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웠던 아카데미 시상식장 풍경-영화같은 인생· 인생같은 영화
작년에 이어 올해도 OCN덕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79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생중계로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여기서는 26일 오전 8시 반부터 시상식이 열리는 코닥 극장 주변과 레드 카펫에서 인터뷰하는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최고로 멋을 내고 카메라 앞을 지나가는 여배우들의 드레스를 감상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즐거움이었지요.
재밌는 것은 여배우들의 드레스를 일일이 품평하는 남녀 캐스터들의 엄격한 심사평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짜게 점수를 매기는지요. 아마 그들의 그런 비평을 듣는 해당 여배우들은 굉장히 화가 났을 것 같더군요.
“저런 액세서리는 안 하는 게 더 좋았을 뻔 했다”는 그나마 점잖은 평이었구요, “천이 모자랐나보죠?”라며 드레스 디자인에 대해 깐족거리는 평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대는 그들을 보니 그 쪽 동네 비평 문화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뉴욕타임스를 필두로 각 매스컴에선 ‘베스트’ ‘워스트’ 드레서를 각각 5명씩 뽑았다니 그들의 냉정한 ‘심미안’을 어떻게 봐줘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네 같으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웬만하면 ‘괜찮았어’ 정도로 지나갈 일 같은데 그렇게 정성들여 입고 나온 여배우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걸 보면 그들이 ‘배우’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역설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개 연말에 열리는 한국의 영화제 시상식 장면도 놓치지 않고 보는 저로서는 이 아카데미 시상식이야말로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을 만큼 흥미를 갖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들의 유머나 한결같이 멋있어 보이는 그들의 외적인 풍채는 물론이고 ‘영화와 함께 숨 쉬는 그 예술적 공기’가 그렇게 부럽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윤기가 흐른다고나 할까요, 물론 그들의 내면에는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어야 한다는 강렬한 희망사항이 내재되어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야말로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는 듯한’ 그 풍성한 분위기가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어제 가장 눈길을 끌었던 몇 몇 배우들과 감독 그리고 유명 인사들을 생각나는 대로 짚어보겠습니다.
우선 흑인배우 윌 스미스 가족이 맨 먼저 시선을 끌었습니다.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가 지금 서울에서도 개봉되고 있지만 윌 스미스와 그 부인 그리고 꼬맹이 아들은 그들이 더 이상 차별받는 ‘흑인 가족’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듯 했습니다. 윌 스미스는 물론이고 예닐곱살 정도로 곱슬머리가 아주 귀여워 보이는 그 아들도 시상자 대열에 끼었더군요.
하기야 이번 아카데미는 ‘실버와 블랙과 레즈비언의 파티’였다는 평이 나올 정도니 그 풍요로워 보이는 ‘흑인 가족’이 새삼스러울 건 없는 것 같기도 하네요.
올해 77세의 노익장 클린트 이스트우드도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멋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할아버지는 “유력한 감독상 후보로 당신과 마틴 스콜세지가 꼽히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경쟁 같은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역시 어르신답게 여유 있는 답변을 하더군요.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도시의 시장까지 지냈다는 이 할아버지는 엔리오 모리코네라는 이탈리아 출신 노작곡가가 공로상을 받고 이태리말로 수상소감을 말하자 즉석에서 영어로 통역까지 하더군요. 대단한 노익장이죠!
본 시상식이 시작되면서 무대 위로 첫 등장한 사회자를 보는 순간 저는 “어 여자야 남자야”라고 잠시 혼돈을 느껴야 했습니다. 바지 정장을 입은 모습이얼핏 보기엔 남자 스타일이었거든요. 더구나 단독 사회를 여성이 보는 예는 거의 없었으니까요.
엘런 드제네러스라는 이름의 이 사회자는 미국에선 아주 유명한 여성 코미디언이자 토크쇼 진행자이고 성우로도 활약하는 만능 엔터테이너라는군요.
이 여성이 바로 ‘레즈비언’이라고 합니다. 어쩐지^^
그녀 스스로가 시상식 사회를 보는 도중에 “흑인과 유대인 그리고 동성애자가 없다면 오스카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여성은 얼핏 보면 영국의 죽은 다이애나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세 시간 이상 진행된 시상식을 아주 잘 이끌어나간 것 같았습니다.
<더 퀸>의 헬렌 미렌도 시상자로 무대에 섰습니다. 물론 조금 후엔 그녀 자신이 여우주연상을 받으러 또 무대에 올랐지만요. <더 퀸>에서 근엄한 카리스마의 여왕 모습은 간데없었지만 그래도 62세의 여배우로서 은발의 단발머리에 우아한 드레스 차림이 굉장히 우아해 보였습니다.
