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밴드 비지트-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을 보고

스카이뷰2 2008. 4. 6. 12:17

 

 

   ‘밴드 비지트-어느 악단의 조용한 방문’을 보고


오랜만에 취향에 맞는 영화 한편을 봤습니다. 이스라엘 신예감독 에란 콜리린의 데뷔작 ‘밴드 비지트’입니다. 35세 감독의 첫 작품답게 신선하면서도 세심한 연출력이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이스라엘 영화는 처음이지만 ‘사람 사는 데는 어디나 마찬가지’라는 격언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이 보더라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보편적 정서’나 인생의 본질 적인 것에 호소하는 감독의 ‘정석’에 충실한 연출 작법에서 감독의 재능이 느껴지는 영화였습니다. 어느 분야든 ‘기본’과 ‘정석’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쉬운 게 어려운 거니까요.


조직의 존폐위기를 겪고 있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경찰 관현악단 8명이 겪은 ‘낯선 곳에서의 어떤 하루’가 영화의 큰 줄거리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악단이 이스라엘 어느 지방 도시의 초청을 받고 공항에 도착하면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1970년대 후반의 일로 사소한 일이어서 기억하는 이가 별로 많지 않다는 자막이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적대국가로 요새도 양국에선 상대방 국가의 영화상영이 허락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악단이 해체위기를 겪고 있는 것에 초조감을 느끼고 있는 악단장 투픽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위기의식 탓인지 늘 굳은 표정이지만 악단의 신세대 막내는 상관의 그런 심기는 아랑곳 않은 채 ‘작업의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철부지입니다.


악단이 공항에 도착했지만 마중 나온 사람조차 하나 없이 썰렁합니다. 악단장은 직접 목적지를 찾아가기로 하고 막내 할레드에게 행선지로 가는 길을 물어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껄렁껄렁한 할레드는 안내데스크에 앉아 있는 아가씨에게 다가가서도 그저 ‘작업’ 걸 요량으로 껄렁대다가 지명을 잘못 말하는 바람에 악단 일행은 결국에는 엉뚱한 마을에 도착하고 맙니다.


페타 티크바로 가야할 악단이 막내의 실수로 벳트 하티크바로 간다는 설정에서 어쩌면 웬만한 인생들 역시 이렇게 ‘우연한 실수’탓에 ‘인생’이 달라져버리는 사건을 겪을 수도 있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비약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걸 종종 듣곤 합니다. 그때 그랬을 것을...하는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감독은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 동안 일어나는 이런저런 살아간다는 것의 페이소스를 별 장식 없이 다소곳하게 펼쳐 보입니다. ‘이것이 인생이다’를 평범한 화법으로 연출해낸 젊은 감독은 그러나 ‘따스한 휴머니즘’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다 할 사건 하나 없지만 근엄한 악단장이나 집시 풍의 카페 마담의 ‘자기 고백’에서 상처 없는 영혼은 없다는 평범한 인생의 진실이 페이소스로 다가옵니다. 권위적인 인상의 악단장은 자신의 실수로 어린 아들이 세상을 버렸고 아내 역시 그 뒤를 따라야만 했던 아픈 경험을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회한 어린 그의 고백에서 인생에 대한 겸허함이 느껴집니다.

인생을 다 산 것 같이 초연해 보이는 마담도 지나간 날들을 아쉬워합니다.

어쩌면 그들의 그런 모습이야말로 우리네 모두의 자화상이기도 하겠지요.


이집트 사람을 별로 본 적은 없지만 한 눈에도 꼭 이집트사람으로 보이는 악단장 투픽(새슨 가바이)는 이집트 태생의 이스라엘 최고 국민배우라고 합니다. 역시 태생은 못 속이나 봅니다.


조금은 퇴폐적인 분위기의 카페 마담 디나(로니트 엘카베츠)도 이스라엘 최고 여배우라는군요. 그녀도 척 봤을 때 범상치 않은 ‘일류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매력 있는 배우였습니다. 


항상 악단장의 분위기를 맞춰주려고 슬슬 기는 슬픈 2인자 시몬(칼리 파나투르)의 연기도 돋보였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작곡중인 교향악의 완성을 위해 자나깨나 노력하는 그의 진지함에서는 ‘자기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느껴지더군요.


러닝타임 85분밖에 안 되는 짤막한 영화였지만 ‘인생의 진수’를 담아내려는 젊은 감독의 진지한 자세가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와 비슷하다고 합니다만 개인적으론 ‘지중해’나 ‘문 스트럭’ ‘일포스티노’ ‘3번가의 석양’같이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면서 뭉클한 감동을 주었던 ‘옛날 영화’들의 이미지들이 떠올랐습니다.


흔치 않은 아랍풍의 슬픈 노래들을 처음 들으면서 정서적 공감을 느낀 것도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인 것 같습니다.

소소한 일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신예 감독의 이 영화는 ‘상복’도 터져 ‘제60회 칸 국제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상’ ‘2007 전미비평가협회 외국어 영화상’ ‘제20회 유럽영화제 신인감독상, 남우주연상’ ‘제20회 도쿄국제영화제 그랑프리수상’등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집트에선 ‘상영금지’영화라고 합니다. 사랑과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데... 이집트에선 볼 수 없는 이집트 소재 영화를 서울 명동에서 볼 수 있다는 건 쏠쏠한 재미가 있습니다.    

모처럼 훈훈한 마음을 선사해준 영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