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연재5>아인슈타인 이야기- 연애편지를 잘썼던 꽃미남청년

스카이뷰2 2008. 10. 6. 10:21

 

             스위스 취리히 풍경.

 

 

아인슈타인은 이 학교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는 요스트 빈텔러 선생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인슈타인은 7명의 자녀들이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빈텔러 선생님 집이 자신의 집보다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과 그 부인을 아빠, 엄마로 부를 정도였다.

 

‘마마 빈텔러’는 우연히도 아인슈타인의 엄마 파울리네와 이름도 같았다. 그녀는 하숙생 아인슈타인을 친아들처럼 보살폈다. 아인슈타인도 마마 빈텔러에게 친엄마에게는 감히 하지 못했던 마음 속 이런 저런 이야기를 스스럼  없이 말 하면서 그녀의 사랑이 넘치는 조언을 기다리곤 했다.  

 

아인슈타인의 사촌 로베르트 코흐도 이곳에서 함께 하숙하는 바람에 빈텔러 선생님의 집은 거의 미니학교 분위기처럼 떠들썩한 활기에 넘쳤다. 방과 후에는 미남 빈텔러 선생님과 함께 산책을 나섰다. 전직 기자출신인 빈텔러는  조류학자 이기도해 야외에서 조류관찰을 하는 것이 그의 취미이자 전문분야였다. 정치 이슈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빈텔러는  독일 군국주의에 대해 반대를 분명히 했다. 이런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지않아도 군사적인 것에 혐오감을 느끼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을 더 굳건하게 지켜나가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빈텔러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인연으로 훗날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야는 빈텔러 선생님의 아들 파울 빈텔러와 결혼했다.

인간 아인슈타인의 인생에서 이 빈텔러 가족과의 만남은 그가 늙어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끈끈한 인연의 끈이 되었다. 아인슈타인 역시 비록 실패한 연애였지만 빈텔러의 둘째 딸 마리와 짧지만 달콤했던 첫사랑에 빠졌었다.

 

아인슈타인의 연애편지 솜씨는 마리 빈텔러와의 ‘편지교환’에서 그 탁월한 솜씨를 뽐내기 시작했다. 뮌헨 김나지움시절 읽어낸 방대한 독서량은 이제 그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상대의 마음을 녹여버리는 마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아인슈타인은 죽을 때까지 수 천 통의 편지를 썼다. 그의 이 편지쓰기는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이후 그의 삶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오후는 꼬박 편지쓰기와 답장 읽기로 보내는 일이 그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21세기의 독자들이 읽더라도 그의 산들바람 같은 연애편지는 천하 남이라도 그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만큼 그의 ‘문재(文才)’가 빛났다는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의 막역지우로 가장 친한 벗으로 알려진 미셸 베소도 아인슈타인의 소개로 빈텔러의 큰 딸 안나 빈텔러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한 사람과의 인연이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어느새 10대 후반의 잘생긴 청년으로 변모해가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아라우에서도 입심 좋고 총명한 소년으로 서서히 그 곳 아가씨들의 관심대상으로 성장해갔다.  아인슈타인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가져온 밝은 기운과 바이올린 연주로 순식간에 선망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숱이 많은 풍성한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꽃미남 소년은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급우들보다 한 살 어렸지만 이탈리아 북부를 혼자 몇 달씩 싸돌아다녔다는 그의 무용담에 친구들은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가 돌아다니며 보고 느낀 이야기를 풀어놓으면 모두들 숨죽이고 들어주었다. 그의 쌍꺼풀이 깊게 진 잘생긴 갈색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 아름다운 눈과 조금 도톰한 입술에 감도는 냉소는 그를 돋보이게 해줬다. 자신감 넘치는 그의 화술은 듣는 사람들마저 덩달아 자신감이 생기게 할 정도로 힘이 넘쳤다.

 

대체로 세상의 미남미녀들이 자신의 미모를 잘 알고 있듯이 아인슈타인 역시 자기가 잘생긴 걸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그는 훗날 사촌 누이에게 보낸 엽서에서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제 모습을 설명하자면 창백한 얼굴, 긴 머리카락, 그리고 조금 나오기 시작한 배, 게다가 어정쩡한 걸음걸이, 시가를 물고 있는 입... 그리고 손이나 주머니 어딘가에는 항상 펜이. 하지만 굽은 다리와 점들만 없다면 꽤 잘생긴 편입니다. 못생긴 남자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마구 헝클어진 머리 역시 제외해야겠지요. 어쨌든 직접 만나서 저를 보여드리지 못해 무척 유감스럽습니다.”자기스스로 ‘꽤 잘 생긴 편’이라고 말할 정도라면 그 대단한 자신감의 경지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1915년 스위스로 망명한 프랑스 작가 로망 롤랑은 아인슈타인과 만난 뒤 자신의 일기에 그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아직 젊어 보였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고, 얼굴은 넓적하고 길다. 숱이 많고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는 몇 가닥의 회색머리와         함께 눈썹 위로 솟아 있다. 그의 코는 살집이 좋고 오똑하며, 입은 작지만 입술은 두툼하다. 뺨에는 살이 올라있고, 턱은 둥그스름했다. 또 콧수염 끝은 약간 다듬어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어를 섞어가면서 서툰 불어로 이야기했다. 그는 매우 활발했고, 잘 웃었다. 또 매우 복잡한 사상을 놀라운 풍자를 섞어가며 이야기하는 데 익숙했다. 다른 독일인들은 아무도 아인슈타인처럼 자유롭게 행동하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그 끔찍한 전쟁 동안 고독감으로 고통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웃으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과학을 연구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안토니나 발렌틴도 그의 외모에 대해 상당한 점수를 주고 있다.

‘젊은 시절부터 중년이 될 때까지 아인슈타인의 턱은 둥그렇고 볼은 통통했다. 풍채는 아주 건장했다. 그에게는 불안한 세기말 시대를 좌지우지할 듯한 야성적 매력이 있었다. 검고 강렬한 눈, 너그러워 보이는 입매, 근육질의  몸매를 갖고 있던 그는 과학자라기보다 낭만파 시인 같았다.’

 

아마 그런 ‘시인 기질’은 그의 방대한 독서량과 함께 유년시절부터 가까이한 바이올린의 섬세한 선율이 그의 이미지에 녹아들어 생긴 것 같다. 한 사람이 악기에 심취해 수십 년을 살아왔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의 이미지는 그 악기의 선율과 조화를 이뤄내지 않겠는가.

 

아무튼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도 있듯이 아인슈타인은 ‘슈바벤의 건방진 녀석’‘외로운 늑대’ ‘방랑자 집시’같은 자신의 별명을 즐길 정도로 여유있는 학창시절을 보냈다. 거기에는 자신이 잘생긴 편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그 자신감이 밑받침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