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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 포에버'로 부활한 마리아 칼라스

스카이뷰2 2008. 1. 14. 09:38
 

 

   ‘칼라스 포에버’로 부활한 마리아 칼라스


‘비운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는 지금 신세대들에겐 생소한 이름이겠지만 클래식을 좋아하는 40대 이상의 세대들에겐 추억의 고유명사입니다.

칼라스는 멜로드라마의 여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갔습니다. “마리아 칼라스는 멜로 드라마 그 자체였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그녀의 삶은 드라마틱했습니다.


1923년에 태어나 1977년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쓸쓸히 죽어가기까지 그녀의 인생은 드라마의 온갖 요소를 다 갖춘 ‘빛나는 작품’이었습니다.

못생긴 미운 오리가 백조로 변신했던 것처럼 칼라스도 소녀시대에는 부모의 이혼으로 외롭게 컸으며, 사춘기 지나면서 발견된 성악재능으로 간신히 모친의 관심아래 음악지도를 받았지만 고도 비만으로 번번이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찬밥신세였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를 알아본 ‘귀인’ 지휘자의 도움으로 서서히 무대를 장악해 나갔으며 마침내는 메트로폴리탄 무대에서 그녀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면 흥행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명성을 굳혀나갔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녀는 그야말로 노래와 다이어트에 올인 했습니다. 체중을 37kg나 감량해 주위사람도 몰라볼 정도였다는군요.


그녀가 그렇게 까지 다이어트에 매달린 것은 물론 오페라 무대에서 주요배역을 따내고자하는 음악적 목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가 흠모한 유명감독 루치노 비스콘티가 “살만 빼면 오드리 헵번이 맡은 역도 소화할 텐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살을 뺐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이렇듯 강합니다. 하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비스콘티 감독은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게이였다는군요. 그때 칼라스는 사랑의 상처를 깊이 받았다고 합니다.  


유년시절 부친의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탓에 그녀는 늘 사랑에 목말라 했고, 결국 아버지뻘의 남자와의 결혼이라는 ‘전형적인 코스’를 밟아갑니다. 부친의 존재를 몰랐던 마릴린 먼로도 이 비슷한 행로를 거쳤지요. 아무래도 유년기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한 여성예술가들은 대체로 그 보상심리로 ‘일탈적인 사랑’에 매달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칼라스가 후견인 겸 남편으로 삼은 사람은 대부호로 그녀에게 헌신을 다했지만 뒤늦게 ‘눈먼 사랑’에 눈뜬 그녀는 늙은 남편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세계의 최고 대부호라는 한 고향 사람 오나시스의 품에 안기고 맙니다. 오나시스 역시 그녀보다는 17세 연상입니다.


그것도 ‘김중배의 다이아반지’에 눈먼 심순애처럼 오나시스의 초호화 요트에 남편과 함께 초대받아 며칠 동안 항해를 하는 동안 그만 오나시스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겁니다. 그녀를 지극정성 보살폈던 남편으로선 참 황당한 일이겠지만 ‘사랑’에 목맨 칼라스는 자신의 운명을 걸고 오나시스에게 올인한 거죠. 그 사랑으로 그녀는 결국  죽게 되지만 당시엔 눈에 콩깍지가 씌웠으니 도리가 없었겠지요. 목숨 건 사랑의 허망함이라니...


하지만 배신으로 쟁취한 사랑에 대한 하늘의 벌인지 그녀는 오나시스에게 결국 배신당하고 맙니다. 그 유명한 케네디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이 ‘케네디에서 오나시스로 성을 갈게 되는 세기의 결혼’을 감행했고 그 피해자가 바로 마리아 칼라스가 된 겁니다.


사랑을 빼앗기자 인생을 포기해버리고 마는 극단적 삶의 방식으로 자신을 망쳐버린 세기의 디바 마리아 칼라스! 요샌 이런 순정파 여성은 찾아보기 어렵겠죠?  우리나라에서도 재벌과 결혼했다 버림받는 여성연예인들을 심심찮게 봐왔지만 그렇다고 그녀들이 인생을 포기했다는 소린 아직 들어보진 못했습니다. ‘치명적 사랑’의 독을 이겨내지 못한 마리아 칼라스는 어쩌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지도 모르겠군요.


영화 ‘칼라스 포에버’는 그렇게 사랑에 버림받고 폐인이 되고만 그녀가 죽기 1년 전 ‘이런 삶’을 살다갔으면 어땠을까하는 픽션을 영화로 만든 겁니다. 그 픽션은 칼라스의 오랜 친구였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썼습니다.

사실 마리아 칼라스 일생 그 자체만큼 좋은 ‘영화 거리’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녀의 사후 오랫동안 그녀와 친했던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에겐 ‘칼라스 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상품’으로만 보려는 영화제작자들의 의도를 칼라스의 친구인 프랑코 감독은 번번이 사절했다는군요. 세상을 뜬 친구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 ‘칼라스 포에버’는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이 팔순이 넘은 나이에 성성한 흰머리 휘날리며 절친했던 동갑내기 여자 친구 칼라스를 그리워하며 만든 ‘친구에게 바치는 우정어린 헌사’같은 순수한 영혼의 작품입니다.


