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전도연 행복한 고민
오늘 아침 알랭 들롱으로부터 손등에 키스를 받고 있는 전도연의 모습은
사랑스럽고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언감생심 부러웠다.
왕년의 꽃미남 알랭 들롱은 1960년 ‘태양은 가득히’로 전 세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고 칠순이 넘은 오늘도 장발의 멋진 은빛 머리카락 휘날리며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여배우에게 상을 주러 나온 것이다.
랄프 로렌이 여우주연상을 받을 전도연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했다는 실버에 골드 빛이 감도는 우아한 홀터넥 드레스를 입고 나온 전도연도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그녀에게 ‘시상하게 돼서 영광입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동양의 앙증맞아 보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배우의 손등에 키스하는 알랭 들롱의 기품 있는 모습도 내겐 꽤 감동적이었다.
그 사진을 온라인 뉴스로 보는 순간 ‘어머! 전도연, 어머 알랭 들롱!’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세계 정상에 우뚝 선 우리 여배우 전도연! 그리고 황혼의 중후한 노배우가 연출하는 그 한 장의 사진은 오늘 아침 나를 행복하게 했다.
곧이어 텔레비전 아침 뉴스시간, 칸의 뤼미에르 극장 무대에서 ‘전도연’을 호명하는 풍채 좋은 사회자와 자신의 이름을 들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전도연의 표정은 그녀를 배우이기 전 수줍음 가득한 새색시로 만들어 보기에 좋았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전도연으로 시작해 전도연으로 저물어 갔다.
온라인 뉴스에서도 온통 전도연 기사로 가득했다. 물론 다른 뉴스들도 있었지만 눈길은 아무래도 익숙한 이름, 보고 또 봤는데도 다시 보게 되는 전도연의 칸 여우주연상 수상 관련 기사였다. 물론 영화팬들에 한한 이야기지만...
칸 영화제가 60주년을 맞아 유난히 공을 들였다는 여우주연상 선정에 대한민국의 여배우 전도연이 뽑힌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거의 누구나가 기뻐하고 흐뭇해할 뉴스인 것 같다. 오죽하면 대통령마저 ‘축전’을 띄워 그녀와 그 일행을 격려했겠는가.
작년 2월 입춘이 조금 지난 무렵,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는 영화배우들과 감독들이 스크린 쿼터제 폐지 반대 시위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하루 한 명씩, 안성기· 박중훈· 장동건 등 건장한 남자 배우들에 뒤이어 전도연이 홀로 피켓을 들고 나선 것을 취재한 일이 있다.
그날따라 유난히 추운 날씨여서 자그마한 전도연의 코끝은 루돌프 사슴 코처럼 빨갛게 변했다. 화려한 여배우답지 않게 ‘쌩얼’에 투박한 검정색 누빔 코트를 입은 그녀는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스크린 쿼터 반대 시위피켓을 맨손으로 들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녀는 대단한 미모라고 하기는 좀 그랬지만 착하고 맑은 눈빛에 지혜로워 보이는 톡 튀어나온 동글한 이마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녀가 시위하기 하루 전날 장동건이 나섰을 때는 2천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 결국 장동건은 시위장소를 여의도로 옮겨 기습시위를 해야 했지만 전도연은 조금은 썰렁하다싶을 정도로 ‘관객’은 한산했다.
그래도 그녀의 표정은 사뭇 결연해 보였다. 그때 여배우로선 당차보이는 그녀의 태도를 보면서‘반짝 스타’로 그칠 것 같지는 않다는 만만찮은 느낌을 받았다.
1973년 2월생인 전도연은 97년 영화 ‘접속’으로 데뷔한 이래 꼭 10년 만에 60회 칸 영화제에서 ‘밀양’으로 일약 세계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을 누르고 여왕으로 등극했다.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전도연은 ‘청’이 좋은 여배우다. 그녀의 낭랑하면서도 명랑한 목소리는 아주 독특하다. 무슨 목소리 전문가는 아니지만 나는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에서 그녀의 ‘행운’을 감지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여배우나 여가수들은 ‘허스키 보이스’가 흔한 편인데 전도연은 천진난만한 여학생 같은 밝은 음색이어서 인상에 남았다. 똘똘한 듯하다고나 할까.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힘이 있는 목소리다.
