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의 엘리자베스 1세
골든 에이지(The GOLDEN AGE)
여자, 여왕, 전사...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단 한 사람! 배신과 음모의 중심에 선 여왕, 사랑을 원했던 여자, 세상을 향해 칼을 든 전사...
‘골든 에이지’는 영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치적을 이뤄 최고의 여왕으로 꼽힌다는 엘리자베스 1세의 사랑과 통치를 다룬 영국 영화입니다.
영국 영화라서 안심하고 봤습니다. 제가 우리 블로그에서 여러 번 언급했지만 영국 영화는 어떤 장르의 영화라도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 내용을 모르고 보더라도 정서적 공감대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22일)이 개봉 첫날이라는 것도 모른 채 타이밍이 맞아 보게 된 ‘골든 에이지’는 평일인데도 관객이 꽤 많았습니다. 아마 그분들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국영화니까...
그동안 소설과 영화의 매력적 소재로 굉장히 많이 소개된 ‘엘리자베스 1세’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사극이 주는 묘미를 두루 갖춘 그야말로 안전흥행이 보장되는 이야기입니다.
‘골든 에이지’ 역시 화려한 볼거리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에 웬만큼 점수를 따고 들어간 작품입니다.
여왕으로 나온 케이트 블란쳇은 ‘더 퀸’에서 엘리자베스 2세로 나왔고 텔레비전 드라마 ‘엘리자베스 1세’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던 헬렌 미렌 못지않은 카리스마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일부에선 그녀의 연기가 인형같았다는 둥 좋지 않은 평도 나왔다고 하는군요. 십인십색인 만큼 영화평도 가지 각색인가 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 유명한 영국 왕 헨리 8세와 ‘1천일의 앤’이라는 영화로국내에서도 소개된 앤 볼린의 딸로 태어나, 온갖 생명을 위협받는 역모사건에 연루되는 우여곡절과 풍파를 겪은 뒤 25세의 나이로 즉위해 45년간 영국을 통치한 여왕입니다.
엘리자베스1세가 즉위 전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조선왕조로 치자면 연산군이나 정조와 비견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모친이 부친에 의해 참수형까지 당했으니 그녀의 등극은 ‘피바람’을 낳을 수 있기에 수많은 정적들이 그녀를 거세하려고 온갖 음모를 꾸몄을 겁니다.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났으니 그녀가 얼마나 ‘독종’이라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버진 퀸’이라는 별칭이 말해주듯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그녀는 스스로 ‘영국과 결혼했다’는 말을 함으로써 ‘마이 피플(영국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남편과 아이가 없다. 하지만 나는 국민들의 어머니이다. 신은 나에게 이런 힘든 짐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셨다”
영화는 1585년, 그러니까 엘리자베스 1세가 그녀 나이 50대 초반 무렵, 체제 안정기를 구축해나가는 기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세계는 스페인이 주도권을 쥐고 흔들던 시기입니다. 그때만 해도 아직 대영국제국의 위용을 갖추지 못했고 스페인왕은 호시탐탐 영국을 휘하에 거느리려고 음모를 획책합니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앤 볼린과의 결혼을 위해 이혼을 금지하는 가톨릭을 버리고 국교를 새로 만들지요. 이렇게 해서 맺어진 여인을 결국 참수형이라는 극형으로 처단했으니...
헨리 8세는 이른바 ‘신교(21세기 한국에선 성공회로 불립니다)’를 세웠지만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싸움은 여전히 그치질 않습니다.
더구나 가톨릭 종주국을 자임하는 스페인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동생이자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메리 스튜어트를 이용해 여왕을 암살하고 영국을 차지할 계획을 세웁니다.
영리한 엘리자베스 1세는 국가 간의 동맹을 목적으로 여왕에게 청혼하러 오는 유럽 각국의 왕자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외교차원의 사교’를 즐깁니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아주 재미있게 그려집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맞선용 사진’급인 왕자들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중신애비 비슷한 외교사절들이 여왕 앞에 예를 갖추고 여왕이 점지한 왕자들은 매우 황공해 하면서 여왕과의 데이트를 즐깁니다. 여왕이 구혼하러온 외국 왕자들을 교묘하게 조종하는 수완은 역시 노련한 여왕답습니다.
