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멘젤 감독.
‘나는 영국 왕을 섬겼다. (I served the king of England)’
‘나는 영국 왕을 섬겼다’- 아주 독특한 제목의 이 체코영화는 오랜만에
영화 보는 즐거움을 선사해주었습니다.
다른 영화를 보러갔다가 우연히 이 영화의 예고편을 보고는 꼭 봐야할 영화리스트에 올렸고, 개봉 첫날 보러갔습니다. 의외로 관객들이 많았습니다.
알고 보니 이 영화를 만든 이리 멘젤이라는 감독은 작년에 전주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한국을 다녀갔었다는군요.
저야 ‘독학’으로 뒤늦게 이 감독과 그의 영화를 알게 되었지만 이미 그의 고정 팬들이 꽤 많은 것 같았습니다.
이 영화, 제목부터가 왠지 범상치 않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천재 영화감독’이라는 이리 멘젤이 69세 때인 2006년에 만든 이 영화는 ‘영화란 이런 것이다’라고 화면으로, 짤막한 대사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노인 위로용 멘트인줄 알았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감성(感性)은 늙지 않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풍부한 연륜의 샘에서 길어 올린 진정성 어린 화면 하나하나는 영화학도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2007년 베를린 영화제 국제평론가상 수상작다운 품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얼굴 가득 세월의 훈장을 달고 있는 이 노감독은 “웃음이 지식보다 중요하다”는 대가다운 언사로 우리에게 무언가 인생에 대한 메시지를 쿨 하면서도 페이소스 넘치게 보여주는 천부적 재능이 있어 보였습니다.
화려하면서도 낯설지 않은 영상미를 아주 자연스럽게 관객에게 보여주는 감독의 솜씨는 그야말로 숙수(熟手)의 경지에 도달한 듯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쉽게 만든 것 같은 영상 하나하나에서 감독의 ‘천의무봉’한 감각을 이심전심으로 느낄 수 있어서 오랜만에 후련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뭐랄까요, 품격 있는 유머와 예리한 풍자정신, 권력과 시대의 흐름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보여주며 ‘그런 게 인생이야’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한탄하거나 우울해지지 않고 오히려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를 영화는 시종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인생을 거의 다 살아낸 이 노감독은 우리에게 “너무 심각해 하지 마!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거야” 라는 인생의 ‘쉬운 본질’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 살아가는 일은 좀 어처구니없는 대목이 끼어들 때가 많다는 얘기도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영화 속 주인공의 나레이션을 통해 “인간은 의도하지 않을 때 더 인간다워진다”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첫 화면에 “나의 행운은 언제나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문장을 띄우며 시작합니다. 어쩐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너무 행복하다 싶은 순간엔 슬그머니 불안해지는 경험을 여러분들도 가끔 느끼셨을 겁니다. 그래서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도 나왔겠지요.
영화의 오프닝 멘트로 사용된 이 문장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네 쉽지 않은 삶을 암시해주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아무 가진 것 없고, 키도 작고, 얼굴도 볼 품 없는 가난한 청년 디떼의 젊은 시절과 노년기를 번갈아 비쳐줍니다. 디떼는 체코 말로 꼬마를 뜻합니다.
역전에서 막 떠나려하는 기차에 타고 있는 손님들을 상대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소시지 장사를 하는 디떼는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거스름돈을 느릿느릿 건네주는 수법으로 푼돈을 한 푼 두 푼 모아갑니다.
이런 디떼를 눈여겨본 거부의 눈에 들어 그는 차츰차츰 ‘좋은 직장’으로 옮겨갑니다. 좋은 직장이라 봤자 선술집에서 그 보다 한 등급 위 레스토랑, 그 보다 좀 큰 모텔... 이런 순서로 착실하게 한걸음 한 걸음 올라갑니다.