현재 활동 중이거나 그동안 활약했던 한국 여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중 전도연이 나온 영화를 제일 많이 본 것 같다. 그녀의 열혈팬은 아니지만 보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인데 볼 때마다 대체로 무난했던 느낌이 들었다.
얼른 떠오르는 영화만 해도 접속, 내 마음의 풍금, 약속, 해피 엔드, 스캔들, 너는 내 운명 등 여섯 편이나 된다.
조폭두목 박신양과 비련에 빠지는 여의사 역을 맡았던 ‘약속’을 보면서는 눈물까지 흘렸었다. ‘내 마음의 풍금’도 빛바랜 가족사진으로 처리되는 마지막 신에서 뭉클한 감정이 들었고 그 영화에 점수를 주었다.
불륜 끝에 파멸을 맞는 ‘해피 엔드’에선 전도연이 대성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 애인과의 정사 중 ‘좋아’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 모범적인 음색과는 전혀 관계없이 아주 섹시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남성 팬들의 청각에 굉장히 어필했을 것 같다. 에이즈에 걸린 다방 여종업원으로 나온 너는 내 운명을 보면서도 꽤 울었었다.^^
아무튼 국내 여배우들 중에 전도연 영화를 제일 많이 봤다는 것은 그녀의 연기가 그만큼 설득력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 그녀를 다시 본 것은 그녀의 일상이 소개된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기사를 통해서였다. 한 방송사에서 스타에게 ‘대리모’역할을 맡기고 몇 주 동안 아기를 키우는 미션을 주는 프로그램에서 그녀는 돌이 채 안 된 아기를 몇 주 동안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마치 아기의 친엄마인 양.
그리곤 그 아기가 양부모를 찾아 떠나는 날, 공항에서 아기를 부여안고 엉엉 우는데 그 모습에서 ‘인간 전도연’의 고운 심성이 무척이나 따스하게 비쳐졌다. 덩달아 나까지 울고 만 기억이 있다.
두 달 전쯤 그녀는 비공개로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하기 며칠 전 한 온라인 기사를 보면서 ‘풋’ 하며 웃고 말았다. 신랑 될 사람이 전도연이 애지중지하는 쿠퍼 승용차를 빌려 탄 뒤 부주의로 차체에 작은 흠집을 낸 것을 보고 그녀는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이렇게 함부로 몰고 다니냐”며 면박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명 ‘미니’라고도 불리는 마치 티코처럼 작은 그녀의 차는 수입차 중엔 가격이 3천만원대로 비교적 저렴하지만 모양이 앙증맞고 튼튼해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은 차다. 물론 그녀의 예비신랑은 ‘재력가’로 그녀에게 미니 쿠퍼 정도는 쉽게 사주고도 남을 부자이지만 그녀가 부들부들 떨며 아끼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배우 전도연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연예계에선 이름난 ‘짠순이’라는 전도연은 “왜 헬스클럽 같은 곳에 비싼 돈내고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저녁 먹고 한 두어 시간 우리 동네 아파트 한 바퀴 돌면 저절로 운동이 되는 것 아니냐”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은막의 스타’ ‘꿈을 먹고 사는 여배우’ 이런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다부진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준 이런 전도연이 그래서 마음에 든다.
지금 그녀는 어쩌면 인생의 최고 절정기를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배우로서는 무한한 연기 가능성이 있는 거지만 저렇게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그 자체로 그녀는 자신의 배우인생에서 일단 ‘정점’에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 표현대로라면 ‘똑똑하고 능력있고 옷 잘 입는 신랑’까지 만나 불과 두 달 전 백년가약까지 맺었으니 한 여성으로서도 최고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예전 고교시절, 국민윤리 선생님께서 칠판에 산을 하나 그리시고는 맨 꼭대기에 점을 하나 찍으셨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그 점 위에 ‘結婚’이라고 쓰셨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그 수업시간만은 우리 동창생들 99%가 기억하고 있다.
그렇듯이 ‘결혼’은 중요한 것인데 여배우로서 그런 중요한 지점을 이제 막 통과한데다가, 아무리 세계적으로 뛰어난 여배우라도 일생에 한번 받을까 말까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탔으니 이제 전도연에겐 역설적으로 바짝 긴장할 일만 남은 것 같다. 예전부터 ‘겹경사엔 정신 차려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짠순이’에 ‘또순이’ 이미지까지 갖고 있는 전도연이니만큼 아마도 누구보다도 지금 자신에게 ‘쌍으로’ 달려와 안긴 결혼과 최고여배우 수상이라는 상패를 안으면서 더 똘똘한 목소리로 말할 것 같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할게요”라고.