“여왕에게 이 상을 받친다”는 그녀의 수상소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우조연상을 받은 올해 73세의 앨런 아킨 할아버지의 수상도 눈길을 끌었습니다. 생애 첫 오스카를 받아서 떨린다면서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상소감문 이 적힌 종이를 조심스레 꺼내서 읽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엘 고아 전 부통령이 <불편한 진실>이라는 환경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오스카상을 받은 것도 이번 시상식장의 큰 볼거리였지요.
환경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해온 그는 이번에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함께 ‘멋진 코미디’장면을 연출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아 보였습니다.
물론 잘 짜여진 각본대로 한 것이었겠지만, 환경문제는 정치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라고 말하는 그의 중후한 모습에서 요즘 유행하는 말인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디카프리오가 “이 기회를 빌어 뭐 중요한 발표할 건 없냐”고 묻자 고어는 “ 진짜로 아무것도 발표할 것이 없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좋은 기회니까”하면서 양복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기회에 공식적으로 발표할까 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엔딩을 알리는 아카데미 주제음악이 울려 퍼지고, 고어는 짐짓 놀란 듯한 표정으로 등 떠밀려 무대를 내려가는 ‘연출된 장면’은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정치는 안 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고어지만 혹시 내년 선거에 나올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 그리고 이 환경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제가를 부른 여성 록가수도 대단해 보였습니다.
주제가상까지 받은데 힘입어선지 멜리사 에더릿지라는 이 여성 가수는 “나의 와이프한테 감사를 표한다”는 인사말을 해서 처음엔 어리둥절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 역시 레즈비언으로 유명한 여성이라는군요. 그래서 그런지 바지정장 차림으로 노래 부르는 모습에서 ‘남성성’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그녀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시점에 제가 그녀로부터 막연히 순간적으로 느꼈던 낌새입니다.^^(사회자 엘런에게서도 마찬가지였죠^^)
이번 시상식의 최고 하이라이트는 역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감독상 수상장면이었습니다.
아카데미 감독상에 36년간 5차례나 지명되었지만 한 번도 운이 연결되지 않은 스콜세지 감독은 이번에는 탈것이라는 예측이 많았지만 그래도 워낙 ‘상복’이 없다보니까 조마조마했었나봅니다.
65세라는 적잖은 연세에도 정작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야말로 초등학생처럼 거의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하더군요. 무대에 뛰어가기 직전까지 그가 입맞춤한 남녀 관객이 10명은 넘어보였습니다.
그의 이름이 불리기 직전 무대에 오른 프랜시스 코폴라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이 세 명의 워낙 유명한 감독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대부분 스콜세지를 쳐다보기 시작하더군요. 카메라도 계속 그 쪽을 비추고... 그래도 초조한지 긴장한 모습을 보이던 노감독은 그래서 그렇게 난리법석의 포즈를 취했나 봅니다.
무대에 올라가서도 “다시 한번 명단을 확인해 달라”는 조크를 날려 지난 36년 ‘무관의 세월’에 대해 ‘복수’라도 하는 듯 했습니다. 아무튼 ‘땡큐’를 열 번도 넘게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뭉클해졌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지난 몇 년간 길거리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나 병원 의사에게서나 어딜 가더라도 꼭 상을 받으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말로 수상소감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그의 ‘사회성’깊은 작품세계가 말해주듯 ‘영원히 반항하는 청년기질’을 유감없이 보여주더군요.
그러다가는 다시 ‘인자한 할아버지’모드가 돼 자신의 일곱 살짜리 손녀 이름을 호명하면서 행복해 하는 모습이란....
스콜세지 감독의 이번 수상작품<디파티드>는 홍콩영화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것인데 작품상까지 받는 걸 보고 개인적으론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무간도는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어쨌거나 갱 영화인데, 오리지날 작품도 아니고 리메이크한 게 작품상까지 받았다는 게 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아카데미 시상식은 이렇게 해서 막을 내렸습니다.
보는 동안 내내 흐뭇하고 흡족한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앨 고어 전 부통령의 그 여유 있는 제스추어를 보면서 지금 우리의 정치 현실이 떠올라 좀 답답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영화 같은 인생, 인생 같은 영화’라는 캐치프레이즈를 한번 만들어봤습니다.^^ 우리 영화인들도 아카데미 시상식을 벤치마킹해서 좀 더 재미있고 품위 있으면서도 화려한 영화제를 만들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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