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콕 VS 원티드
‘입소문’은 강하다. 영화사들이 제아무리 홍보에 비용을 들여도 이 입소문을 타지 못하면 그 영화는 대박나기 어렵다는 게 영화가의 정설이다.
어제 ‘핸콕’을 본 것은 그 입소문의 힘 덕이었다.
내가 ‘핸콕’을 볼까 말까를 묻자 평소 영화 잘 보러 다니는 젊고 사랑스런 20대 아가씨가 내게 “보세요”라고 짤막하게 권유했다. 그녀는 “영화 중간에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어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개나리 새순같이 사근사근한 그 처녀의 “보세요” 한 마디에 내 발걸음은 무슨 자석에라도 이끌린 듯 명동 롯데 시네마로 향했다.
내가 볼까 말까를 물어봤던 것은 며칠 전 ‘원티드’를 봤기에 비슷한 류의 영화라면 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액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런 류의 영화는 잘 보지 않지만 아주 가끔 시들해진 삶에 긴장의 기운을 선사하고 싶을 때면 액션 영화를 보곤 한다.
그래서 톰 크루즈나 맷 데이먼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미션 임파서블’이나 ‘본 얼티메이텀’ 같은 영화는 챙겨 보는 편이다. 그런 액션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정신이 번쩍 들고 마치 매운 비빔냉면을 먹고 난 뒤처럼 삶의 원기를 얻곤 한다.
며칠 전 봤던 ‘원티드’는 감상문을 별로 쓰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영화를 보고나서 도대체 어떤 감독인가하고 검색창에 ‘티무르 베크맘베토브’라는 이름외기도 어려운 이 생소한 감독의 이름을 친 순간 화면에 나타난 그의 사진을 딱 보고 ‘아! 이 얼굴이라면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다’ 라고 혼자 중얼거렸었다.
그렇다고 그가 못 생겼다든지 잘 생겼다든지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원티드’ 속 그 비밀 킬러조직의 한 멤버 같다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원티드 보신 분 중에 이 감독 얼굴을 보신 분이라면 어느 정도 동의하실 것 같다.^^
아무튼 ‘원티드’를 젊은 관객들과 함께 보고나서 요즘 젊은이들이 원하는 영화가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나자 옆 좌석에 앉았던 젊은 친구들이 괜찮지 라고 소근 거리는 소릴 들으면서 소위 ‘세대차’라는 걸 느끼긴 했지만 그들이 좋다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원티드’가 못 만든 영화다 잘 만든 영화다라는 단순 비평을 떠나서 그 영화에 나오는 기상천외한 스토리 전개나 상상 초월의 액션 장면들을 보면서 ‘괜찮다’거나 ‘감독의 재능에 경배를 바친다’고 말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정서적 분위기가 대강 어떠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뭐랄까, 만화원작에 충실하려는 감독의 의도가 잘 표현된 ‘스크린으로 보는 만화’같다고나 할까. ‘원티드’의 홍보 팸플릿에 적힌 ‘액션의 상식과 경계가 무너진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과연 ‘살아있는 배우가 등장하는 총천연색 만화 영화’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만화 혹은 게임기와 더불어 성장한 요즘 세대들에겐 그런 영상이 아주 멋지고 호쾌하게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해심이 들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기상천외한 액션’장면에 선뜻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원티드’에 나오는 어눌하고 숫기 없어 보이는 영국 남자배우 제임스 맥어보이나 옛날 브리짓 바르도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관능파 여배우 안젤리나 졸 리의 ‘말도 안 되는 액션’장면에선 정서적 공감대를 느끼기 어려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단지 영화 후반부에 죽은 줄 알았던 친부와 결투를 벌이는 아들(제임스 맥어보이)이 탄 추락하는 열차 장면에서 아무리 킬러지만 그래도 ‘아버지’여서 자기를 죽이려는 아들의 손을 끝내 놓지 않는 장면은 그나마 공감이 갔다. 그 손만 놓으면 아들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세상 어느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겠는가.