개인적으로는 아직 ‘밀양’이라는 영화는 예고편 밖에 보질 못했다. 이 영화가CJ에서 배급하는 것이어서 CGV극장에선 어김없이 ‘밀양’의 예고편을 해주고 있다. 덕분에 예고편만 세번이나 봐서 대충 어떤 분위기의 영화라는 ‘감’은 잡고 있다.
신들린 듯한 전도연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아려올 정도다. 줄거리 또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스토리다. 어린 자식이 유괴살해당하고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이다. 정말 이창동씨는 혹시 무슨 개인적으로 깊은 상처가 있는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놓는 작품마다 왜 그렇게 평범하지 못하고 사람 괴롭히는 소재와 주제를 단골로 그리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물론 이 바보야! 예술이라는 게 그렇게 평범한 데서는 나오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스토리 속에서 작품을 만들면 좀 좋겠나! 꼭 그렇게 비틀린 인생들을 인생의 전부인양 이래도 심각해지지 않을래 하는 듯 이상하게 배배 꽈서 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창동씨가 감독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별 보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든 것이다. 그가 만든 ‘초록물고기’나 ‘박하사탕’ ‘오아시스’를 본 뒤 이제 이씨의 영화는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사람에 따라 기호와 취향이 다르겠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왜 그렇게 한결같이 관객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이런 소리 하면 영화의 ‘영’자도 모르는 무식한 인간 취급을 받겠지만 어쨌거나 그의 영화는 나의 기호에는 전혀 맞지 않다는 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제일 싫어하는 스토리를 돈 내고 들어가 두 시간이나 본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나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영화는 즐거우려고 보고, 위로받기 위해 보는 것인데 끔찍한 이야기를 주제로 만든 영화를 두 시간이나 봐줘야 한다는 건 거의 '생지옥'이다.^^
다루는 작품마다 밑바닥 인생에, 끔찍한 비극에 암튼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만 다루고 있지만 이창동 개인은 노무현 정권에서 문화공보부 장관까지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린 것은 어찌 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인 듯하다.
더구나 장관 재직 시 그가 했던 이러저러한 언행은 지금 생각해도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전도연이 그렇게 세계적인 상을 탄 영화니만큼 그녀에 대한 예의상 한번 봐줘야 하는 건 아닐까라고 오늘 하루 수십 번이나 볼까말까 하면서 ‘행복한 고민’에 빠졌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고민을 일거에 해소해준 ‘단비’같은 기사를 본 것이다.
미국의 권위 있는 영화전문지 ‘버라이어티’가 전도연의 연기는 극찬했으나 ‘밀양’에 대해서는 혹평을 했다는 것이다.
버라이어티는 영화평론가 데렉 엘리의 리뷰에서 전도연을 가리켜 “사실상 영화를 혼자 이끌었다”면서 “한국의 어느 다른 여배우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변신 과정을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엘리는 “전도연의 연기는 카멜레온 같이 영화 속에 녹아든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러나 ‘밀양’ 자체에 대해서는 “너무나 긴 종반부로 인해 궁극적으로 실패한 작품”이라며 “전도연의 빼어난 연기로도 진정한 긴장감과 드라마를 끌어낼 수 없었다. 초반부와 중반부까지는 훌륭하지만 지나치게 긴 후반부가 전도연의 곤경에 관객이 진정으로 공감하지 못하게 한다. 20분 정도 잘라내 압축한다면 그나마 해외시장 진출의 여지가 있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남의 잔치에 재 뿌릴 생각은 전혀 없지만, ‘행복한 전도연’을 봐서는 봐주어야할 영화 같지만 평소 이창동스타일에 전혀 공감하지 않는 나로서는 ‘밀양’을 볼까 말까로 ‘행복한 고민’을 했는데 권위 있는 영화잡지의 기자가 그런 식으로 평한 걸 보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밀양’은 보지 않겠다고.
단 요즘 유행어인 ‘급 호감’으로 바뀐 우리의 ‘행복한 전도연’과는 행운이 따른다면 가까운 시일 안에 인터뷰를 한 번 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행복한 고민’이 되었다.
왜? 그녀는 이제 쉽게 만날 수 있는 시중의 여배우가 아니니까.^^
어쨌든 축하해요 전도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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