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2> 아인슈타인 이야기

스카이뷰2 2008. 9. 22. 23:03

 

 

 

그녀가 자신의 ‘첫 아기’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쏟은 건 여느 엄마와 다를 바 없었다. 아인슈타인의 엄마는 자신이 어린 시절, 풍요로운 가정환경 아래  받았던 음악교육을 아들에게 대물림하려고 애썼다. 말하자면 전인교육을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피아노 연주 솜씨가 뛰어났던 그녀는 아들에게 독선생까지 붙였다. 이제 겨우 의사표시를 할 수 있게 된 다섯 살 무렵 여자 가정교사를 들여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그 바이올린 교습은 아인슈타인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처음엔 바이올린 배우는 걸 싫어했다. 대부분의 사내아이들이 악기연주에 그다지 흥미를 갖지 못하는 것처럼 그 역시 될수록 꾀를 부려 보려했지만 스파르타식 교육법을 사용했던 극성쟁이 젊은 엄마 덕분에 14세까지 배웠다. 열세 살 무렵 모차르트 소나타를 배우면서 바이올린에 매력을 느꼈고 그 이후 바이올린은 그의 친밀한 벗으로 그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었다. 

 

유독 파란 많은 인생역정을 거쳤던 아인슈타인에게 바이올린은 ‘내면의 필수품’‘영혼의 동반자’‘영혼의 안식처’로 그가 인생살이에 고달파할 때 큰 그늘이 되어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 바이올린을 ‘My baby’ ‘리나’로 부를 정도로 바이올린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비록 독설가였지만 언제나 유머러스한  말을 잊지 않은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바이올린을 자식에 비유하면서 이런 말도 남겼다. “얘를 연주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나를 의붓 아빠로 생각할 걸요.”아인슈타인이 정서적으로 끝까지 변치 않는 애정을 쏟아 부은 대상은 어쩌면 바로 이 바이올린이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아련하지만 소중한 추억으로 남는 유년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언제나 자신이 고독하다고 믿고 있던 아인슈타인에게 말없는 버팀목 역할을 해냈다.

 

바이올린은 그가 명성을 얻은 이후엔 아인슈타인을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그에게 ‘매력 포인트’를 더해 주는 역할을 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바이올린 솜씨에 매료당했다는 말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연주솜씨가 탁월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웬만한 솜씨였다. 단지 그를 받쳐주던 그 드높은 명성과 ‘상대성이론 박사님’이 직접 모차르트 소나타를 연주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녀들에게 무조건 아인슈타인과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유인 요소였을 것이다.

 

대부분 세상의 천재는 모름지기 괴팍한 성질을 운명처럼 갖고 태어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적잖은 천재들은 그들의 까칠한 성질 탓에 세상살이에 발붙이는 걸 어려워하는 걸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종종 봐왔다.

 

‘우리의 천재’ 아인슈타인도 어린 시절부터 성마른 아이로 주위 사람들을 놀래키곤 했다.  바이올린 가정교사에게 의자를 집어던지는 바람에 젊은 여선생이 혼비백산해 뛰쳐나간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오빠의 일이라면 늘 감싸곤 하는 여동생 마야도 이런 말을 남겼다.

 

"오빠는 화가 날 때면 얼굴이 노랗게 변하고 코끝마저 새하얗게 변해버렸어요. 나에게 볼링공을 던진 적도 있었고 어린이용 곡괭이로 내 머리를 찍어 내린 적도 있죠. 천재 오빠를 둔 누이동생은 머리뼈가 튼튼해야겠죠. 천재의 여동생 노릇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았어요.” 

 

아인슈타인이 ‘지구를 흔든 물리학 천재’로 자리 잡게 되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소품이 하나 있다. 바로 나침반이다. 그가 다섯 살 때 병에 걸려 침대신세를 지고 있을 때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그에게 나침반을 선물했다.

 

꼬마 아인슈타인은 하루종일 나침반을 가지고 놀았다. 주의력 깊은 이 꼬마는 나침반의 바늘이 언제나 북쪽을 가리키고 있는 사실을 ‘혼자서’ 알아내고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을 그런 ‘진리’를 혼자 터득해낸 꼬마는 그날 이후 사물에 대해 놀라운 집중력을 갖고 관찰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그를 ‘상대성 이론의 완성자’로서 세계적 명사로 대우받게 만들어 주었다.

