졌지만 잘했다! 우리 ‘국대 팀’!
기다리고 기다렸던 복수혈전(?)은 안타깝게 졌지만 그래도 잘했다 우리 국가대표팀!
좀 아쉽다면 여전히 2% 부족한 골 결정력! 0대2로 졌지만 심정적으론 0대 1로 졌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는 페널티로 내준 거니까.
조금 전 상암 벌에서 끝난 대한민국과 네덜란드의 국가대표팀 평가전은 아쉬움을 남긴 경기였다. 그래도 90분 동안 땀 흘리며 그라운드를 누빈 우리 대표팀 선수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경기 시작 직전 텔레비전 화면에 뜬 ‘관전 포인트’의 맨 첫 번째는 ‘9년 전 0대5로 진 설욕전’이라는 것이었다. 좀 우스웠다. 물론 9년 전 쓰라린 패배가 있었지만 그 사이 우린 온 나라가 들썩거리면서 월드컵 4강전에도 진출했고, 작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원정 첫 승’을 거둔 만만치 않은 팀으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웬 ‘9년 전 불쾌했던 과거’를 관전 포인트 상석(上席)에 배치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네덜란드라는 팀은 현재 FIFA 6위! 대한민국은 FIFA 51위! 라는 대목이 걸렸다. 그래도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아닌가!
축구감독들의 사관학교라는 네덜란드 팀과의 경기가 벌어진 상암경기장은 넘실거리는 청춘의 붉은 악마들 함성으로 경기 시작 전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비록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보는 것이지만 그 ‘청춘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번 경기에는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 해외파 ‘빅 3’가 모두 결장해 서운했지만 그래도 주장 김남일의 투지력 넘치는 표정을 보니 기운이 솟는다.
오랜 슬럼프에 시달렸던 골키퍼 이운재는 몰라볼 정도로 날씬해진 모습으로 후배들을 독려하는 모습이 믿음직하다.
6위와 51위의 싸움이니 우리로선 별 잃을 것도 없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냥 들이대보는 거다!
우리처럼 ‘안방 거사’들이야 텔레비전 화면에 잠시 스쳐지나가는 우리 선수들의 표정 하나하나, 그라운드에 가득 찬 열기 하나하나를 놓칠세라 화면에 시각을 고정시키면서 오랜만에 ‘기도’의 약발도 기대해보는 처지다.(급할 때만 하나님 찾으니...^^)
아무튼 이렇게 일개 시청자의 입장이지만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명예 감독’이자 ‘명예 선수’ 그리고 ‘명예치어 리더’격인 우리 안방 응원 팀은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양국 국가가 나오는 순간 지극히 짧은 시간이지만 왠지 불길한 예감이 스쳐지나갔다. 네덜란드 국가를 부르는 미모의 소프라노 가수는 분명 한국여성인데도 아주 여유있는 표정으로 멋지게 네덜란드 국가를 잘도 불렀다.
그런데 콧수염을 자랑하는 바리톤인지 하는 한국인 남자 성악가 김동규는 우리 애국가를 부르는데 첫 음정을 잘 못 잡아 ‘동’ ‘동해물과’라고 스타트를 더듬는다.
축구 경기 많이 봤지만 저렇게 애국가를 더듬거리며 시작하는 건 첨 봤다. 그 순간 우리 대한민국 팀이 꼭 질 것만 같고, 진다면 그건 실력 차가 아니라 저 남자가수가 애국가를 더듬은 탓이라는 좀 생뚱맞은 생각마저 스쳐지나갔다.
어쨌거나 예정된 시간대로 경기는 시작됐다.
자 이제부터는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칠 수 없는 거다.