‘원티드’에는 끔찍한 장면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부닥칠 수 있는 ‘직장상사’와의 갈등들이 ‘현실’을 반영해주긴 했지만 영화는 시종 ‘신나는 상상 속 액션’으로 젊은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 같았다. 물론 영화니까 그냥 보여지는대로 즐기는 것도 괜찮긴 하겠지만, 그래도 감독이나 배우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여유로운 멋이 있는 게 좋을 텐데...
이렇게 ‘원티드’에 별 ‘재미’를 보지 못했기에 나는 ‘아가씨 평론가’에게 ‘핸콕’을 볼까 말까를 물었던 것이다.
‘핸콕’의 줄거리도 전혀 몰랐고, 영화평들도 전혀 보지 않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무지한 관객’의 한 명으로서 단지 ‘입소문’ 하나에 의지해 봤지만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이래서 입소문이 무서운 것이다.
물론 ‘핸콕’도 ‘원티드’ 뺨치는 ‘말도 안 되는 액션’장면의 연속이었지만 ‘스토리’가 한국인인 내 정서에는 비교적 와 닿았다.
게다가 매력적인 흑인배우 윌 스미스의 연기가 볼만했다. 호감도 높은 얼굴의 스미스를 주연배우로 내세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핸콕이라는 이름의 초인간의 종횡무진 활약상을 그린 ‘핸콕’은 영웅이나 초인을 목말라하는 현대인들의 갈증을 채워주려는 쪽으로 컨셉을 잡은 것 같았다. ‘힘’이 넘치고 ‘말 보다 주먹이 앞서지만’ 못된 인간들을 한 방에 날려 보내는 핸콕의 기상천외한 행동들에 일반인들은 시원해 하면서도 꺼려하는 이중성을 보여준다. ‘좋은 일하고도 욕먹는 놈’ 핸콕은 그래서 외롭다.
‘사는 게 힘들다.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라는 핸콕의 말은 어쩌면 모든 현대인에게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핸콕처럼 초능력자들은 아니지만 현대인들은 누구나 사는 게 힘들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에...
그래서 모두들 살아가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위로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화 중반부에 반전’이 있다는 ‘아가씨 평론가’의 귀띔대로 과연 영화 중반부에 들면서 영화는 뜻밖의 에피소드를 끼워 넣었다. 나중에 ‘리뷰’에 보니까 이 부분에 대해 ‘강호제현’의 적잖은 평론가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
각자는 각자의 생각이 있는 법이니까 여기서 누가 옳고 그른지의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개인적으론 그 ‘초인들의 러브 스토리 ’설정이 꽤 재미있게 느껴졌다. 약간 신파적인 기운이 감돌긴 했지만 원래 '영화적 재미'란 그런 데서 느껴지는 게 더 호소력이 있다고 본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3천년을 살아온 ‘초인’들. 그들에게 평범한 인간들의 희노애락, 생노병사 그리고 사랑이 얽혀진 아기자기한 일상생활은 부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초인’의 입장에서 본 인간의 평범한 삶이야말로 ‘초인적’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초인들 VS 범인(凡人)들의 대척점에 사랑이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같다.
‘초인’들에게도 ‘사랑’은 아픈 것인가 보다. 사랑이 뭐길래!
그러나 지구를 지켜야 하는 막중한 사명감을 가진 초인들에겐 ‘사랑’따위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사랑이란 지구와도 맞바꿀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위험한 것’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을 밑바탕으로 전개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짧은 한 평생은 초인들의 3천년의 삶과도 버금가는 소중한 존재감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천 년을 걸쳐 내려오면서 ‘사랑의 굴레’속에 서로 아파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슬쩍 보여준 ‘핸콕’의 감독 피터 버그는 조금은 동양적 윤회사상에 경도된 듯해 보였다.
아직 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 ‘원티드’와 ‘핸콕’에 대한 주마간산 식 영화이야기는 이 정도로만 소개하겠다.
끝으로 두 편 중 한 편만 보려는데 어떤 걸 볼까 망설이시는 분들에겐 ‘핸콕’을 권하고 싶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 취향과 주관적 판단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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