 

소년 아인슈타인은 늘‘엄마의 자랑’이었다. 전기기술자로 툭하면 사업을 들어먹는 남편처럼 키우지 않겠다는 ‘염원’까지 보태져 극성엄마의 교육법은 나날이 엄해갔다.

엄한 가정교육을 시키면서도 젊은 엄마는 아들의 총명함이 자랑스러웠다. 번잡한 뮌헨시내에 어린 아들을 혼자 걷게 함으로써 독립심을 키워주려고도 했다.  친척들이 모이면 엄마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아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소년은 주로 혼자 노는 걸 즐겼다. 어쩌면 천재들의 속성상 그렇게 혼자서 무얼 하는 시간이야말로 천재성을 키워나가는데 적합했는지도 모르겠다. 집 뜰에 있는 닭이나 비둘기가 그의 친구였다.

 

아인슈타인의 이런 조용한 성품은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을 닮았다. 헤르만은 꼼꼼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모든 사물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스타일로 다른 사람들에겐 친절하고 관대했다. 비록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거듭해 가족들과 함께 곤경을 겪었지만 주변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인물이었다. 

아인슈타인이 태어나던 1879년 전구가 발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전기설비업에 뛰어들어 매우 치열한 경쟁 속에 사업을 이어나갔다.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아지자 아내 파울리네가 가져온 결혼지참금과 장인으로부터 받은 많은 자금을 쏟아 부었다. 이제 막 거리에 조명을 설치하기 시작한 뮌헨 시의 조명사업 계약권을 따내려 했지만 실패해 회사 문을 닫는 위기를 맞았다.

 

지금도 사업하는 사람들은 부침이 심해 가족들이 순탄치 않은 생활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아직 산업화가 안 된 그 시절에야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자식교육만큼은 언제나 최우선 순위로 생각했다. 아인슈타인 부모의 자식 교육열은 거의 ‘대한민국 강남 엄마들’수준이었다고나 할까. 어떻게 해서든지 최고수준의 엘리트 교육을 자식에게 시키려는 게 그들 부부의 인생최대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1885년 가을 가톨릭 학교인 페터스 슐레(Petersschule)에 입학했다. 전교생이 2천명이 넘는 굉장히 큰 초등학교였다. 생각해보라. 120년 전에 어린 아이들의 함성으로 왁자지껄했을 그런 큰 규모의 학교를. 역시 교육도시 뮌헨의 저력과 전통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70명의 동급생 중 유일한 유대인 소년으로서 아인슈타인은 때때로 인종차별을 당했다. 당시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고독감에 휩싸여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고독한 이방인’의 이미지는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동반자로 언제나 그의 곁을 지켰다. ‘혼자’였기에 그는 학문적 위업을 달성했을지도 모른다.

워낙 혼자 놀기를 좋아하는 버릇 탓에 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은 ‘멍청이’나 ‘공부벌레’혹은 ‘잘난 척 쟁이’로 불렸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왕따’였지만 아인슈타인은 수학 과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항상 1등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의 엄마는 친척들이나 하나밖에 없는 딸 마야에게 그런 사실을 늘 자랑했다. 말하자면 미소년 아인슈타인은 그 시절의 재수 없는‘엄친아(엄마친구 아들)’로서 친구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아이였다. 얼굴도 잘 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하니 놀 친구가 없던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1888년 아홉 살 때 아인슈타인은 뮌헨의 명문 루이폴트김나지움에 들어갔다. 이 중등학교는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학교’에 속했다. 학비는 꽤나 비쌌다. 아인슈타인의 가정형편을 감안할 때 그렇게 비싼 학비가 드는 ‘엘리트 학교’에 보내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대인 부모’의 남다른 교육열은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대학에 보냈던 개발연대 시절의 한국 학부모가 무색할 정도였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부친은 자신이 수학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지만 가정형편상 공부를 계속 하지 못한 것을 늘 아쉬워하며 외아들에게 자신이 하지 못했던 학문을 시키려고 애썼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재능은 바로 부친의 DNA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부친은 생계를 위해 당시 한창 ‘떠오르는 사업’인 전기 설비업에 뛰어들어 가족을 부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