감독은 칼라스 생전에 그녀가 출연한 노르마· 라트라비아타· 토스카를 오페라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런 연유에선지 그는 칼라스 생전을 잘 아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영화제작에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영화는 완벽에 가까운 ‘마리아 칼라스의 재현’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영화 자체는 그렇게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디바’를 화면에 옮겼고, 전성기 시절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는 건 행복한 문화적 체험이었습니다.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 작품 중 우리에겐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익숙한 영화일 겁니다. 감독의 나이 현재 86세! 대단한 노익장이죠. 영화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재능과 두각을 나타내온 이 노익장은 재작년엔 이탈리아인으론 최초로 영국 엘리자베스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의 작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칼라스 포에버’에서 제일 눈길을 끈 사람은 말총머리 스타일로 칼라스의 친구이자 공연기획자로 나온 랠리 역의 제레미 아이언스!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언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무조건 좋다고 생각하는 광팬의 입장에서 볼 때는 ‘칼라스 포에버’는 칼라스로 나오는 프랑스 국민여배우 파니 아르당 보다는 오히려 영국 미남자 제레미 아이언스의 연기에 더 눈길이 갈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절제하면서도 품격있는 스타일로 다가오는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번 영화에서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품위 있는 분위기를 한껏 뿜어냅니다. 

공항에서 처음 만난 청년화가와 연인 사이가 되는 게이로 나오지만 전혀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노련한 연기력은 그의 경륜을 돋보이게 합니다.


절친한 친구이나 ‘초(超) 예민 디바’ 칼라스의 까다롭기 짝이 없는 변덕을 일일이 맞춰주며 ‘작품’을 만들어 내놓으려는 그의 헌신적 노력은 한 인간의 일에 대한 열정과 고결함을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물론 이 공연기획자는 가공의 인물이긴 하나 칼라스를 보살펴주었던 남자들의 이미지를 모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칼라스 포에버’는 대한민국 ‘사오정 세대’에게 크게 어필했던 안성기 박중훈의 ‘라디오 스타’나 비운의 할리우드 퇴물여배우와 그녀를 죽도록 섬기는 매니저가 등장하는 ‘선셋 대로’,  헌신하는 매니저와 한물 간 톱 가수를 세심하게 그린  영국 영화 ‘러브 액추얼리’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인간적 페이소스를 선사합니다.

하지만 실존했던 ‘비운의 디바’를 다뤘다는 점에서는 아무래도 ‘칼라스 포에버’가 단연 돋보이는 비장미를 갖춘 것 같습니다. 같은 픽션이라도 급(級)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헤밍웨이는 생전에 마리아 칼라스를 흠모하면서 그녀를 ‘황금빛 목소리를 가진 태풍’으로 묘사했습니다. 명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 “칼라스는 한 마디로 영광 그 자체였다. 자신이 오케스트라의 첫 번째 악기인 것처럼 노래했다. 칼라스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칼라스는 없다. 오페라에서 BC란 Before Callas 를 의미한다.” 

BC라면 통상 Before Christ를 의미하는데 역시 대단한 칼라스입니다!


그동안 칼라스에게 바쳐진 수많은 찬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이번 영화도 그런 의미에서 칼라스에 바쳐진 헌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찌 보면 산자와 죽은 자가 스크린을 통해 교감을 나눈다는 점에선 씻김굿과 비슷한 이미지를 선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떠난 자를 그리워하며 그의 전성기 시절 목소리를 불러낸다는 것은 망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제례라고 할 수있겠지요. 


생전에 날선 자존심을 감추지 못해 늘 세상과 불화했던 비운의 디바는 인생행로에서 결국 해피 엔드를 맞진 못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칼라스가 인생에게 패하지만은 않은 것이라고 감독은 항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은폐된 삶을 살고 있는 그녀가 어둑신한 아파트 거실에서 자신이 불렀던 나비부인중 ‘어떤 개인 날’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면서 절규하는 장면에선 문득 도쿄에서 활동 중인 우리 여가수 계은숙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지난해 11월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 거실에서 칼라스처럼 자신의 히트곡을 듣고 있다가 새벽에 들이닥친 경찰에 각성제 복용 혐의로 체포되었지요.

어쩌면 이 두 여가수가 그리도 똑 같은 비극적 시추에이션을 보여주는지....

결국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의 삶이란 거기서 거기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 계은숙도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일본 가요계의 톱클래스에까지 올랐던 '신화적 스토리'가 있는 여가수인 만큼 자신의 쇠락을 참을 수 없었겠지요. 

그녀들은 전성기 시절 자기 노래를 들으면서 어떤 회한에 젖어들었을까요?

 


영화에서 칼라스가 독백처럼 말하는 대사가 가슴을 떠나질 않습니다. “결국 일 밖에 남지 않아”. 사랑도 떠나고 모두가 떠나지만 자기를 지켜주는 건 자기의 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녀는 뒤늦게나마 소스라치며 깨닫는 거죠.


절친한 친구로 미운 정 고운 정의 세월을 함께 견뎌온 제레미 아이언스에게 칼라스는 속삭입니다. “현실을 직시해야해.... 우린 늙었어.” 이보다 더 비수 같은 깨달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자신이 늙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하는 그 고통스러움...

따스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끝내 지키지 못한 톱 가수와 톱클래스의 공연기획자.

칼라스는 혼잣말처럼 뇌까립니다. “우리가 평범한 여자, 남자였다면....”


자신에게 인생의 최고 절정기를 누리게 했으나 이젠  사그라드는 목소리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것이 곧 자신의 운명임을 받아들여야하는 디바의 쓸쓸한 뒷모습!

이것이 바로 인생인 게지요.

이 영화, 칼라스의 매혹적인 전성기시절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