디떼의 꿈은 오로지 한 가지. 백만장자가 되어 큰 호텔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영화는 이런 디떼의 인생여정을 차분히 따라갑니다. 마침내 체코의 최상류층호텔의 지배인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매번 고비고비마다 디떼는 은인을 만나거나 혹은 타인의 발목을 잡고 대신 올라가는 운이 따라주는 처세술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디떼의 꾀 많은 처세법과 그에게 따라주는 운이라는 것을 통해 노감독은 ‘인생의 큰 그림’은 어떤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Boys be ambitious!’라는 고전적인 격언을 가슴에 품은 듯한 디떼는 ‘떠날 때를 잘 알고 떠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국 자신이 소원하던 큰 호텔의 주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행운의 순간은 ‘나의 행운은 언제나 불행으로 이어졌다’는 걸 입증하려는 듯 몰아닥친 시대의 광풍 앞에서 어이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디떼는 모든 걸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재판도 없이 즉석에서 15년형을 받고 ‘국가의 은혜’로 14년 9개월 만에 특사로 풀려납니다.
영화는 그가 감옥 문을 막 나와서 세상에 발가벗겨 던져진 아이처럼 두려운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노년에 들어선 디떼가 산골짜기에 있는 폐가에 도착해 맨손으로 새로운 삶을 일궈내면서 이웃집 바람둥이 아가씨에게 자신의 화려했던 ‘왕년의 나날’을 회상하는 장면을 교대로 보여주면서 감독의 솜씨는 빛을 발합니다.
'영국왕을 섬겼던' 프라하 최고의 호텔 고수(高手)지배인이 동양인 젊은 남녀에게 서빙하기 위해 말하는 걸 듣고 디떼는 ‘중국어’냐고 묻습니다. 늙은 지배인은 슬며시 웃으면서 ‘한국어’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노감독의 ‘코리아 프렌들리’한 심정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왜냐면 시대적 배경상(1940년대) 프라하의 그런 최고 호텔의 식당에 한국인 청춘남녀가 식사하기 위해 앉아있는 건 아주아주 희귀한 일이거든요.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노감독은 ‘머나먼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제 오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요 몇 년 새 프라하에 한국관광객 엄청나게 몰려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않아도 눈부시게 발전해온 동양의 조그만 나라에 대해 노감독은 익히 들었을 겁니다.
감독은 서울에 왔을 때 가진 인터뷰에서 “성적 욕망은 그 자체로 즐거운 행위이자, 삶의 한 부분이다. 가장 자유로운 모습이기도 하고 그걸 영화 속에서 표현하려고 해 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감독의 그런 ‘성적 욕망’이 환상적 화면으로 선보입니다.
얼마 전 우리 블로그에도 소개했던 ‘네이키드 스시’장면이 이 영화에서도 몇 차례 나옵니다. 나신(裸身)의 여체 위에 꽃을 혹은 과일과 돈을 장식해 나가는 장면에서 감독은 ‘자유로운 모습’을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 같았습니다.
아주 에로틱한 느낌을 주는 장면들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국 배우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리 멘젤 감독을 존경해 그의 영화에 자청해서 출연한 적도 있다는군요.
그만큼 이리 멘젤 감독은 유럽권에서 그 명성이 높은 감독이라고 합니다.
체코 국립영화학교 출신인 그는 이미 26세의 어린 나이에 데뷔작 ‘가까이서 본 기차’로 전 세계에 이름을 날렸습니다. 그 이후 연극과 영화에서 연출, 각본, 배우 등 ‘전방위 예술가’로서 45년간 종횡무진 활동해온 체코 영화계의 대부(代父)적인 존재입니다.
이번 영화는 10년 전 세상을 뜬, 그의 오랜 친구인 체코의 최고 소설가 보흐밀 흐라발의 원작소설을 화면에 옮긴 최신작이라는 군요.
그래선지 배우들의 대사에서 상당히 문학적 향취가 느껴집니다.
감독 자신도 체호프 모파상 마크 트웨인 등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원작자와 감독의 그런 문학적 취향이 스크린에 어떻게 묘사되는지 궁금하시지 않으세요? 러닝타임 120분이 짧게 느껴집니다.
놓치지 마시고 꼭 보시길 강추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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