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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낫 데어', 매력적인 케이트 블란쳇

스카이뷰2 2008. 6. 3. 00:44
 

 

  

  ‘아임 낫 데어’,  매력적인 케이트 블란쳇


사람이나 영화나 그 분위기 자체로 매력적인 경우가 가끔 있다.

미국의 뮤지션이자 작가,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밥 딜런을 모델로 만든 ‘아임 낫 데어(I'M NOT THERE)’는 톱클래스 출연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나지만 영화자체도 상당히 매력 있다.


밥 딜런이라는 미국 가수를 모르는 사람이 봤더라도 영화 전편에 흐르는 귀에 익은 음악과 의미 깊은 대사, 그리고 배우들의 살아있는 연기에서 왠지 ‘멋스럽고 매력적인 기운’을 감지해낼 수 있을 것이다.

135분이라는 짧지 않은 러닝타임을 퍼즐을 짜 맞추듯 요리조리 솜씨를 발휘해 낭비하지 않은 토드 헤인즈 감독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매력의 정체를 간단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막연한 호감이나 혹은 근거 없는   끌림 정도라고나 할까. 어떤 경우엔 이유 없이 무조건 좋다는 느낌이 바로 매력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전에는 매력에 대해 ‘이상하게 사람의 눈이나 마음을 호리어 끄는 힘’으로 나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기운이 우리의 감성을 자극해 좋다는 느낌을 선사하는 것이다. 봄꽃향기 같은 것이라고나 해야 할지.

아무튼 어떤 존재에 대해 ‘매력 있다’는 것은 그 이미지에 받치는 최상의 찬사가 될 수 있다. 


영화에서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배우가 내뿜는 매력은 관객동원의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아임 낫 데어’는 그 특이한 스타일과  출연배우들의 열연으로 영화적 매력을 더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영화가 신선하다는 말은 좀 진부한 듯하다. 이 영화는 이제까지 보기 힘들었던 아주 독특한 구성방식으로 미국 문화계를 뒤흔들어오면서도 은둔자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올해 67세 된 밥 딜런의 다양한 아이덴티티를 관객들과 함께 탐험해 나가고 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밥 딜런이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다. ‘모든 이였으나 아무도 아니었던 단 한 사람!’ ‘나는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누구도 아니다’ 무슨 심오한 선문답 같기도 하고 니체 같기도 한 철학적 뉘앙스가 느껴지는 그런 영화다.


브라운 대학 출신으로 배우 감독 제작 각본 편집 등 영화에 관련된 거의 모든 일들을 직접 경험해온 헤인즈 감독이기에 까다롭다는 밥 딜런도 자신의 전기 영화를 만들겠다는 감독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흰 수염 휘날리며 동양의 현자 같은 풍모로 변한 리처드 기어도 ‘아임 낫 데어’에 출연을 결정한 이유에 대해 “밥 딜런의 음악, 토드 헤인즈 감독, 그리고 좋은 시나리오”를 꼽았다. 시나리오는 물론 재간 있는 이 감독이 직접 썼다.


현존하는 가수를 주인공으로 만든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이 영화는 옴니버스나 다큐멘터리처럼  그럴듯하게 현실의 ‘그’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그가 만들어온 여러 가지 노랫말을 기둥 삼아 아주 멋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다. 그의 노래를 잘 몰라도 좋다. 그냥 영화가 흘러가는 대로 그 흐름에 자신을 맡기면 된다.


1960년대 포크 뮤직 붐을 일으키며 데뷔한 밥 딜런은 지금도 ‘정정한 현역’으로 빌 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는 ‘노익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다. 그의 가사에는 문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저항의 기운이 넘실댄다.


그는 헤인즈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하면서 천재성이나 시대적 양심 운운하는 말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그에게 덧씌워진 그런 이미지들로 고통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왜 요새는 저항의 노래를 안 만드냐”는 질문에 케이트 블란쳇이 맡은 밥 딜런은 이렇게 외친다. “나의 모든 것이 저항이다” 이 정도의 자신감이  받쳐주어야 한 예술가의 생존은 존엄하게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노래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른 분야에서도 ‘경지’에 도달한 예술인들의 작품은 쉬워 보이는 경향이 있듯이 그의 노래도 쉬우면서도 의미 깊게 다가온다. 지금까지 50년 이상 현역으로 전 세계 대중 뮤지션들의 정신적 지주로, 세월을 뛰어넘는 싱어 송 라이터로 그의 존재감은 뚜렷하다.


이런 ‘대가’를 토드 헤인즈 감독은 관객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화려하면서도 특이한 방식으로 재 포장해냈고, 그가 차려 놓은 무대 위에서 종횡무진 누빈 6명의 ‘밥 딜런’ 중 케이트 블란쳇과 리처드 기어가 해낸 밥 딜런의 이미지는 영화보기의 행복감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올해 60세인 리처드 기어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깊은 교류를 해온 덕인지 그의 얼굴에는 동양적인 유유자적이 묻어있어서 보기 좋았다.

그가 출연해온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리처드 기어는 인생에 달관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여배우는 지난 해 본 ‘골든 에이지’에서 영국여왕 엘리자베스1세로서의 품위를 탁월하게 재현해낸 원체 연기력 있는 배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영화에선 최고로 물오른 연기를 보여준 것 같다.


실제의 밥 딜런과 거의 똑 같을 정도로 신기하게도 닮아 보이는 외모적 변장술도 뛰어났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와 아우라는 대단했다.

39세의 여배우로선 드물게 그녀는 ‘화려한 변신의 연기’폭을 꾸준히 넓혀 나가고 있다. 호주의 국립 드라마예술대학을 졸업한 뒤, 줄곧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익혀온 정통파 연기인답게 그녀의 연기는 안정감을 주고 있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 밥 딜런을 탁월하게 해냄으로써 영국의 헬렌 미렌이나 미국의 메릴 스트립처럼 호주가 낳은 최고의 연기파 여배우로 등극했다고 본다.


여자가 남자 같다면 자칫 우악스럽거나 거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밥 딜런의 외모가 워낙 섬세한 여성적 분위기가 있어선지 이 영화에서 그녀의 연기는 다른 어느 배우보다 밥 딜런 적(的)이었다는 칭송을 많이 받았다.

그녀는 이 영화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과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비롯, 세계 유수의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밥 딜런의 평범한 전기 영화는 아니지만 밥 딜런은 ‘아임 낫 데어’와 여주인공 케이트 블란쳇을 볼 수 있게 우리에게 영화적 근거를 마련해준 공으로 상을 받을 만하다. 그는 이미 미 주간지 타임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했고, 2004년 롤링스톤즈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에도 비틀스에 이어 2위로 선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감독 토드 헤인즈의 재능이 빛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