살피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이제 세상엔 어린 오누이만 남겨진 겁니다.


영화를 보기 전 잠시 본 팸플릿엔 ‘같이 살지만 연인은 될 수 없는 우리...’라는 수상쩍은(?) 문구를 전면에 큰 글씨로 새겨 넣어 대충 스토리는 짐작하고 봤습니다만 영화는 그런 요상한 러브 스토리로 흐르진 않았습니다.


건실한 생활인인 스물한 살 요타로는 시장판 아줌마들의 아이돌(?)로 군림합니다. 인사성 밝고 바지런하고 성실한 청년이니 어느 아줌마가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그가 섬에 따로 살던 여동생이 오키나와 시내 최고 명문고교에 붙었다고 엄청 자랑하면서 돌아다니는 걸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오빠는 마치 아빠처럼 여동생을 보살피는데 전심전력합니다.


거기에 부잣집 외동딸이자 명문의대생인 오빠의 연인 케이코가 등장합니다.

저렇게 신분(?) 차가 나는 연인은 불행한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조금 있다가 케이코의 아버지가 등장해 암튼 뻔한 ‘부모의 발언’을 합니다... 부모들이란 어느 나라건 비슷한 존재들인가 봅니다.^^


어쨌거나 오빠 요타로는 여동생 카오루를 명문 오키나와대학에 진학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무슨 극성쟁이 엄마처럼....

생활에 쫓기고, 그 와중에 사기를 당하면서도 오빠는 꿋꿋하게 동생을 보살핍니다.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저는 금세 작고한 소설가 강신재의 단편 소설 ‘젊은 느티나무’가 떠올랐습니다.

그 유명한 ‘그에게선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라는 쿨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그 소설의 주인공들은 저의 10대 시절 웬만한 문학소녀들의 ‘로망’이었습니다.


‘젊은 느티나무’에서도 역시 부모의 재혼으로 피가 섞이지 않은 오누이가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서로를 애틋하게 사랑하지만 서로가 느낄 듯 말듯, 감정의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을 섬세하게 보여줍니다.   


민트 향 같기도 하고 아카시아 향 같기도 한 그 소설의 향기는 어른이 되어서도 제 곁을 떠나질 않았습니다.

한참 세월이 흐른 뒤 그 소설을 다시 보니까 소녀들이 딱 좋아하게 쓴 문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소설이 갖는 ‘존재감’이 훼손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아마도 ‘젊은 느티나무’만큼 ‘청춘 소설’의 우아한 향내를 잃지 않고 있는 우리 소설은 그리 흔치 않을 겁니다. 그 시절엔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아무튼 ‘눈물이 주룩주룩’을 보면서 내내 그 ‘젊은 느티나무’의 추억이 사라지지 않더군요.


이런 소재야 사실 국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동안 많이 등장했었지요.

저는 한번도 보지 않았지만 꽤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가을 동화’라는 드라마도 이 비슷한 줄거리라고 하더군요. 드라마에선 결국 오누이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지만 비극적인 결말이었다고 합니다.


‘눈물이 주룩주룩’도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스토리를 전혀 모르고 영화를 본 저에겐 다소 황당한 결말로 흘렀다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감독의 ‘재능’과 ‘힘’은 느껴지는 웬만한 수준의 영화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 영화에 대해 아주 혹평을 하더군요.


평가란 각자의 취향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제가 이 영화에서 높게 사고 싶었던 점은 오빠가 여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하면서 시장판 아줌마들에게 마치 부모처럼 자랑하고 좋아하는 그런 장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요즘 젊은이들의 정서에는 어필하지 않는 내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새 젊은이들이야 부모덕으로 아무 아쉬운 것 없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니 그런 스토리야 궁상스럽게 비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의 세대만해도 그야말로 세계 최하위급 국가에서 자라난 만큼 ‘생활의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직간접적으로 체험해본 세대이고 부모를 어떻게 섬겨야하고 형제간엔 어떻게 지내야하고 뭐 이런 ‘삼강오륜적인 인생독본’에 익숙했던 세대였던 만큼 영화 속 주인공 청년의 그런 모습이 아름답게 여겨졌던 겁니다.


일본이나 우리나 같은 동양권의 공통된 감정적 정서가 흐르고 있는 만큼 오빠가 동생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이 무슨 이루어질 수 없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보다 더 다가온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멜로 스타일’영화를 많이 만든 감독이라고 합니다.

감독의 따스한 시각이 맘에 들었습니다.


오키나와 현지 올 로케이션이라는 광고 문구답게 오키나와 해변풍경을 간간이  볼 수 있었던 것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몇 해 전 오키나와를 무대로 한  NHK의 아침 드라마에 할머니로 나왔던 배우가 이 영화에서도 오누이의 할머니로 나오더군요.


영화 후반부에 산전수전 다 겪었을 그 할머니의 ‘인생 강론’이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왔습니다. 물론 젊은 세대에겐 그리 어필하지 못할 이야기겠지만 저에겐 퍽이나 공감이 가는 인상적인 장면이었습니다.


일본 박스 오피스 2주간 1위를 차지했고, 극장 흥행수익 30억엔 돌파라는 팸플릿의 문구가 좀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영화는 그냥 ‘순하게’ 진행되었지만 그 영화가 일본 인기여가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소리를 듣자 왜 일본에서 인기를 끌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순정멜로드라마가 어떤 이들에겐 뜨악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건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감 탓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인들에겐 자신들이 좋아하는 여가수의 실화라는 점이 상당히 어필했던 것 같습니다. 허구의 드라마보다는 현실이 들어있는 실화가  때론 관객에게 더 어필할 수 있겠지요.


어쨌거나 일요일 심야에 본 ‘눈물이 주룩주룩’은 모처럼 10대의 감수성을 회복시키는데 ‘회춘제’같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동행한 가족은 뭐 무덤덤하다면서 블로그에 올리지 말 것을 당부하더군요.^^


삶에 찌든 올드 세대들에겐 오히려 이런 류의 ‘청춘 영화’가 무뎌진 감성에 새콤한 초 한 방울을 쳐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경으로 간간히 흐른 애틋한 가사의 일본 가요도 괜찮았습니다. 

아무 편견 없이 젊은이들의 트렌드도 볼 겸 그냥 스크린에 저를 투사하는 심정으로 영화한편을 보고 나니까 머리가 개운해지는 듯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