대한민국 국가 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관전하는 것이 나의 ‘인생 최고의 낙!’이라면 어떤 분들은 웃을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그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
녹색의 그라운드 위에서 우리의 장한 국대팀 선수들이 푸른 말갈기 휘날리며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에서 나는 장엄함과 비장함에서 비롯되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오늘도 그랬다. 우리 선수들 모두 다부진 표정이다. 특히 인디언 추장처럼 가는 헤어밴드를 질끈 동여매고 나온 이천수 선수의 표정에는 ‘결기’가 서려있다. 어느 선수보다 아름다운 프리킥을 우리에게 보여 주어왔던 이천수는 그동안 이러저러한 시련을 겪어선지 다소 앳된 청년 티는 모두 벗어버린 듯한 얼굴이다.
왕 자 복근을 자랑하며 CF도 찍었다던 조재진 선수의 표정에도 야무진 각오가 묻어있다. 여가수와 연애한다는 소문은 아마 헛소문일 것이다.^^
선수들 하나하나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결의에 차 있는 모습이다.
상대팀인 네덜란드 선수들은 다소 여유가 있어 보인다. 소년 합창단원 같아 보이는 미소년 풍의 선수들도 여럿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여려 보이는 선수들이지만 정작 녹색 잔디 그라운드에선 돌변하는 모습이 비록 적군이지만 멋있어 보였다.
이렇게 젊은 전사들 하나하나를 속으로 품평하면서 오늘의 전적은 제발 1대 0으로 우리 대한민국이 승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는데 저 바리톤이 애국가 서두를 저렇게 더듬었으니 어찌할꼬!
경기 시작 1분이 조금 지났을 때 네덜란드의 신예 흑인 선수 슬로리가 이름과는 다르게 매우 민첩한 슛으로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노 골이었으니 망정이지 정말 ‘소름끼치는 슛’이었다.
그때부터 조마조마한 장면이 속출했다. 그렇다고 우리가 밀린 건 아니었다. 우리 선수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뛰는 모습이다. 너무 그러니까 좀 가여운 느낌마저 든다.
젊은 민완 첩보원 스타일인 판 바스턴 네덜란드 감독은 독수리 눈매로 시종 선수들에게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그가 후반 전 거의 대세가 확정되면서 선수 교체로 들어오는 흑인 선수 멜히옷에게 찡긋하며 보낸 윙크 장면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왜 저렇게 축구 감독들은 한결같이 미남형에 연기력도 뛰어난지....표정 변화가 전혀 없는 포커페이스 바스턴 감독의 그 윙크는 축구의 마력이 무엇인지를 웅변하는 듯했다.
그에 비해 우리 국대 팀 감독인 핌 베어백은 자신의 조국인 네덜란드와 맞서서 이겨야 하는 ‘기구한 운명’의 자신의 직업 탓인지 영 표정이 어둡다.
경기 시작 전 양국 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 두 번 경례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모국 선수들을 상대로 경기를 이겨야 하는 감독의 고뇌를 읽을 수 있었다. 그 탓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졌다.^^
전반 초반부에 인디언 추장 같은 이천수가 황금의 프리킥 기회를 잡았지만 네덜란드 골키퍼가 워낙 잘하는 선수인지 영 맥을 못 췄다.
이렇게 안타까운 ‘노 골’ 장면은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여러 번 나와 안타까운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골 운’이 따르지 않나보다. 제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도 운이 안 따라 주면 어쩔 수 없는 게 세상 이치이니 어쩌겠는가!
오늘 보조해설위원 자리에 앉은 이영표는 회색 정장을 차려입고 중계석에 앉아 있었다. 마침 그 자신이 네덜란드 팀에서 활약했던 경험이 있어서 아주 재미있고 생동감 있는 해설을 들려줬다.
평소에도 ‘똘똘한 이미지’의 이영표는 해설을 하면서도 그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네덜란드 선수들 하나하나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경기 보는 재미를 추가 시켰다.
전반 30분 쯤 지나서, 우리에게 재앙이 덮쳤다.