이런 와중에 여왕의 사촌 여동생인 메리는 스페인과 그 추종자들에 휩싸여 자신이 ‘등극’하게 될 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사촌 여동생쯤이야 턱도 없는 소리라는 걸 왜 모르는지요.
영화에서 여왕의 영원한 충복으로 나오는 월싱엄 경이 “여왕에게 후사가 없어서 주교님들이 큰 걱정을 한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옆에서 자꾸 스트레스를 주니까 그녀가 “나는 영국과 결혼했다”라고 근엄하게 말했을 겁니다.
이렇게 카리스마 넘치는 여왕폐하도 사랑 앞에선 ‘흔들리는 여심’을 보여줍니다. 여왕은 신세계 탐험가로 나오는 매력남 라일리에게 연모의 정을 느끼고 ‘내가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것, 그리고 다시는 하지 않을 그것’인 키스까지 나누는 사이로 발전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자신의 시녀 베스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대노하면서 여왕의 품위도 잠시 잊은 듯 베스를 마구 때리고, 라일리를 감옥에 쳐 넣으라는 명을 내리는 장면에서 여왕은 어쩔 수 없이 보통 여성과 같은 질투의 감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현실에서도 여왕은 결혼은 안 했지만 몇몇 연인들과 애틋한 사랑을 나눴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내외적으로 워낙 복잡하다보니 결혼으로까지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사랑을 잃고 권세를 지켰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라고 울부짖는 여왕의 상처받은 마음이 절절히 전해집니다.
또 여왕이 자신의 어머니 앤 볼린이 참수형을 당한 사실에 대해 대성통곡하는 장면 역시 연약한 여성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왕은 언제까지 사사로운 감정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지존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잊지 않습니다.
역모와 암살위기 그리고 외침 이런 내우외환에 시달리지만 이를 모두 극복해내고 여왕은 권력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나갑니다.
실제로 영국이 대영제국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은 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뛰어난 통치력 덕분이라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압권은 여왕이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략에 스스로 은빛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진두지휘하면서 열세에 놓였던 자국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장면입니다.
어느 나라든 역시 ‘탁월한 지도자’가 있어야 나라가 살아난다는 평범한 진리가 빛을 발하는 것 같더군요.
돌려주고 싶네요.
‘골든 에이지’라는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설렘이 느껴지는 그런 좋은 시절이 대한민국에도 돌아와야 할 텐데요.... 영화 한편 보면서 갑자기 애국자가 된 기분이네요.^^
영화 ‘골든 에이지’는 노팅 힐, 러브 액츄얼리, 브리짓 존스의 일기, 빌리 엘리어트 등을 만든 영국 영화제작사 워킹 타이틀의 작품답게 그런 대로 별 무리 없이 사극 보는 재미를 선사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여왕의 화려한 복장만으로도 구경거리는 충분해 입장료 아까운 생각은 별 들지 않았습니다. 황금빛 드레스나 진한 보랏빛 드레스에서 ‘권력’의 이미지가 그대로 읽혀집니다.
실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의상에 관심이 대단해서 재위기간 동안 3천벌이 넘는 드레스를 해 입었고 드�은 ‘드레스 방’이 따로 있었다는군요.
10년 전 ‘엘리자베스 1세’라는 제목으로 케이트 블란쳇에게 타이틀 롤을 맡겼던 셰카르 카푸르 감독은 이번에도 그녀를 내세워 여왕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습니다.
자신이 흠모했던 연인과 자신이 총애했던 시녀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소중하게 안고서 축복을 내리는 여왕의 복잡 미묘한 표정에서 ‘저것이 인생이다’라는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감독이 인생을 아는 나이였겠지요. 검색창에 카푸루 감독을 쳐보니까 1945년생이었습니다.
‘골든 에이지’의 진정한 이미지는 여왕이 축복을 내리는 저 신생아에게서 시작되는 듯한 느낌! 그런대로 괜찮은 영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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