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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스카이뷰2 2008. 3. 13. 13:51
 

 

  왕가위 감독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왕가위 감독이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로 보러갔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뭐든 때가 있다는 옛말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영원한 청춘’혹은 ‘맨발의 청춘’같은 이미지의 왕가위 감독도 이제 쉰 고개를 넘어선 나이 탓인지 예전 그의 문제적 수작으로 꼽혔던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에서의 감동을 선사해주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 앞에 장사 없다고나 할까요. 감수성이 한창 물오른 30대 때 찍었던 그의 영화에서 느껴지던 ‘방황하는 청춘들’의 아린 모습들이 ‘똑같은 메뉴’인데도 이제는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여겨지는 그런 ‘퇴행적인 감상’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늘 머무는 청춘’은 없다는 것인가 봅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색채의 현란함’은 이 영화에서도 화려하게 등장합니다. 블루· 퍼플· 핑크가 어우러진 화려한 색채감과 몽롱한 영상미는 역시 ‘왕가위표 영화’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보여줍니다.


번개처럼 사라져가는 전철과 초고층 빌딩에 물드는 석양의 이미지로  거대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고독감을 표현하려는 감독의 의지가 아스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는 왕가위의 할리우드 첫 입성작품에, 작년 칸 영화제 공식개막작이라는 프리미엄, 매력적인 가수 노라 존스의 영화데뷔작, 가장 영국적인 미남배우 주드 로, 할리우드의 마스코트에서 재색을 겸비한 여배우로 성장한 나탈리 포트만 등 화려한 배우들이 출연한 ‘화려한 명성’에 비해선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습니다.


왕가위감독이 할리우드에 건너가 처음으로 만든 ‘영어로 된 영화’여선지 동양적 분위기의 대사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의 소재는 왕가위답게 ‘청춘 남녀’들의 사랑과 이별입니다. 여기에 조금 다른 종류의 사랑들이 가미됩니다. 부부와 가족 간의 사랑이 어떻게 금이 가고 어떻게 회복되어가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반듯한 미남 제레미 (주드 로)에게 자신의 실연을 하소연하는 엘리자베스(노라 존스)의 고백. 블루베리 파이가 잘 팔리지 않는다는 소리에 이유가 뭐냐고 물으며 여주인공은 블루베리 파이를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블루베리 파이를 먹으면서 이 두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랑이 싹트는 전주곡이겠지요.


매일 카페로 출근하다시피하면서 자신의 사연을 말하던 여주인공은 어느 날 훌쩍 뉴욕을 떠나 정처 없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여행도중 만난 사람들 역시 한결같이 각종 ‘사랑’ 탓에 상처받고 가슴아파합니다.

갑자기 ‘단골손님’이 떠나버리고 나자 제레미는 그제서야 자신이 엘리자베스를 사랑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드넓은 미국 땅을 주유하면서 엘리자베스는 뉴욕의 제레미에게 간간히 자신의 여정을 엽서로 보내오는 장면도 감독의 ‘소년적인 취향’을 느끼게 해줍니다.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감성적 취향은 여전한 듯 합니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에서 저의 주목을 끈 여배우는 주인공보다 오히려 잠시 나오는 나탈리 포트만이었습니다.

1993년 13세 때 영화 ‘레옹’에서 어린 여주인공으로 깜짝 데뷔를 했던 나탈리 포트만은 청초했던 미소녀에서 어느새 ‘성숙한 여인’으로 변신했더군요. 외모에선 노라 존스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할리우드에서 15년 넘게 ‘배우’로 살아오면서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 공부도 하고 연기도 병행해온 ‘재색겸비’한 연기파 배우답게 아주 총명하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당분간 할리우드에서는 그녀의 종횡무진한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에선 부친에게서 어린 시절부터 도박을 배워 카지노를 휘어잡는 도박사로 등장합니다. 어떤 사연인지 아버지와는 의절한 뒤, 가족 간의 사랑조차 믿지 못하는 그녀가 안쓰럽게 보입니다.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은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왕 감독은 영화 곳곳에서 ‘안타까운 사랑의 사연들’을 배치하면서 무언가 ‘교훈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애쓰는 모습이었습니다.

뭐랄까요... 아무래도 왕가위도 이제는 인생의 모범답안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는 ‘기성세대’에 편입했다고나 할까요.


그냥 무작정의 방황이 청춘들에겐 멋있게 보여질 지도 모르지만 기성세대들에겐 그저 안타깝게 보인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의 ‘만시지탄’이지 그게 청춘들에게 먹혀들  메시지는 아닐 겁니다. 그러기에 이 영화가 좀 답답하게 여겨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뉴욕판 중경삼림’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게다가 ‘델마와 루이스’의 이미지도 겹쳐졌습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분위기’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익숙한 화면이 관객들에게 지루함을 느끼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순하고 평온한 ‘사랑이야기’를 원하는 청춘 커플들은 함께 보시면 그런대로 괜찮을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싶은 젊은 연인들이 보신다면 ‘그대들의 사랑’은 더 견고해질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