문제의 흑인 선수 슬로리와 우리의 김진규 선수가 맞붙었는데 경기 내내 우리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린 듯한 ‘그라운드의 독재자’ 주심이 페널티를 선언하는 게 아닌가!
내가 볼 땐 ‘천부당만부당’이지만 어쩌겠나, 선수 이외엔 유일하게 그라운드를 누비는 ‘저 독재자’의 휘슬을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이렇게 해서 우린 ‘재수 없게’ 한 골을 먹고 만 것이다. (사실 페널티로 한 점 잃은 건 뭐 그리 대수는 아니다.)
페널티 슛을 성공시킨 반데 바르트라는 미소년 풍의 선수는 알고 보니 이영표와 둘도 없는 파트너 사이였단다. 이영표 얘기로는 한 솥밥 먹으면서, 경기마다 패스를 가장 많이 주고받았다고 한다.
더구나 반데 바르트는 이미 10세 때부터 그 ‘명성’이 온 네덜란드에 자자했던 ‘축구 천재’ 라는 해설을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진다. 아무래도 저 녀석 때문에 우리가 편치 못하겠구나 생각하니 은근 얄미워진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바로 그 재능이 그 쪽 나라에서는 ‘사랑스러움’ 그 자체인 것을...
그야말로 인생만사 빛과 그림자인 듯하다.
결국 나를 덮쳤던 ‘불길한 예감’대로 그 ‘축구 천재’가 후반 27분경 ‘춤추듯’ 쉽게 밀어 넣은 슛으로 그들은 승리했고 우리는 패배한 것이다.
가만 보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축구천재들은 골을 아주 쉽게 넣는다.
무슨 천신만고 끝에 극적으로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밥 먹듯 한다. 아니 그냥 춤추듯 슬쩍 슬쩍 발만 갖다 대는 데 어느새 골 망이 출렁이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 우리 팀도 만만치 않았다. 전반전 끝날 무렵, 송종국이 어시스턴트 해줘서 김정우가 시도했던 슛!은 비록 골로 연결되진 못했지만 너무도 멋있었다. 이영표 얘기론 송종국이 게임 끝나고 “형 봤지?”라고 으스댈 것이란다. 그 얘기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오늘 경기에서 아마추어 관전평론가인 내가 보기에 수훈갑은 이천수와 송종국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전반 끝나기 직전 대퇴부 부상으로 들 것에 실려나가는 ‘비운’을 겪은 조재진도 나름 훌륭한 한 몫을 해냈다.
후반에도 지치지 않고 날아다니는 이천수의 모습은 멋있었다. 결정적으로 골로 연결이 안 돼 아쉬웠지만 그의 분투하는 모습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선수에게 프리킥의 찬스는 또 찾아왔지만 그 놈의 ‘운’이 뭔지 영 야멸차게 따라주지 않으니 천하의 이천수라도 도리는 없었다.
막판 1분인가를 남겨놓고 22세의 김진규가 빨랫줄 같이 쪽 곧은 아주 위력적인 슛을 날렸으나 그것도 ‘운’의 도움을 못 받고 살짝 빗겨나가 땅을 치게 만들었다. 더더군다나 맨 마지막 최성국이 시도한 슛도 역시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다. 이런 걸 아마 사람들은 ‘골 결정력이 없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운이 안 따라줘서 그런 것이라고 변명해 주고 싶다.^^
결국 경기는 0대 2로 우리가 양보하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선수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스트레스가 좍 풀려나가는 듯했다.
우리 대표 팀이 비록 졌지만 경기 자체는 아주 멋졌다. 그리고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라는 메시지를 보여주는 경기였다.
마지막에 이영표의 해설이 여운을 남겼다. “2대 0이 한국과 네덜란드의 거리다. 패배를 인정하고 더 노력하겠다.”
FIFA 6위와 51위의 경기였는데도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선물한 우리 국대 팀에게 마음의 꽃다발을 보낸다. 국대 팀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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